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23)
바다새와 늑대 (122)화(123/347)
#122화
헤더가 목이 졸린 것처럼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긴장감이 묵직하게 내려앉아 폐부를 틀어막았다. 태연자약한 얼굴로 턱을 괴고 있는 소녀가 느릿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뭐야, 왜들 이리 긴장하고 있담? 그러더니 둥근 손끝을 휘저어 무거운 공기를 한 꺼풀 걷어냈다.
그럼에도 선원들은 모두 굳어서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앞에 있는 것은 ‘그’ 바다의 마녀였다.
그때 파스슥, 하고 무언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허리춤에 매단 주머니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흠? 하고 콧소리를 내는 것에 나는 서둘러 주머니를 끌러서 안을 열어보았다. 그녀가 준 진주와 에르노리가 준 이파리가 든 주머니였는데, 황금 이파리가 바스러져 흩어지고 있었다.
루루미가 그것을 보더니 오호라, 하며 흥미롭다는 투로 말했다.
“그 앤 정말로 인정머리가 없네. 나와 만나기 전까지 쓰지 않았다면 폐기한다는 걸까?”
‘그 애’가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듣지 않아도 뻔했다. 나는 긴장한 상태로 바다의 마녀, 루루미를 올려다보았다.
“안녕하세요.”
도멤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발카 역시 주춤주춤 물러나며 내 머리 뒤쪽으로 몸을 구겨 숨었다. 보통 위험을 느끼면 내 앞을 감싸던 것과는 다른 태도였다. 암만 간덩이가 큰 바다새라도 초월자는 두려운 건가?
루루미는 느긋하게 웃으며, 얼핏 천진난만한 말괄량이처럼 짓궂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반가워.”
“당신이 저를…… 주시하고 있다고 인어에게 들었어요.”
“맞아.”
“이전의 폭풍도 당신이 보낸 건가요?”
내 말에 루루미는 자줏빛 눈을 반짝이며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권태롭게 공중에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킨 루루미가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폭풍? 쏘삭이듯 묻는 소리에 나는 주먹을 꾹 쥐며 긴장했다.
“폭풍, 폭풍이라. 어떤 폭풍을 말하는 거야? 네가 겪은 폭풍은 여러 개 아니니?”
“가장 최근의 거요.”
“아하.”
루루미는 손뼉을 치며 눈을 굴렸다. ‘그것 말이지…….’ 그때였다. 선미루에서 문이 열리더니 디겔과 클루스도가 나오고 있었다. 고요한 갑판이 의아했는지 디겔이 뚱기쳤다.
“뭐야? 다들 왜 이리 조용해?”
허업. 헤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뜨악한 얼굴의 선원들이 루루미의 뒤에서 디겔을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클루스도 역시 의아한 얼굴이었다. 아직 이쪽을 살피지 못한 디겔이 말했다. 다들 합죽이 놀이라도 하고 있더냐? 그때 루루미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순식간에 갑판 위로 파도가 타고 올라와 마치 여러 개의 거대한 창처럼 변해 그들을 겨누었다. 디겔과 클루스도가 깜짝 놀라 뒤늦게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헤더가 그것을 보고 졸도할 것 같은 얼굴로 루루미와 디겔 방향을 빠르게 번갈아 보고 있었다. 루루미는 느리게 고개를 돌려 디겔을 보고는 심통이 난 어린아이처럼, 그러나 명확히, 위협적으로 말했다.
“시끄럽게 굴지 마. 내가 로트에게 대답하는 중이잖아. 예의 없기는.”
“바, 바…….”
바다의 마녀, 하고 말하려던 것을 손으로 틀어막은 디겔이 날카로운 파도를 곁눈질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헤더가 조마조마한 얼굴로 디겔을 바라보았다. 나는 루루미가 조금만 더 변덕을 부리면 헤더가 정말로 쓰러질지도 모를 것 같아 부러 크게 입을 열었다.
“남의 배에 대뜸 올라놓고 주인처럼 구는 게 예의인 것 같진 않은데요.”
