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27)
바다새와 늑대 (126)화(127/347)
#126화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선원들이 웅성거리며 서로 시끄럽게 떠들고, 계속해서 지켜보던 클루스도와 디겔이 무어라 대화하는 것이 보였다.
그들도 마치 신화 속에 얼굴을 들이밀었다가 빠져나온 기분인 것 같았다. 도멤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한숨 돌렸네, 정말 긴장됐다니까.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나 키이엘로를 돌아보았다. 키이엘로는 여전히 반쯤 혼란스러운 낯이었다.
나는 노래의 가사를 떠올렸다.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키이엘로, 아까 그 노래 어떻게 알고 있던 거야?”
내 물음에 키이엘로가 화들짝 놀라 나와 도멤을 쳐다보았다. 나와 도멤은 키이엘로를 마주 바라보며 대답을 구했다. 그는 잠시 뭉그적거리다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침울한 얼굴을 한 키이엘로의 허리춤을 텐이 주둥이로 밀었다.
『그냥 말해.』
“……어머니가 불러주시던 노래야.”
“오…….”
도멤이 입술을 오므리며 눈을 피했다. 그래, 그랬구나……, 아니, 그런데 네 어머니는 이 노랠 어떻게……, 아니, 역시 아무것도 아냐. 도멤이 횡설수설하는 것을 뒤로하고 나는 볼을 긁적이며 키이엘로를 보았다. 단순히 그것만 문제인 것 같진 않은데. 사실 어머니가 초월자의 노래를 알고 있다면 깜짝 놀랄 일이긴 하지만 키이엘로처럼 혼란스러워하진 않을 것이다. 무언가 더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에효, 하고 한숨을 푹 내쉬고 키이엘로의 옆으로 오크통을 끌고 가 앉았다. 멀뚱멀뚱 서 있는 키이엘로의 팔을 잡아당겨 마찬가지로 옆에 앉힌 뒤 나는 그를 보며 눈썹을 비죽 올렸다.
“그거 말고도 뭔가 있는 거지?”
“…….”
키이엘로는 내 말에 어설프게 무마하려는 웃음을 짓다가 얼마 되지 않아 포기하고 눈살을 서글프게 일그러뜨렸다.
“좀 바보 같을 텐데.”
“뭔데?”
“바다의 주인을 부르는 노래라잖아. 어머니가 그 노래를 내게 해준 이유가 혹시나……. 아니, 아냐. 말하려니까 진짜 바보 같은 생각이네. 별일 아니야. 어쨌든 노래도 알아냈고, 우홉피아주의 정보도 알아냈으니 다행이야. 골치 아프던 일도 하나씩 풀리는 것 같고.”
키이엘로가 그렇게 말을 얼버무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와 도멤이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우투그루가 와서 키이엘로를 부르는 바람에 실패했다. 중간에 나와서 바다의 마녀를 봤던 우투그루는 키이엘로에게 간부진 쪽을 고갯짓했다. 가타부타 말을 얹는 것보다 효과적이었다.
평소엔 미적미적 댔을 키이엘로는 이때다 싶었는지 곧장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그가 후다닥 선장실을 향해 우투그루를 지나치자, 그 즉각적인 반응에 오히려 우투그루가 당황해 멈춰 서서 우리 쪽을 보았다. 나와 도멤이 눈을 끔뻑이며 그를 마주 보자 우투그루는 눈썹을 휘어 올리며 물었다.
“너희, 저 새끼 삥 뜯었냐?”
“뭐래. 키이엘로한테 뜯을 건 얼굴밖에 없어.”
“…….”
내 말에 우투그루는 형용하기 어려운 얼굴을 하더니 넌더리를 내며 고개를 내젓고 걸음을 옮겼다. 내 대꾸가 웃겼는지 끅끅 웃던 도멤이 이내 웃음을 추스르고 말했다.
“키이엘로는 아직도 자기 이야기하는 게 서투른가 봐.”
“왜 그러는 걸까? 사람 간에 오가는 호감을 잘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아.”
“그러게. 뭐, 사정이야 있겠지.”
도멤은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키이엘로의 표정이 영 별로였던 이유를 대강 짐작한 것 같았다. 나는 턱을 괴고 도멤을 보다가 발로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아! 로트! 도멤이 꽥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가뿐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괜히 심술이라며 툴툴거리는 도멤을 뒤로하고 발카가 다시 내 어깨에 앉았다.
