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2)
바다새와 늑대 (11)화(12/347)
#11화
모포를 덮어 온기가 고이자 저절로 피로가 몰려왔다. 그런 내게 키이엘로가 흘러가듯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잔치는 취소될 것 같아. 날씨가 이러니…….”
“아무렴 상관없어. 나는 지금 너무 피곤해……. 키이엘로 넌 이제 좀 씻으러 가라.”
도멤이 키이엘로에게 낄낄거렸다. 그는 민망한 듯 비척이다가 도멤의 정강이를 가볍게 걷어차고는 샤워실로 향했다. 나는 키이엘로가 더 멀어지기 전에 둘에게 말했다. 그래도 생각해줘서 고마워.
내 말에 키이엘로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돌아봤다. 도멤도 날 보다가 가볍게 웃었다.
키이엘로가 샤워실로 가고, 도멤은 졸려 하는 나를 데리고 이러쿵저러쿵 대화할 생각은 없는지 자신의 해먹―창고 벽과 기둥 사이에 이어진 해먹이었다―에 누워 밧줄을 가지고 이리저리 매듭지으며 손장난을 했다.
나는 그걸 멀거니 구경하다가 피곤에 못 이겨 눈을 감았다.
편안한 수면을 취하고 싶었다.
* * *
우르릉…….
번개가 치는 소리를 들은 기분이었다. 빗소리 사이로 흥얼거리는 노래가 들려왔다. 눈을 슬그머니 뜨자 검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랄티아가 창가에 앉아 램프의 불빛에 책을 비춰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밤의 어둠이 내려앉은 방은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로 고요했다. 빗소리와 랄티아의 콧노래만이 정적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가위라도 눌린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희미하게 뜬 눈을 굴리고 있는데, 랄티아가 보고 있는 책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이전의 바다」
제목은 그렇다 치고, 나는 저런 책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꿈인가? 그렇다면 기묘한 꿈이다. 밖에서 번개가 내리쳤다. 창밖으로 아주 작게 파도 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우리 집까지 파도 소리가 저렇게 크게 닿던가…….
그때, 랄티아가 책을 덮고 천천히 일어났다. 허리까지 닿는 머리카락이 창틀에 흩어졌다가 일어나는 몸짓에 허공에서 흔들렸다. 흰 발이 천천히 내게로 다가온다. 나는 아직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나는 온몸에 힘을 주고 발버둥 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랄티아의 회색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엔 뻥 뚫린 구멍뿐이었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랄티아가 콧노래를 멈추자 돌연 빗소리도 뚝 멎었다. 나는 내 심장 소리만 귓가에 울리는 걸 느꼈다.
쿵, 쿵, 쿵. 박동하는 맥박이 마치 귀에 대고 북을 두드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랄티아가 입을 벌리자, 마치 용암에 녹아내리는 대지처럼 이가 후두둑 빠지고, 잇몸이 녹은 살덩이처럼 뚝뚝 떨어졌다.
랄티아의 입에서 피가 울컥울컥 차오르고 있었다. 무언가 말하려는 것 같은 목소리도 빠진 이와 핏물 때문에 보글거리는 것 같은 소리로 변했다.
내 위로 고개를 내린 랄티아로 인해 입에서 울컥이는 피가 내 이마로 떨어졌다. 무언가를 상기시키는 감촉에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제 이 마을을 떠나 먼 길을 떠날 너에게 ‘축복’을 내리니…….’
발버둥을 치려고 해도 몸은 점점 더 뻣뻣하게 굳어갔다.
그 순간 돌연 랄티아가 말했다.
“언니.”
랄티아의 모습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동생의 회색 눈이 또렷하게 반짝였다. 뒤늦게 화로의 온화함이 밖으로 드러난 팔에 희미하게 닿아왔다.
창밖으로 한 번 더 나직하게 천둥이 울렸다. 랄티아는 내 어깨를 짚었다가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러다가 내 배 위쪽을 가리키고는 말했다.
“잠시 후야.”
* * *
나는 눈을 번뜩 떴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숨을 들이켜자 폐가 잔뜩 압축되었던 것처럼 상체가 모두 뻐근했다. 나는 조용히 숨을 몰아쉬다가 눈가로 흐른 땀을 닦아냈다.
시선을 돌리자 각자의 해먹에서 곤히 잠든 도멤과 키이엘로가 보였다. 텐은 키이엘로의 해먹 아래에 누워 자고 있었고, 발카도 해먹의 옆에 있는 상자에 앉아 수면 중이었다. 배는 조용히, 간간이 삐걱대는 소음만 뱉을 뿐 아침처럼 격하게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숨을 조용히 몰아쉬다가 눈을 굴렸다. 기이할 정도로 꿈이 생생했다.