이번엔 도멤과 키이엘로 쪽에서 곧 졸도할 것 같은 숨소리가 났다. 나도 루루미가 나에게 무언가 원하는 게 있다는 것만 믿고 반쯤 도박 삼아 배짱을 부린 것이라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쫄지 말자, 어차피 수틀리면 디겔만 죽고 끝나는 거야. 아니, 전혀 위로가 안 되는군. 디겔 아저씨, 미안합니다.
그때 루루미가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샐쭉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날카롭게 얼어붙은 것처럼 서 있던 파도가 부드럽게 무너져 내려 다시 바다로 돌아갔다.
“네 말이 맞네. 그래, 손님은 나지.”
아니, 불청객인가? 루루미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마녀는 유유히 공중을 헤엄치듯 걸어 선수의 난간에 걸터앉았다. 무릎 위로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괴는 모습이 초월자가 아니라 마치 바다 뱃놀이를 나온 부잣집 소녀 같았다. 포말 같은 레이스를 끝단에 단 흰 치마저고리를 입은 루루미가 손을 까딱였다.
“다들 알아서 해봐, 내 인내심을 발휘해서 너희의 행동에 어떤 제동도 걸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우리 중 누군가 당신에게 해를 끼치면 어쩌려고요?”
내 말에 루루미는 자색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파도가 모래사장을 쓸 듯이 가볍고 간지러운 웃음이었다. 푸른 머리카락의 끄트머리가 마치 옅은 바다로 올라온 것처럼 에메랄드빛으로 산란하며 변했다가 원래의 푸른빛으로 되돌아왔다.
눈물까지 뽑아내며 웃은 루루미가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며 말했다.
“귀여운 소리 하긴.”
귀엽다고?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어쨌든 루루미가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 약속되자, 헤더는 서둘러 디겔에게 달려갔다. 디겔이 헤더에게 등짝을 얻어맞는 것을 뒤로하고 도멤 역시 흐느적대며 내게 걸어와 속닥였다.
“로트으, 어쩌자고 그런 말을 해!”
“나도 반쯤 도박이었어.”
“로트 넌 평생 도박하지 마!”
아니, 안 할 거긴 한데…….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도멤을 보았다. 클루스도가 멀찍이서 우리를 응시하다가 다른 선원을 불러 우투그루를 호출하는 것 같았다. 네토르는 그새 도망쳤는지 보이지 않았다. 키이엘로가 슬그머니 다가와 내게 징징대는 도멤을 떼어냈다. 루루미의 눈치가 보인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어떻게 해야 하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루루미를 보았다.
마녀는 흥미로운 것을 구경하듯 키이엘로와 도멤, 나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얇은 눈을 다시 샐긋 휘어 웃었다.
“너와 대화하기 위해 왔어.”
가장 악명 높은 초월자의 입에서 나온 말 치고는 평화로운 내용임은 틀림없었다.
“가장 최근의 폭풍은 그래서 뭐였어요?”
바다의 마녀라는 거대한 존재를 버티지 못하겠다 생각한 선원들은 선실로 들어가고, 그나마 배짱 있는 녀석들은 갑판에서 루루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루루미는 난간에 걸터앉은 그대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마치 날개옷처럼 두른 그 기이한 분위기만 아니었다면 정말로 마실 나온 소녀처럼 보일 것이었다.
나는 그 앞에 있는 오크통에 앉아서 루루미를 보고 있었다. 한 발짝 뒤에서는 키이엘로와 도멤이 텐과 발카와 함께 서 있었다.
“네가 애먼 곳에서 헤매고 있는 것 같았거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간섭이었지. 인어를 만났다면 사란이겠지? 다행히 그 아이와 만났구나.”
“아니……. 그렇다고 폭풍을 일으켜요?”
“배의 항로를 바꾸는 데에는 적격이잖니.”
대체……. 나는 황당한 기분으로 루루미를 쳐다보았다. 뒤에서 거기서 태연하게 대거리하는 네가 제일 황당하다며 꿍얼대는 도멤의 목소리가 얼핏 들렸지만 무시했다. 루루미는 연신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는데, 그러다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물었다.
“이상하네. 분명 네 저주를 풀어달라고 먼저 말할 줄 알았어.”
