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25)
바다새와 늑대 (124)화(125/347)
#124화
“그가 내리친 이들은 다른 이들과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이었다. 비슷하게 먹고 입고 말하고, 어제의 친우였고 가족이었고 한 데서 난 형제자매였다. 그러나 신이 그들을 내리치자 수많은 것이 변했다.”
‘신’의 형상이 내리친 곳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이 바다 위를 기며 빠져나왔다. 그리고 굳어있는 다른 작은 사람들을 마주 보았다. 도와주시게! 빠져나온 사람이 그렇게 말하듯 다른 이들에게 손을 뻗었다. 그때 ‘신’이 말했다.
“저자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자들이다.”
뜬금없고 이유 모를 선포였다. 푸르게 빛나는 물결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살아남은 작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외쳤다.
‘도와주시오, 도와주시오! 내 다리가 움직이지 않소, 내 눈이 보이지 않소, 내 팔이 움직이지 않소, 내 귀가 들리지 않소. 도와주시오, 도와주시오…….’
루루미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저들을 보라. 너희보다 가진 것이 부족하며, 너희보다 팔다리가 괴이하며, 너희보다 어두운 가죽을 가진 자들이노라. 저들과 너희는 다르다. 너희를 보라. 너희는 부유하며, 너희는 생긴 것도 적당하며, 너희는 나처럼 밝은 껍데기를 가지지 않았더냐.”
신의 말에 굳어있던 작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은 바닥을 기며 도움을 구하고 있었지만 더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신의 말에 따르길, 원래 그래야 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파란빛이 스산하게 명멸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주춤 물러났다. 키이엘로가 뒤에서 내 등을 짚었다.
그러나 그도 설명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루루미는 신의 형상 앞에 서서 그것을 직시했다. 물로 만들어진 형상은 가짜일 뿐인데도 똑바로 바라보기 힘든 무언가가 있었다. 그럼에도 루루미는 자색 눈을 치뜨고 그것을 노려보았다.
“이 신이라는 작자가 그리 말하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느냐? 찬송가를 함께 부를 수 없는 이들이 생겨났으며, 똑같은 곳에서 같은 것을 먹고 입고 자란 이들도 고작 몇 가지 조건으로 구제받을 수 없는 종자가 되었다. 신은 우리에게 등을 돌렸다.”
루루미의 스산한 웃음소리가 물결치는 파란빛에 낮게 깔려 기었다. 작은 사람들은 여전히 신을 찬양했지만, 신에게 버림받은 이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신은 자신을 찬양하는 작은 사람들에게 그들을 공격하게 하거나, 지배하게 하거나, 배제하게 했다. 그리고 그것을 작은 사람들은 충실하게 따랐다.
그렇게 하지 않고 신에게 그들의 선처를 바라거나 반박하는 경우엔 그들까지도 배제되었다. 신의 안온함 아래 존재하기 위해서는 신의 말을 따라야 했다. 바다의 파란빛이 점점 사그라졌다.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신의 형상의 아래로 작은 사람들이 모두 바다로 돌아갔다.
신이 홀로 빛나며 밤바다에 솟아나 있는 것은 얼핏 경이롭고 아름답게 보였다. 그것이 작은 인간들을 농락하며 놀 때와는 딴판인 모습이었다. 루루미는 그를 올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왜 그랬던 걸까? 그것이 즐거웠나? 자신의 창조물들이 서로 싸우고, 편을 가르고, 요모조모를 따져 가치를 재는 것이?”
그렇게 말한 마녀는 나부끼는 머리칼 사이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초월자들은 대부분 신의 다음 세대에 초월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신이 존재하던 때에 창조물의 한계를 초월한 자가 있지. 하나는 나고, 남은 하나는.”
“바다의 주인이군요?”
“그래.”
루루미가 다시 한번 손을 휘둘렀다. 흐릿하게 빛나는 신의 형상보다 작았지만, 누구보다도 푸르게 빛나는 사람이 생겨났다. 그는 성별이 모호한 형상으로, 짧기도 길기도 한 파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신의 앞에 섰다. 커다란 거인 앞에 선 개미 같았다.
발카가 내 어깨에 날아와 앉더니 그것을 보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메흐야. 본능적인 그리움이 뒤섞인 어투였다. 물로 만들어진 그의 형상은 그저 푸르게 빛나는 인형이었다. 그는 신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지만 그럼에도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움과 기백을 갖고 있었다. 수려한 모습에서 마치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것 같은 분노가 감돌고 있었다.
루루미가 말했다.
“신에게 분노한 자. 사실 이전에도 신에게 반기를 드는 자는 많았다. 신이 등 돌린 이들이 역시 신에게 등 돌리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중 하나가 메흐였어. 그는 구릿빛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성별이 존재치 않았으며, 왼손의 넷째 손가락이 없었다.”
