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22)
바다새와 늑대 (121)화(122/347)
#121화
석양 아래를 유영하던 고래들이 모두 물러갈 때쯤엔 이미 하늘에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테드를 감시하다 지친 듯 터덜터덜 돌아온 도멤을 반겨주며 멀리서 들려오는 고래의 노래를 들었다. 그러다 고래가 있다는 소리에 뒤늦게 나온 요한에게 걸려 낚시를 하지 않고 있다며 된통 혼났다.
디겔과 열심히 떠들다 온 헤더도 와서 고래를 찾았다. 이미 멀찍이 헤엄쳐가는 고래를 아쉽게 보던 그녀는 입을 비죽이며 말했다.
“아빠가 이상한 개그 칠 때 나왔어야 하는데.”
그러나 그렇게 말한 것치고는 헤더도 간만에 한 부녀끼리의 대화가 좋았는지 기분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넷이서 갑판에서 별구경을 하던 중에 네토르가 다가왔다. 왜 왔냐, 하고 쏘아붙이려 쳐다봤으나 이내 그가 일전에 발카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고 말했던 게 떠올라 관뒀다.
어슴푸레한 하늘은 맑았고, 샛별들이 반짝이며 파도에 뿌려지고 있었다. 멀찍이 무리 끝의 고래 떼들이 아직 보였다. 말하자면 이 멋진 광경을 두고 굳이 기분이 나쁠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네토르도 발카의 말을 전해 줄 나를 거슬러 굳이 마찰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는지 뚱하지만 얌전하게 말했다.
“전에 약속한 거 기억하지? 네 바다새와 있을 때 말을 전해준다며.”
“그래, 내 기억력엔 문제없어. 뭔데?”
내가 별달리 딴지 걸지 않고 받아주자 도멤이 옆으로 몸을 기울이며 흥미진진하게 보았다. 바다의 전설에 관한 이야기야? 재밌겠다! 헤더도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전설이니 초월자니 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나도 딱히 미신을 믿지는 않아도 이야기를 듣는 것은 재미있어하니 그리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도멤과 헤더가 어떻든 네토르는 흠, 하며 발카에게 물었다.
“바다의 주인을 실제로 본 적 있어?”
『아니, 하지만 바다에서 비롯된 이들과 바다에 몸담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알게 돼. 메흐의 존재에 대해서. 하지만 그가 죽은 이후로는 달라졌어. 바다에서 태어난 이들조차 메흐를 느낄 수 없어. 하지만 나는 메흐가 죽기 전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에 대해 알고 있지.』
신기한 이야기였다. 내가 발카의 말을 전해주자 도멤과 헤더가 오오, 하며 더 눈을 빛냈다. 네토르는 발카가 알고 있는 바다의 주인에 관해 물었다. 발카는 머리를 갸웃 기울이며 대답했다.
『그는 바다처럼 푸른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를 갖고 있었어. 바다의 모든 것이 그를 사랑했고, 그는 사랑받을 만한 자였지.』
“푸른 눈이라고?”
내가 말을 전해주자 도멤이 끼어들었다.
“전승되는 이야기에선 자색 눈이던데. 잘못 전해진 걸까? 아무렴 사람의 기록보다 바다새인 발카 말이 더 신뢰가 가기는 해.”
『자색 눈은 주로 그가 만들어낸 이들이 가진 눈이야. 나처럼 말이야. 자색 눈이라고 전해진 건 아마 바다새를 보고 메흐를 생각했기 때문에 와전된 것일 수도 있어.』
나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인 도멤과 헤더에게 발카의 말을 전해주느라 서둘러야 했다. 오히려 네토르보다 그들이 더 관심을 갖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네토르는 자신의 눈이 자색인 것이 생각났는지 미묘한 얼굴이었다. 바다의 주인이 파란 눈을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나도 그와 별반 다를 것 없는 기분이었다.
뭐, 우연의 산물인 네토르와 달리 나는 실제로 바다의 주인의 힘 중 일부를 갖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된 후였으니 기분은 더 미묘해졌다. 키이엘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흥미롭네.”
“그치만 대부분은 이미 알고 있는 거야. 전혀 새로운 이야기는 별로 나오지 않네.”