문득 랄티아가 마지막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잠시 후’라니, 대체 뭐가……. 잠시 진정하고 한숨을 쉬는데, 돌연 칼이라도 맞은 것 같은 통증이 복부에서 피어올랐다. 나는 악 소리가 나오려는 것을 입술을 깨물고 버텼다.
지나친 아픔에 눈물이 찔끔 흘렀다. 배를 감싸 안고 해먹 위에서 웅크리자 잠시 후 통증이 곧 몰려가 사라졌다.
나는 다시 비어져 나온 식은땀을 느끼고 눈을 깜빡였다. 망할……. 숨을 길게 내쉬는데 어디선가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서 조금 긴장했지만, 통증은 완전히 가신 이후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고통은 상당했다.
가라앉은 눈으로 허공을 짚던 나는 해먹에서 몸을 일으키자, 바로 옆에서 키이엘로가 인상을 잔뜩 쓰고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았다.
이 녀석도 가위에 눌리는 건가? 나는 조용히 키이엘로를 보다가 잠시간의 고민 끝에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텐이 깨지 않도록 몸을 조금 멀찍이 떨어뜨리고 키이엘로의 어깨를 몇 번 흔들자, 곧 그가 몸을 퍼뜩 떨며 눈을 떴다.
그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숨을 몰아쉬다가, 식은땀을 닦고 시선을 굴렸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몸을 일으켰다. 나는 시큰둥하게 물었다.
“……나쁜 꿈이라도 꿨나 봐?”
“……응.”
“나도야.”
“아…….”
키이엘로는 눈을 깜빡이다가 내 안색과 이마에 달라붙은 검은 머리칼을 봤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뜻 없이 물었다.
“지금 언제쯤이지?”
“……한밤중 같아.”
내 물음에 대꾸한 키이엘로는 돌연 작게 웃었다. 나는 그가 악몽을 꾸고도 금방 웃는 게 신기했다. 키이엘로가 나를 보며 웃음을 갈무리하고는 말했다. 너 오늘 하루 종일 자서 도멤이 걱정했어.
나는 유감스러웠다. 악몽으로 숙면을 조금 망치긴 했지만, 만연하게 시달렸던 피로도 좀 떨어졌기 때문에 도멤이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배 안 고파? 키이엘로가 다시 물었다. 나는 잠시 그가 이례적으로 생산적인 질문을 했다는 점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별로. 키이엘로는 조용히 해먹에 앉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거의 눕듯이 해먹에 앉았다. 머리를 누이는 곳이 가까이 붙어있었구나. 먼저 자서 몰랐다. 하기야 발을 누이는 곳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잠시 조용해지자, 키이엘로는 눈을 멍하니 뜨고 꿈을 더듬는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나는 그런 그를 빤히 보다가 물었다.
“무슨 꿈을 꿨어?”
내 말에 키이엘로는 거의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나는 졸지에 민망해져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아 뭐, 말하기 싫으면……. 내 말에 키이엘로가 다급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더니 잠시 머뭇거리며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허공을 작게 휘젓는 손에 나는 평소 자주 쓰다듬는 텐의 털이 키이엘로의 정서 안정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지 않을까 추측할 뿐이었다.
키이엘로가 매끈한 이마에 조금 달라붙은 머리칼을 닦듯이 빗어치우며 말했다.
“……어머니의 꿈을 꿨는데.”
오 이런. 나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끽해야 크라켄이 해적선을 감싸 쥐고 삼키려 하는 흥미진진한 내용일 줄 알았지.
하긴, 나조차 말하기엔 거북한 꿈을 꿨는데 키이엘로라고 아니진 않을 수 있단 걸 간과했다. 나는 급격하게 어색해진 나머지 슬쩍 몸을 일으켜 바르게 앉았다.
키이엘로가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지 고르는 중인 듯,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 가끔 꾸는 꿈이야.”
“……어머니가 그리운 거야?”
내 물음에 키이엘로는 예의 그 기이한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제 손바닥만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잘 모르겠어. 나는 어색하게 눈을 굴리다가 말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어머니는 어디 계시는데? 이 해적선은 고향 섬이 있다는 것 같던데 거기 계셔?”
내 말에 키이엘로가 나를 보고 흐리게 웃었다. 그……. 돌아가셨어. 키이엘로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나는 잠시 울고 싶어졌다. 이래서 입을 함부로 놀리면 안 되는 거다. 사람이 말을 많이 해서 불러올 수 있는 건 파멸뿐이다.