바다의 주인이 남자라고들 알려진 모양이지만, 뭐. 그들이 메흐의 바지춤을 끌러볼 일이 있었겠니? 루루미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웃을 기분이 나지 않았다.
웃는 루루미의 뒤로 신의 형상이 포효하고, 그 앞의 메흐는 꿋꿋하게 분노한 얼굴로 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바다가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을 가르고 새벽이 내려온 것처럼 푸르고 시렸으며, 마음이 침잠하며 가라앉는 빛깔이었다. 별이 뜬 밤하늘 아래 우리는 별안간 새벽 공기를 들이마신 기분이 되어 메흐의 형상을 바라보았다. 메흐는 검을 빼 들었고, 신에게 말했다.
“너의 폭정에 우리는 분노한다. 하나였던 우리를 가르고 서로를 해치게 하는 근원인 너에게 분노한다. 그 드높은 곳에서 우리를 굽어보며 자애로운 척 자위하는 너의 행태에 분노한다. 신이여, 이 세상에 악마가 있다면 그것은 너이리라. 그 저열한 낙원에서 내려올 때다!”
그가 신을 향해 달려드는 찰나, 한순간 태양을 마주한 것처럼 눈이 부셨다. 새파란 빛깔이 점멸하며 터져 나왔다. 반사적으로 눈을 가린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그런 빛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광경을 바라보던 루루미가 말했다.
“신은 패배했다. 메흐는 승리했지.”
푸른빛이 천천히 어두워졌다. 다시 눈을 뜨자 물결 위엔 바다의 주인이 홀로 빛을 내며 서 있었다. 그는 모든 것에 지친 것 같았다. 혹은 가진 분노에 비해 너무 쉽게 꺾인 신에 더 분개하는 것 같기도 했다.
메흐는 들고 있던 검을 바다에 내던지고 뒤를 돌아보았다. 바닷물로 만들어진 형상일 뿐이었으나 순간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루루미는 다시 손을 휘저어 메흐의 형상을 없앴다.
“신은 멍청한 작자였어. 그는 전지전능을 권능으로 힘을 영위하고 있었는데, 메흐가 자신의 생각보다 더 강력하자 불현듯 이러한 생각을 했지. ‘어떻게? 어떻게 저 인간이 이렇게 강하지?’ 바보 같은 짓이었다. 신이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순간, ‘전지전능’의 조건이 깨짐으로써 그는 힘을 잃었다. 그래서 메흐가 그를 초월할 수 있게 되어 신은 패배한 거야.”
메흐는 그때 신을 죽여서 최초의 초월자가 되었다. 그 말에 도멤이 어, 하며 소리를 냈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루루미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도멤을 바라보았다. 그에 도멤이 주춤 물러났으나 마녀는 가차 없이 물었다.
“뭐 짚이는 게 있나 봐, 그렇지?”
“……분명, 신이 존재할 적의 초월자 중엔 마녀님도 계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도멤이 꽉 막힌 목소리로 가까스로 말했다. 듣고 보니 그랬다. 신이 있을 때 초월했던 자가 둘, 그중 하나는 루루미, 그리고 하나는 메흐라고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야기 중에는 루루미의 초월에 관한 이야기가 없었다. 그에 루루미는 싱긋 웃으며 칭찬했다.
“맞아. 날카롭네. 하지만 메흐가 최초의 초월자인 것은 틀리지 않았어. 초월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뛰어넘는 계기가 필요하거든. 그럼 문제를 하나 낼까. 내가 초월하게 된 계기가 무엇일까?”
난데없는 수수께끼였다. 내가 중얼거렸다.
“틀리면 죽인다든가…….”
“어머머, 얘 좀 봐, 뭐 그런 무서운 소릴 해? 안 죽여, 안 죽여!”
루루미가 손을 나부끼며 칠색 팔색했다. 그러나 함부로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하기야 누가 감히 바다의 마녀 앞에서 입을 놀리겠는가? 그때 키이엘로가 내게 고개를 기울였다.
“초월하려면 꼭 무언가 경험해야 하는 걸까?”
“그러게.”
“흠…….”
키이엘로는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루루미의 눈치를 보다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가 나를 보자 내가 속닥속닥 물었다. 뭐 짐작 가는 거 있어? 키이엘로는 글쎄, 하며 말을 줄였다. 하지만 얼굴을 보면 추측하는 바가 명확한 것이 분명했다. 루루미가 웃었다.
“왜? 말해 봐.”
“…….”
키이엘로는 망설이다가 내가 그냥 얼른 말하라는 듯 옆구리를 계속 쿡쿡 찌르자 결국 입을 열었다.