“……당신이 일으킨 폭풍 때문에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면 아마 아닐걸요. 그리고……. 저주를 풀어달라고 한다면 풀어줄 거예요?”
“이미 풀었는데?”
네? 나는 당황해서 반사적으로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애초부터 저주를 눈으로 살필 수 있었던 것도 아니라서 몸은 이전과 별반 다를 것 없었다. 나는 배와 허리께를 더듬다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루루미를 쳐다보았다. 루루미는 내가 하는 짓을 귀여운 햄스터라도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어느 틈에 그랬단 말인가? 나는 아무런 감각도 없었는데……. 아니, 정말 저주를 푼 거긴 할까? 내가 미심쩍은 얼굴로 루루미를 쳐다보자 마녀는 어머머, 하며 과장된 소리를 냈다.
“지금 초월자를 의심하는 거니? 내가 빛이 있으라, 하면 그곳에 빛이 있는 거지 의심하면 못써.”
“정말 저주를 풀었어요?”
“그래. 푸는 데 어렵지도 않았어.”
마치 너스레 떨 듯 말하는 것에 나는 여전히 미심쩍긴 했지만 의심하던 것을 거뒀다. 애당초 의심해봐야 초월자에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여전히 루루미가 나에게 호의적인 것이 이상했지만, 초월자의 앞에서 필멸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내게 있다는 메흐―바다의 주인―의 힘을 노리는 것일까? 그렇다면 정말로, 말마따나 루루미는 날 힘으로 제압할 수 있다. 굳이 ‘힘’을 쓰지 않아도 초월자를 거스를 수 있는 존재는 같은 초월자가 아닌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왜……. 이전에 만났을 때가 아니라 지금 저주를 풀어주는 거예요?”
내 물음에 루루미는 히죽 웃었다. 마녀 같은 웃음이었다. 루루미는 의미심장하게 웃는 얼굴 그대로 나를 지켜보다가 말했다.
“변덕일까, 아니면 네 선택이 궁금했을까.”
“……선택이요? 그러고 보니 사란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당신에게 가기를 선택하면 당신이 절 찾아올 거라고요.”
“그래.”
루루미는 돌연 억겁의 시간을 지난 것 같은 표정을 했다. 희미하게 지친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자세히 보기도 전에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바다의 마녀는 턱을 괴고 나를 보았다.
“모든 이들은 살아가며 선택을 하지. 그것은 초월자도 그리 다르지 않아. 그거 아니? 모든 선택은 항상 중요하단다. 그래서 삶을 살 땐 신중해야 해. 너의 선택이 곧 너의 삶의 방향을 이끌거든.”
나는 루루미의 생뚱맞은 말에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그렇긴 했다. 나는 항상 바다로 가는 것을 선택해왔으니까.
요컨대……. 사란이 말했던 ‘선택’은 루루미를 만나고 싶다거나 간부진이 항로를 바다의 마녀를 생각하며 정한다든가 하는 것이 아닌, 나 자신이 바다를 선택한 것 같은 선택인 걸까? 하지만 그것들이 당최 뭐가 다르다고?
루루미는 콧소리를 내며 웃고는 말했다.
“선택은 오롯이 너의 의지로 결정하는 거야. 그리고 그것만큼 다른 사람에게 권리를 넘겨서는 안 되는 것도 또 없지. 너의 삶을 뒤흔들 선택의 순간을 매번 다른 사람에게 미룬다면 너의 삶이 과연 네 것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제 선택이 마음에 들었나요?”
그 전에 나도 확신하지 못하는 내 선택이 무엇인지 그녀가 어떻게 알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상대는 초월자였다. 이해 못 할 일들도 상대가 초월자라는 조건이 붙으면 그런가 보다, 하고 수긍되는 이점이 있었다.
말하자면 머리를 굴릴 수 없는 영역의 것을 대충 맞는 셈 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영문 모를 일도 그러려니 치부되니, 생각하는 데 정말 편하긴 하군.
루루미는 내 질문에 그저 웃기만 했다.
“너에게로 가는 길이 보였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