“너 진짜 얼마나 자료를 모은 거야?”
만족하지 못하는 네토르를 보며 도멤은 혀를 내둘렀다. 네토르는 어깨만 으쓱이고 다시 물었다.
“그럼 바다의 주인과 친했다는 친우들을 알아? 지금의 초월자들 말이야.”
『나는 바다에서 나고 자란 생명이라 다른 초월자들에까지 자세하게 알지는 못해. 다만 그들이 메흐와 친했다는 것만 알지.』
발카의 말을 전해주자 네토르는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꼴사나운 표정을 보다가 물었다.
“바다의 주인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는 거 아니었어? 왜 다른 초월자까지 궁금해해?”
“바보냐? 연구의 기초는 하나의 주제와 연관되어있는 자료를 조사하며 상관관계를 알아내는 거야. 그걸 통해서 원래의 주제에 대해서도 더 심도 있는 이해가 가능하니까.”
“진짜 이 배는 왜 괴짜 연구자들이 많지?”
“그거 내 얘기는 아니지?”
내가 질색하는 것에 뒤에서 떨떠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브레딕이었다. 네 얘기 맞는데. 나는 표정으로 그에게 대꾸해줬다. 혼자 약학을 독학하는 그나 바다 전설을 연구하는 네토르나 다 이상한 놈들이었다. 브레딕은 엷은 붉은색 눈으로 나를 잠시 마땅찮게 쳐다보다가 키이엘로에게 말했다.
“다시 정보가 부족해졌지만 우홉피아주의 항로가 일부분 전해진 걸 토대로 제국을 향하기로 했어. 근데 지금 제국 분위기가 영 별로라 누구 하나가 육지로 가야 할 것 같아.”
“……제국에?”
키이엘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브레딕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투그루 대신 말을 전하러 온 것 같았다. 하기야 그 둘이 일 관련으로 대화해봐야 싸우기밖에 더 하겠는가……. 우투그루도 나름대로 키이엘로가 그와의 마찰을 피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브레딕을 보냈지.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서 물자와 정보를 충당해야 하니까. 일전에도 내내 네가 했던 일이니까 이번에도 할 건지 의향을 묻고 싶어서.”
“아…….”
키이엘로는 멍하니 침음을 흘렸다. 조금 망설이는 것 같았다. 키이엘로와 처음 만난 것도 그가 육지에서 귀환할 때였으니 그 업무가 그가 주로 도맡는 일이었다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도멤이 얼떨떨한 얼굴로 키이엘로를 보다가 내게 말했다. 야단났네, 저거 한 번 나가면 한 두어 달은 못 보는데.
나는 그의 말에 그제야 키이엘로가 망설이는 이유를 알아챘다. 하기야 전에도 한 달 동안 육지에 있다가 돌아온 거랬지. 그가 배에 올라 몇 달간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어서 키이엘로가 육지에 가게 되면 어떨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브레딕이 의외라는 듯 키이엘로를 보았다.
“하기 싫어?”
“아니, 그건 아니지만.”
키이엘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고민해보고 내가 선장님께 말할게. 그러자 브레딕은 마치 시골을 떠났다가 멋쟁이로 돌아온 촌뜨기를 보는 것처럼 키이엘로를 뜯어보더니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키이엘로가 물었다.
“물자가 부족한 거야, 정보가 부족한 거야?”
“물자는 아직 여유가 있어. 적어도 두세 달은 더 버틸 정도지. 요새 너희가 낚시하는 게 재미있어 보였는지 다른 선원들도 낚시하고 있거든. 물론 큰 폭은 아니지만, 요한이 미소 지을 정도는 됐지. 문제는 정보야. 우리가 유람선은 아니잖아?”
키이엘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알았다며 브레딕을 돌려보냈다. 브레딕은 뒤돌아 자리를 떠날 때까지 키이엘로를 생경하게 쳐다보다가 멀어졌다. 키이엘로가 우리 쪽으로 와서 앉자 곧바로 도멤이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갈 거야? 그에 키이엘로는 미묘한 얼굴을 했다.
“믿을만한 정보원에 대해 잘 아는 건 나니까 내가 가는 게 낫긴 한데…….”
