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24)
바다새와 늑대 (123)화(124/347)
#123화
나는 이번에도 영문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여하튼 내가 모를 일이야 초월자들끼리의 드높은 일이겠지. 일개 필멸자인 나는 알아서 짜지기로 했다. 그리고 아까 주머니에서 루루미가 주었던 진주를 꺼내 내밀었다. 마녀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거 왜? 더 달란 거니?”
“아뇨, 돌려준다고요. 이제 저주가 풀렸다면 필요 없을 것 같아서요.”
“…….”
루루미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오랫동안 보아왔던 돌멩이가 새삼스레 예뻐 보인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다시 비죽 웃고는 말했다.
“아니, 그건 갖고 있으렴. 언제든 쓸 일이 생기겠지.”
그러더니 재미있단 듯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힘을 가진 애들은 항상 이렇다니까. 나는 눈썹을 휘어 올렸다가 이내 진주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고인과 비교되는 건 그다지 달갑지 않았지만, 뭐, 챙길 건 챙기시라는데 챙겨야지. 내가 진주를 도로 주머니에 넣고 주둥이를 끈으로 묶는데, 루루미가 내게 말했다.
“그것도 네 선택의 산물인 거잖니? 난 그게 나의 지나친 간섭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에르노리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지만. 하나라, 하나만 남았다 그거지. 그래, 그것도 모두 너의 선택이지.”
영 붕 뜬 말들이었다. 나는 초월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에 슬슬 면역이 생기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하나 따져 묻는 대신 대충 딴지를 걸었다.
“그런데 제가 진주를 돌려주는 것을 선택했잖아요. 그걸 거절한 것도 루루미 당신의 선택이에요. 온전히 제 결정만으로 이루어진 일은 아니란 거죠.”
“하하! 맞아.”
루루미는 손뼉까지 치며 기분 좋게 웃었다. 무엇이 그렇게 기분 좋고 재미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솔직히 루루미가 언제 또 ‘변덕’을 부려서 내게 위협을 가할지 몰라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나와 루루미의 대화를 지켜보는 키이엘로와 도멤도 역시 비슷한 기분일 것이다. 루루미가 정말로 마음을 먹는다면 순식간에 검은바다 자체가 항해한 적이 없었던 듯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때 루루미가 물었다.
“에르노리가 뭐라든?”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눈을 굴리다가 예전에 에르노리와 했던 대화를 상기했다.
“두서없어서 좀 잊어버렸는데……. 둘이 절 갖고 내기를 했다면서요? 숲의 주인은 절 도와주기 싫댔어요.”
“죽여 버리겠다고 했지?”
“……네에.”
“그렇지만 못했지. 결국 도움을 주지 않았어?”
“그것도, 네.”
루루미는 내 대답에 흡족하게 웃었다. 내가 이겼네! 그 말에 나는 떨떠름하게 마녀를 보았다. 아니, 정말로 나를 갖고 내기를 한 모양이군……. 하지만 내가 초월자들을 혼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밤바람이 온화하게 불어왔다. 이제는 까맣게 변해버린 하늘 위로 반짝이는 별과 눈앞에서 넘실거리는 마녀의 머리칼, 천진난만하게 울리는 웃음소리가 비현실적이었다. 루루미는 히히 웃다가 말했다.
“에르노리 걔는 원래 너 같은 애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거든.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래도 이번엔 정말 그 애도 현실을 깨달은 모양이야.”
“무슨 현실이요?”
내 물음에 루루미는 웃음을 뚝 그쳤다. 그러고는 나를 보았다.
“아, 지리멸렬하게도 남아있구나, 메흐…….”
반달처럼 휘어진 눈과 달리 수면을 짚는 것처럼 낮게 기는 목소리였다. 루루미는 웃는 것인지 굳은 것인지 모를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바다의 주인이 절대 돌아올 수 없다는 현실을.”
“…….”
