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17)
바다새와 늑대 (116)화(117/347)
#116화
헤더가 지쳐서 나가떨어질 때쯤 간부진으로 불려갔던 키이엘로가 돌아왔다. 그와 붙어있던 텐과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와 함께 있던 발카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겨루던 목검을 내던진 헤더가 항복을 외치며 휴식을 원하자 결국 우리는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주방에 들렀다.
최근 발언을 많이 하기 시작하자 이때다 싶어 간부진에 불려 나가는 빈도가 잦아진 키이엘로는 피곤한 얼굴로 자리를 잡아 앉고는 한숨을 쉬었다.
“요즘 왜 이렇게 자주 부르시지……?”
“이러나저러나 해도 네가 요즘 활동이 늘어난 게 사실이잖아. 아저씨들 입장에선 얘가 슬슬 자리 잡으려나 보다, 이러시는 거지.”
“그럴 생각 없는데…….”
키이엘로는 머리카락을 싸쥐며 잔뜩 울상을 해 보였다. 거참 이 녀석도 별났다. 그렇게 생각하며 요한에게 간단한 샌드위치를 주문한 나는 주방 선원이 가져다준 물을 각자의 컵에 따르기 시작했다. 헤더도 나와 별반 생각이 다르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래도 앞으로도 이렇게 네가 의견을 내야 하는 일은 올 거야. 참여 안 하는 것보단 낫지. 왜 그렇게 싫어해?”
“알잖아……. 아저씨들 사이에 끼고 웃어른 눈치 잘 보는 사람들 사이에 껴서 적당히 비위 안 거슬릴 정도로 행동해야 하는걸.”
오……. 나는 각자 앞에 컵을 밀어준 뒤 내 몫의 물을 홀짝이며 눈을 굴렸다. 그건 진짜 고통스럽지. 유독 피곤해하는 이유도 알만했다. 도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회성 부족한 사람이 극도의 사회성을 필요로 하는 자리에 나가면 이렇게 되는구나. 욕인지 위로인지 모를 말이었다.
키이엘로 역시 헷갈린다는 얼굴로 멍청하게 도멤을 쳐다보고만 있는데, 요한이 우리 몫의 요리를 들고 왔다. 헤더가 얼른 제 몫의 빵을 들고 활짝 웃었다.
“와! 정말 배고팠어!”
“느 요새 로트한테 검 배우든가?”
“그렇지. 로트 정말 잘 가르쳐줘. 좀 힘들지만.”
요한은 헤더의 말에 오오, 하며 반응했다. 나는 괜히 머쓱해져 샌드위치를 집어 들고 물었다.
“그런데 안 바빠? 친히 우리 주문도 받아 주더니, 밥도 가져다주네.”
“마, 느이는 요주의 인물이여. 안 그러겠냐? 갑자기 배에 탄 여자애에, 덜떨어진 부선장에, 문제만 일으키는 괴짜에, 그나마 도멤이 낫다, 마.”
도멤을 제외한 우리 셋은 칼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떨며 조용히 입에 음식이나 집어넣었다. 실력이 뛰어난 요리사인 만큼 요한의 음식은 맛있었지만, 지금만은 맛을 느낄 새도 없었다. 도멤은 그런 우리를 보고 낄낄 웃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베제랑 프라세는 바빠? 뭐 하느라 이렇게 안 보이지? 같은 배에 있으면서 마주친 적이 없네.”
“고놈들이 바쁘겠냐? 항상 똑같제. 와? 가네들 뭐 삥이라도 뜯게?”
“아니, 그냥. 헤더가 로트한테 검을 배우고 있으니까 이왕이면 프라세도 배우는 게 좋겠다 싶어서. 베제보다는 로트가 검이 더 낫잖아.”
그 말에 요한이 어색한 얼굴을 했다. 그가 어쩐지 마땅찮은 얼굴이자 도멤은 입을 비죽였다. 로트 정말 잘 가르치거든? 그러나 요한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게 아녀.
“베제 놈이…… 아마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여.”
“왜? 베제는 항상 프라세에게 근접전을 알려주기 힘들어했잖아.”