“바다의 주인과 신의 싸움을 본 건가요? 그러니까…… 바다의 주인이 신을 죽이는 순간을요.”
“호오.”
마녀는 재미있다는 듯 낄낄 웃었다. 똑똑하네! 루루미는 훌쩍 날 듯 걸어 허공에 떠올랐다. 까만 밤하늘을 뒤로한 파란 머리카락이 쓰개치마 아래에서 은하수처럼 공중을 하느작거렸다. 키이엘로와 나는 어색한 얼굴로 눈을 마주쳤다.
도멤이 에르노리 때처럼 루루미가 우릴 갑자기 데려갈까 싶었는지 뒤에서 우리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그러나 루루미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 메흐가 초월한 분노로 신을 죽여 초월자가 되었다면, 나는 초월한 시야로 세상 누구도 보지 못했던 신의 최후를 목격해 초월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죽은 신은, 일개 초월자처럼 역시 갈기갈기 찢겼지. 그러나 신이 없는 세계는 더는 생명을 창조하지 못하게 된다는 문제점이 있었어.”
루루미는 후후 웃으며 바다 위로 다시 손을 휘둘렀다. 청보라 빛깔의 물결이 일더니 거대한 뱀 두 마리를 만들어냈다. 그들의 아래 조각나고 있는 신의 형상이 있었고, 뱀들은 그 안에서 솟아나듯 튀어 올랐다. 이어 그들의 앞에 메흐가 섰다. 그저 초월자였던 그가 입을 벙긋거렸다.
“메흐는 말했지. ‘나는 이 세상이 끝나길 원치 않는다. 너희는 신이 삼킨 진리더냐, 아니면 신이 만든 진리더냐, 그의 죽음에서 태어난 새로운 진리더냐?’ 그러자 뱀은 이렇게 답했다. ‘그 무엇도 아니다. 우리는 그저 존재한다.’”
루루미의 말이 끝나자 물로 빚어진 메흐는 고개를 수그렸다.
“나는 지금 강한 힘을 얻었다.”
“그것은 신의 힘이 섞인 것이리라.”
“나는 그것을 갖고 싶지 않다. 너희에게 주마. 그러나 조건이 있다. 지금 우리의 세상엔 순환이 없다.”
그래, 순환이 없도다. 루루미가 작게 중얼거렸다. 푸르게 빛나는 메흐가 외쳤다.
“우리의 세상이 일직선에 놓였기에 우리가 서로를 극과 극으로 나누지 않더냐. 서로를 흑과 백으로 나누지 않더냐? 그 사슬을 깨야겠다. 우리의 세상에 순환을 다오. 누군가의 죽음이 누군가의 탄생이 되며, 누군가의 악인은 누군가의 선인이고, 누군가의 차이는 곧 누군가의 동질이니 우리의 삶에 결코 평행선이 없게 하여라.”
“받아들이겠다.”
뱀 두 마리는 입을 맞춰 대답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너에게 육지를 다스릴 힘을 주마. 메흐가 말했다. 필요 없다. 나에게는 그저 광활한 바다를 다오. 그 대답을 들은 뱀들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제자리에서 돌기 시작했다.
청보라색이던 뱀은 하얀색과 검은색으로 나뉘고, 눈은 파란색과 붉은색으로 나뉘었다. 그들이 몸을 틀며 원을 그리고, 이윽고 다시 한번 사방을 밝게 물들이며 빛났다.
포말이 휘날리며 얼굴에 차갑게 스몄다. 루루미가 말했다.
“그것이 우리의 세상이 만들어진 태초부터 초월자의 시대가 열리기까지의 일이다. 메흐가 신의 몸에서 건져낸 뱀들은 ‘세계의 뱀’이 되어 세상의 법칙을 수호하는 이들이 되었지.”
“……메흐가 새로운 생명을 만든 게 아니에요?”
“그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어. 이전에는 신이 만든 생명이 죽게 되면 그것은 그저 허무로 돌아갔다. 그러나 세계의 뱀이 순환의 법칙을 만든 이후로는 태초에 흩어졌던 힘들이 균형을 갖고 생과 사를 반복함으로 누군가 굳이 창조하지 않아도 순환으로 온전한 세상이 되었다. 메흐가 죽인 신의 조각들도 누군가로 다시 태어났겠지.”
루루미는 나직하게 지껄였다. 정말이지 유토피아였어.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루루미는 메흐를 왜 죽였을까? 그렇게 순환하는 세계라면 왜 오로라에 길을 잃은 이들이 넘쳐나는 걸까? 바다의 주인이 죽은 지금도 세계의 뱀은 존재할 것 아닌가?
어쩌면 보다 거대한 비밀이 있을지도 모른다. 바다가 삼킨 더 큰 비밀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