나는 무어라 말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바람이 한차례 머리칼을 쑤석이고 지나갔다. 바람과 상관없이 너울거리던 파란 머리칼이 물살에 휩쓸린 것처럼 바람결을 따라 느리게 펼쳐졌다.
바다의 주인이라든가, 초월자들의 사정이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왠지 일순 목이 턱 막혔다. 까마득한 안타까움과 이유 모를 슬픔이 희미하게 고개를 들었다.
바다의 주인이란 그저 바다를 다스렸다는 초월자일 뿐인데 왜 사람들에게 이런 감상을 불러오는 걸까? 심지어 수천 년 전에 죽어버려 그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이라곤 같은 초월자들밖에 남지 않은 미지의 존재였다.
나는 눈을 찌르는 소금기에 눈꺼풀을 반쯤 내리감았다가 고개를 들어 루루미와 시선을 마주쳤다. 루루미는 나직하게 말했다.
“그 애는 메흐를 많이 좋아했거든. 어버이처럼 따랐지. 그런데 생각해봐! 그가 죽어서 그의 힘이 갈가리 찢겨 세상 이곳저곳 누군가에게 파묻혀있는 거야…….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그 본질도 모르는 채로 수없이 죽어버리지. 죽고, 다시 태어나고, 또 죽고……. 그러다 보면 가려졌던 본질조차 마모되어 퇴색돼버려. 정말로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거야.”
“메흐의 힘을 말하는 건가요?”
“그래.”
나는 혼란스러웠다. 에르노리가 바다의 주인을 어버이처럼 따랐고, 그 때문에 나를 죽이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왜 결국 나를 죽이지 않았고, 바다의 주인을 죽인 장본인인 루루미와는 친근하다는 것처럼 구는가? 초월자들은 메흐의 힘을 모아서 그를 부활시키려던 게 아니었나? 사란이 잘못 생각한 것일까?
나는 주저하지 않고 물었다.
“바다의 주인을…… 부활시키려는 게 아니에요?”
“부활?”
루루미는 다시 한번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깔깔 웃었다. 부활! 부활이래! 루루미는 한참을 웃더니 고개를 설설 저었다. 마녀가 저러는 것을 보니 정말로 사란이 잘못 짐작한 것 같았다.
하기야 사란도 오래 살았지만 초월자보다는 못한 존재였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루루미를 보았다. 루루미는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며 진정하더니 손을 내저었다.
“초월자는 죽는 순간 그 거대한 힘이 조각나서 세상 모든 곳으로 흩어진다. 그 힘은 곧 생명으로 잉태되어, 또 다른 삶이 되지만 그것이 그의 환생을 의미하지는 않아. 죽은 초월자는 그저 다음 세대를 위한 양분이 되어 사라지는 거지.”
“…….”
“알겠니? 너는 흩어졌던 메흐의 힘이 잉태시킨 생명이란 뜻이야.”
미신 같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의아하기도 했다. 초월자가 죽어 생명을 만든다면 초월자가 있기 이전의 생명은 무엇이란 말인가? 내 의문을 눈치챘는지 루루미는 눈을 휘며 웃고는 난간에서 내려섰다.
나는 그제야 주변 바다가 은은한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잔잔하게 빛나는 파란 물결은 마치 수면 밖에서 내리는 빛을 물속에서 보는 것 같았다. 갑판 위의 선원들이 웅성거리며 난간 너머를 바라보았다.
루루미는 난간에서 내려온 대신 다시 공중에 서서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포말이 일더니 하얀 쓰개치마가 나타났다. 머리 위로 그것을 뒤집어쓴 마녀는 까만 밤하늘 아래서 파랗게 빛나는 바다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래, 그에 관해 알려진 건 거의 없지. 이 세상에 관한 것도. 너희는 무엇 하나 뚜렷하게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저마다 자질구레하게 살아가니까.”
내가 잘못했네.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데리고 무슨 짓이람! 루루미는 한탄하듯 재잘거리고는 날 보며 웃었다.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줄게.”