뭐, 그래도 혼자 열심히 가르치려 들지 않았나? 나는 베제가 프라세의 교육에 엄청나게 열심인 것을 알았기에 그다지 걱정이 되지 않았다. 베제가 물론 사수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근접전 전투에 완전 젬병인 것도 아니었다. 일전에도 최대한 힘쓰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는 베제가 아마도 프라세를 가르치는 것을 혼자 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요한이 머쓱하게 말했다.
“그,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으래이. 베제 고놈은 로트는 좀 못 미덥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여.”
“…….”
그 말에 키이엘로가 집어 올렸던 빵을 슬쩍 다시 내려놓았다. 나는 잠시간 요한의 말을 곱씹다가 아, 하고 어색한 얼굴을 했다. 최근 안 보이던 이유가 그 둘이 바빠져서가 아니라……. 요한이 연신 자기가 더 면목 없어 하기에 나는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고 샌드위치나 마저 먹었다.
사실 선원들과 내가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아서 그렇지, 나를 아직도 의심하거나 싫어하는 기색이 있는 것은 어지간한 둔치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간혹 다른 선원들과 대화하던 도멤이 벌컥 화를 내며 그들과 다투거나 하는 일도 종종 있었으니 모르긴 몰라도 좋은 소리를 들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키이엘로와 도멤은 신경 쓰지 말라며 어색한 표정을 했지만 그런 일을 하나하나 신경 써봐야 나만 피곤하다는 점은 그 둘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러 상관하지 않는 척, 들리지 않는 척했지만 이렇게 때때로 허를 찌르듯 들어오는 이야기에는 아직까지도 면역이 없었다.
그때 각자 얌전히 있던 텐과 발카가 돌연 고개를 들었다.
『뭐지?』
『사람 소리가 들린다.』
키이엘로가 의아하게 동물들을 보고, 나는 발카를 돌아보았다.
“사람 소리? 바다에서?”
『그래. 수는 많지 않아. 한 명, 많으면 두 명이려나. 일단 목소리는 하나야.』
발카가 대꾸했다. 나는 속으로 청력도 좋지, 하고 혀를 내두르다가 요한과 키이엘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요한이 의아한 얼굴을 하는 것에 발카가 전해준 것을 말해주자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멤이 굳은 얼굴로 속닥였다. 바다의 마녀이려나? 그 말에 나도 잠시 긴장했다.
일단 나가보자. 내 말에 요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은 선장님께 알리겠다며 서둘러 주방을 떴다. 우리도 거의 다 먹은 식사를 밀어두고 선실을 나가 갑판 위로 올라갔다. 낮이 길어져 해가 아직 수평선에 걸쳐진 하늘은 보랏빛과 주홍빛으로 물들며 침잠해가는 중이었다.
소금기가 나부끼는 바람이 옷자락을 헤집는 동안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주변을 살피던 우리는 기대했던―혹은 걱정했던― 바다의 마녀가 아닌 웬 작은 배를 발견했다. 요한이 우투그루에게도 알렸는지 세운과 브레딕, 우투그루 역시 갑판 위로 나오고 있었다.
도멤이 의아한 표정으로 손차양을 하고 배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외치고 있는데?”
“뭐라고 하는 거지?”
배 위에 있는 것은 웬 남자였는데, 그는 허우적거리며 뭐라고 외치고 있었다. 우리 곁으로 다가온 세운과 원이 떨떠름한 어투로 말했다.
“어쩐지 이 상황이 묘한데……. 꼭…….”
“……꼭 세운과 원이 유리 바다에서 발견되던 때 같죠.”
그래! 그거일세! 세운이 손뼉을 치는 사이, 천천히 가까워진 남자의 목소리가 드디어 얼핏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 살려! 도와주세요!”
묘하게 들어본 목소리라는 생각이 스쳤으나 이내 남자 목소리가 거기서 거기지, 하고 생각한 나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바다의 마녀는 아니었네. 내 말에 키이엘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이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요한에게 소식을 듣고 나온 클루스도가 망원경으로 남자가 탄 배를 살피더니 수염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고민하는 것 같은 기색이었다. 하기야 저 청년이 세운처럼 의사거나 하는 식의 유용한 인력이 아닌 이상 구해 줄 필요는 없었다. 이 배는 해적선이지 구조 및 관광 어선이 아니었으니까. 사실 우홉피아주와 조우하지 못하고 있어 후자와 별반 다를 바 없이 보이긴 해도…….