갑판 위로 올라가서 바다로 뛰어들고 싶어졌지만 나는 애써 침착을 가장하고 심호흡을 했다. 그러다가 키이엘로의 잘생긴 얼굴에 잔뜩 난 멍을 보고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안 아파?”
“나?”
“얼굴에 멍이 들 정도니 다른 곳이라고 안 맞았을까 싶어서. 아님 혹시 얼굴만 맞았어?”
우투그루, 비열한 놈이었군……. 저 얼굴을……. 그런 생각을 하는데 키이엘로는 전혀 뜻밖의 말이라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가볍게 웃었다. 듣자 하니 옆구리 등등 여러 곳을 맞았다는 것 같았다.
나는 그때에는 혀를 찼다. 쌈박질이나 하고. 내 말에 키이엘로는 그저 여상하게 흘려 넘겼다.
주변은 조용했고, 자다 깬 느긋한 분위기 탓이었는지 지나쳤었던 궁금증이 다시 솟아났다.
“왜 싸운 거야?”
“……사이가 안 좋으니까?”
“그럼 그냥 모르는 척하고 지나가지 굳이 치고받고 싸운 이유가 있을 것 아니야.”
키이엘로는 내 말에 기이한 얼굴을 했다.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클루스도가 키이엘로와 우투그루에게 싸움의 이유를 묻지 않았던 것을 기억해냈다.
나는 그 일을 입에 올리는 대신 키이엘로의 대답을 기다렸다. 키이엘로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뒷목을 문질렀다. 난감한 듯했다.
“…우투그루가 시비를 걸었는데. 내가 그걸 지나치지 못하고 거기에 좀…… 못을 박는 말을 했지.”
“그래?”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굳이 자세한 말을 듣진 않았지만 퍽 객관적으로 말하는 느낌이 났다. 조금 화두가 돌아가자 마음이 편해진 나는 턱을 괴고 키이엘로를 빤히 보았다. 키이엘로는 내 시선이 부담스럽다는 듯 몸을 슬쩍 반대쪽으로 빼고 있었다. 왜 형제간에 사이가 나빠진 거지?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키이엘로가 어설프지만 확실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 너는 무슨 꿈을 꿨는데?”
그러나 그 질문을 듣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내 얼굴을 보고 키이엘로가 쫄아서 ‘미안…….’ 하고 찌글찌글하게 대꾸한 것도 내 잘못은 아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여동생 꿈. 그러자 키이엘로는 아까의 나처럼 오 이런, 하는 얼굴이 되었다.
나는 가볍게 피식 웃고는 키이엘로에게 말했다.
“봐줄게. 아까 나도 네 꿈에 관해 물어봤으니까.”
내 말에 키이엘로의 얼굴이 밝아졌다. 확실히 키이엘로도 나쁜 녀석은 아니었다. 도멤처럼 평범하게 착한 녀석에 속하면 속했지.
그러니까, 그들에게 진심으로 대하지 않고 관심도 두지 않는 것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라는 것이다. 숨기는 것이 있고 감추는 것이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물에 적신 솜처럼 느릿하던 머리로 씁쓸한 기분이 스미는 것을 느꼈다.
여유가 없었다. 나는 혼자였고, 누군가를 쉽게 믿을 수 없는 환경이고, 무엇보다도 서둘러 동생을 되찾아야 했다. 만약 수가 틀리게 된다면 그땐 다시 이곳도 벗어나 홀로 떠나야 할지 모른다. 그런 생각이 고립감을 불러왔다.
내가 더 말을 하지 않자, 뭐라고 말을 걸까 고민하는 것 같던 키이엘로도 잠시 후 조용히 해먹에 누웠다.
나는 한참 나중의 일을 생각했다. 이 해적선의 도움을 받아 우홉피아주를 찾고, 랄티아를 구출하고, 그러고 난 뒤의 일들을. 랄티아가 원하는 섬에 가서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나는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고, 랄티아는 원하는 책을 마음껏 보면서.
나는 문득 랄티아를 구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외면하고 있던 현실이 눈앞에 들이 밀어지는 기분이었다. 막막했다. 우홉피아주는 바다새를 원하고 있지만, 혹시라도 마음이 변해서 필요 없다고 여긴다면. 아니면 랄티아를 찾기 전에 내가 죽는다면.
사실은 우홉피아주가 생각보다 더 사악해서, 랄티아를 이미 죽였다면.
생각이 엉망으로 꼬여갔다. 뒤숭숭한 꿈과 통증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해먹에 누워 천장을 보았다. 키이엘로가 내 한숨 소리에 고개를 살짝 들어 나를 보았다가 이내 다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수많은 생각을 하며 남은 밤을 지새워야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