키이엘로가 말끝을 끌며 주춤거리자 헤더가 낄낄 웃었다.
“친구들이랑 떨어지는 게 싫은 거구나. 으이구, 귀여운 놈.”
“아니, 그게…….”
부인하려던 그는 이내 끙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웬일로 자기 일 끝났다고 곧장 뜨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던 네토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친구라니, 그래서 대의를 품겠어? 도멤이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너도 친구 없어서 그래? 네토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보고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설설 젓다가 키이엘로에게 물었다.
“정보원을 얻는 게 어려워?”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써야 하니까. 우리 정보가 우홉피아주에게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입이 무거우면서 그들에게 역으로 잡히지 않을 정도로 실력이 좋아야 하거든. 그래서 비싸긴 하지만…. 우홉피아주에게 원한 있는 정보원도 있어서 이해관계가 맞으면 비교적 값이 싸지기도 하고, 게다가 나는 인맥이 있어서 조금 할인받아.”
“육지에 인맥이 있다고?”
“뭐…… 어디 가서 내세울 인맥이 아니긴 하지…….”
키이엘로가 무안한 얼굴로 말을 늘였다. 나는 그러려니 넘기며 말했다. 그럼 네가 가긴 해야겠네. 내가 그렇게 말하자 키이엘로는 갑자기 폭삭 삶아진 숙주나물처럼 축 늘어져 ‘그렇지……?’ 하고 웅얼거렸다. 도멤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뭐, 그래도 정보만 필요한 거면 정말 한 달 남짓 걸리겠네. 후딱 해결하고 후딱 돌아와! 그럼 되지.”
“그건 그렇지. 그런데 이번엔 제국 눈 피하는 게 좀 힘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만날 장소가 여의치 않아.”
그 말에 네토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 주변 섬은 이미 제국한테 먹힌 게 현실이었다. 제국 근처의 섬이 크기가 조금만 크다 싶으면 제국은 곧장 자기 지배하에 두려 안간힘을 썼다. 이미 제국 관할로 통합된 섬들도 많았다. 그러니 제국 본섬을 벗어난 곳이라고 안일하게 정박하다간 제국군에 눈도장 한번 확실히 찍게 될 것이다.
그때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던 키이엘로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너희랑 한 달 정도 못 보기도 하고.”
“헉……. 굉장히 감동받아야 하는 걸까? 꾸준히 밥 주던 길고양이가 어느 날 날 따라오는 걸 알았을 때의 기분이 이런 걸까?”
도멤의 헛소리에 키이엘로가 재빠르게 말했다.
“도멤이랑은 두 달 정도 마음의 거리가 필요할 것 같긴 하지만 말이야.”
“두 달이 뭐야, 이십 년간 보지 말자.”
나 역시 단조로운 어투로 지껄였다. 헤더가 깔깔 웃어대고 도멤이 억울해하는 사이, 네토르가 물었다.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가긴 해야지. 어째 재촉하는 것 같다?”
“이왕 제국으로 가는 거면 내가 적어주는 책 좀 사다 줘.”
“이런 미친…….”
키이엘로가 질색했다. 한바탕 또 웃음을 터뜨리던 헤더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어쨌든 그럼 정보 얻으러 다녀와야겠네. 그 말에 그러게, 하고 대꾸하려던 참이었다.
“그래? 정보라고?”
낭랑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전에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흰 맨발이 공중에 떠 허공을 느리게 가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몸은 마치 푹신한 솜에 드러누운 것처럼 비스듬하게 늘어져 있었다.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푸른 머리카락이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은 뒤에야 한 박자 늦게 기류가 휘몰아쳐 갑판 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의 시선까지 끌어모았다.
허공을 유영하며 떠 있는 진주가 어둑해진 하늘의 샛별보다 더 반짝이며 빛났다. 물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바람의 흐름과 상관없이 넘실거리는 머리칼이 밤하늘에서 걷어간 푸른 커튼 같았다. 샐긋한 눈매가 휘며 웃음기를 띠자 자색 눈이 명료하게 빛났다.
“다시 만나네, 로트.”
바다의 마녀가 친근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일순 넋을 빼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정말로 바다의 마녀가 나를 찾아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