그러더니 루루미는 공중을 걸어 바다 위에 섰다. ‘태초에.’ 루루미가 읊조렸다. 푸른빛의 바닷물이 물결치며 떠올라 어떤 거대한 형상을 만들었다. 울렁거리는 얼음처럼 물은 뚜렷한 형태를 빚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과 같은 팔다리가 있으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 거대한 팔의 곳곳에는 날개와 눈이, 손끝에는 갈고리 같은 손톱이 붙어있었다. 머리칼은 깃털인지 털인지, 혹은 그 모든 것인지 모를 정도로 한 뭉치로 뒤섞여 있었다.
거대한 형체가 움직이며 일그러진 얼굴에서 입의 형태가 드러났다. 삐죽한 이빨과 사람처럼 편평한 이빨이 두서없이 나 있었다. 물로 만들어진 거대한 것이 그 입으로 씨익 웃었다.
루루미의 목소리가 울렸다.
“태초에, 신이 있었다.”
‘신’? 종교에서 으레 말하는 신이 진짜 있었단 말인가? 어째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늘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태평한 머리와는 달리 신의 모습을 보자 물로 만들어진 가짜 형상임에도 오싹함이 등골을 타고 내달렸다. 도멤이 뒤에서 작게 숨을 들이켰다. 선원들 역시 당황해서 거대한 형상을 보았다. 루루미는 인상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녀는 신의 형상을 증오스럽게 쳐다보았다.
“이 신이란 작자는 정말로 어디서 온 건지 모를 작자였다. 그러나 강대한 이였고, 우리 모두를 창조해낸 이였지. 나조차 인간일 적에 이 작자에게 창조되었다.”
증오감 넘치는 말에 따라 ‘신’이 물을 빚어 사람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스럽게 느껴져야 할 창조는 어째 오한이 들고 섬뜩한 분위기였다. 신은 내내 즐겁다는 듯 웃음 짓고 있었지만, 자애로움과는 궤를 달리하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오히려 장난감을 만드는 것 같은 악동의 영악함을 닮아있었다.
루루미가 말했다.
“그는 자신을 본떠 많은 것을 만들었다. 사람, 동물, 곤충, 온갖 것들……. 그리고 그것들이 완성되자 말했다. ‘나를 따르거라, 나를 믿거라. 나를 성심성의껏 모시는 자는 곧 선한 자요, 내 너의 삶을 보살필 것이고, 아닌 자는 악한 자요, 내 벌을 내리리라.’ 얼마나 달콤한 말이더냐? 얼마나 자애로운 말이더냐? 아, 우리를 만든 창조자는 모셔주기만 한다면 우리를 굽어살피시니!”
짠물로 만들어진 작은 사람들이 소리 없이 환호하며 신의 형상을 향해 손을 뻗고 기도했다. 루루미는 하하 웃었다.
“어쩌면 저것은 자신이 빚은 것들 중 가장 재미있는 게 어떤 것인지 알았던 거겠지. 금수와 풀잎이 신을 숭배하진 않는 법이다.”
혹은 그저 자기가 빚은 것들에게 사랑받고 싶은 어리광이었을 수도 있겠지. 루루미는 메마른 목소리로 고했다. 신은 흡족한 기색으로 작은 사람들의 칭송을 들었다. 장난감으로 이루어진 왕국 같았다.
“그러나 그는 못돼먹은 작자였다. 끔찍한 이였지.”
신의 형상이 돌연 팔을 내리쳐 작은 사람들을 없앴다. 철썩, 몰아치는 파도가 크게 일어 일견 단란해 보이던 광경을 깨뜨렸다. 반대쪽에 있던 작은 사람들이 모두 굳어서 신의 팔이 내리친 곳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우리도 숨을 멈추고 물로 만든 신의 형상을 바라보았다. 신은 연신 입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주 천진난만하고, 섬찟한 미소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