그때 클루스도에게서 망원경을 건네받아 배를 살피던 디겔이 헉, 하며 외쳤다.
“우홉피아주의 옷을 갖고 있다!”
“뭐라고?”
그 외침에 갑판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도멤 역시 인상을 굳히고 다시 남자가 있는 배를 노려보았다. 그때 우투그루가 외쳤다.
“우홉피아주의 포로 옷이에요!”
그러나 그렇게 외친 그도, 그 소리를 들은 선원들도 모두 얼어붙은 분위기를 풀지는 않았다. 그때 클루스도가 손짓하며 말했다. 일단 배에 올려라. 그 말에 선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왠지 점점 기이한 감각이 내 뒷덜미를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오라는 바다의 마녀는 안 오고 이상한 게 오고 난리람.』
일견 태연스러운 발카의 중얼거림과 함께 미지의 인물이 올라탄 배가 가까이 붙어 그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헤더의 옆에서 난간 너머로 몸을 빼 그를 살폈다. 그리고 그 남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얼어붙었다. 그는 자신이 무작정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았는지 연신 감사하다며 눈물을 흘려댔다.
너무 익숙한 얼굴이었다. 고작해야 몇 달도 채 안 되어 다시 만난 얼굴이었다. 내가 굳어 있는 기색을 눈치챈 키이엘로가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로트? 왜 그래? 그때 클루스도가 말했다.
“정체를 밝혀라. 우홉피아주와 무슨 연관이지?”
“네?”
“우리는 우홉피아주를 쫓고 있는 해적선이다. 그러니 바른대로 말해!”
해적선이란 말 탓인지 우홉피아주를 쫓고 있다는 말 탓인지 남자가 희게 질려 그들을 둘러보았다. 목숨을 겨우 부지했다 싶었더니 호랑이 굴에 들어온 것이란 걸 깨달은 얼굴이었다.
해, 해적선이라고요? 그가 덜덜 떨며 거의 숨을 헐떡이듯 외쳤다.
“저는 그, 그 해적들에게 포로로 잡혀 있었어요! 겨우, 여건이 되어 탈출해서 밀항을 시도하다가, 들켜서, 그래서…….”
남자가 횡설수설 떠들었다. 디겔과 요한이 그 이야기를 들으며 무어라 클루스도에게 귓속말로 언질했고, 우투그루는 눈을 반쯤 가늘게 뜨고 그를 살피고 있었다. 키이엘로 역시 그를 살피다가 다시금 나를 보며 물었다.
“로트, 왜 그래?”
“저놈…….”
나는 누가 머리를 내려친 것 같은 충격에 휩싸여 그를 보고 있었다. 키이엘로의 물음에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그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인상을 찡그리다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눈을 부릅뜨더니 나를 불렀다.
“로트렐리?”
나는 오랜만에 듣는 그 이름에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로트렐리’? 도멤이 의아하게 웅얼거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누가 말릴 틈도 없이 그가 나를 향해 땅을 기듯 뛰어왔다. 선원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내게 쏠렸다.
“너 로트렐리지! 로트렐리 아피나!”
나, 나 알지? 나 테드야. 그가 동아줄이라도 발견한 듯 내 어깨를 붙들었다. 너, 너 머리카락이 짧아져서 바로 못 알아봤어. 나 기억하지? 나, 네 친구였잖아……. 그가 무어라 떠드는 동안 나는 엉망으로 뒤엉키는 생각 속으로 갖가지 물음표가 떠올렸다. 이 새끼가 왜 여기 있지? 뒤진 거 아니었나? 왜 이 새끼가 여기에 있지? 랄티아는 어쩌고?
그때 테드가 말했다.
“나, 나 네 동생이 탈출시켜준 거야! 네 동생 살아있는 거 알아?”
나는 그 말에 곧장 그의 멱살을 붙들었다. 순간 숨이 막힌 테드가 컥, 하고 졸린 소리를 내며 내 팔을 붙들었다. 그가 당황해서 발버둥 치자 나는 테드의 배를 걷어차고 이를 갈며 물었다.
“내 동생이 뭐라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