나는 도멤을 돌아보며 물었다.
“넌 키이엘로가 무슨 말 하려고 했는지 짐작 가는 게 있지?”
“음…….”
투덜거리던 도멤이 입을 딱 다물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더니 수그렸던 허리를 펴고 한숨을 쉬었다.
“알만하지. 아마 로트 네게 바다의 주인 힘이 있는 것처럼 키이엘로의 어머니도 키이엘로에게 그게 있다고 생각해서 불러준 게 아닐까, 뭐 그런 말이었던 게 아닐까.”
“그냥 자장가였을 수도 있잖아?”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도멤은 다시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키이엘로도 그렇게 생각하란 법은 없잖아. 맞는 말이었다. 나는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나는 그다지 큰 고민이 아닌 것 같다고 여겨져도 키이엘로 본인의 생각은 그것과 상이할 수 있는 법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그런 고민을 비웃는 것도 아니고.
나는 불퉁하게 입을 내밀었다가 이내 걸음을 옮겼다. 선실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선내로 들어와 자리로 걸음을 옮기던 나와 도멤은 루루미가 등장하자 쏙 들어가 숨은 네토르와 마주쳤다. 그는 어쩐지 짜증스러운 얼굴이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표정 더러운 거 봐라. 그렇게 궁금해하던 초월자가 직접 왔었는데 냅다 튀어?”
“시끄러워. 내 목숨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고.”
하긴 그래, 초월자들이 바다의 전설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을 싫어한다는 소문도 있어. 도멤이 내게 속닥였다. 그렇게 잦은 경우는 아니지만, 간혹 초월자에 관해 이것저것 연구하던 연구자가 초월자의 짜증에 죽어 나가는 일도 있다며 도멤은 다시금 어깨를 떨었다.
“살아남아서 다행이야…….”
“어쨌든 아깝게 됐네. 태초의 뭐시기 신 어쩌고, 하는 이야기도 해줬는데.”
“됐어, 포문을 열어서 봤으니까.”
얌체 자식. 나는 네토르를 밉지 않게 흘기고는 걸음을 마저 옮겼다. 도멤이 내 옆을 따라오며 물었다. 네 저주는 정말 풀린 거야? 그 말에 나는 어깨를 들썩였다. 난들 아나. 뭐 하는 것 같지도 않은 상태로 훌쩍 풀어줬대. 도멤은 불안한 것처럼 나를 살피며 끙 소리를 냈다.
“진짜 이젠 안 아픈 거 맞지?”
“아마도. 못 믿으면 어쩌겠어. 루루미는 이미 가버렸고 확인하는 방법도 없는데.”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이제 정말 우홉피아주와 부딪칠 준비를 해야겠네. 그나저나 너, 말하는 걸 들어보니 이전에도 바다의 마녀를 만난 것 같던…….”
도멤이 그렇게 말하며 앞을 보았다가 주춤 걸음을 멈췄다. 그에 나도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선 이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파도에 느리게 흔들리는 배의 소음이 잠시간 침묵을 채웠다. 테드였다. 그는 우리의 말에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홉피아주라고?”
“…….”
나와 도멤은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이거 귀찮게 됐네. 내 생각도 그래. 우리는 잠시 서로의 눈을 마주 보고 있다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간다.”
“로트렐리!”
테드를 밀어내고 앞으로 나아가려던 도멤과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테드를 보았다. 그러자 그는 겁에 질린 건지 분노한 건지 모를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우홉피아주라고? 나는 어떡하란 거야?”
“내 알 바야? 왜 그걸 나한테 물어?”
“로트렐리, 난 일반인이야. 민간인이라고! 나라고 너한테 이러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나더러 해적들 싸움에 껴서 죽으란 소리야?”
“이 배는 봉사단체가 아냐. 정 끔찍하면 바다에 뛰어들어서 헤엄이라도 치든, 오크통에 들어가서 탈출하든 했어야지. 내가 네 사정을 봐준다 해서 뭐가 달라져? 너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나를 이용하려 들더니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에서 내게 책임을 전가하더라.”
내 말에 테드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을 하고 파르르 떨었다. 나도 그의 입장이 이해가 아주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막말로 민간인이 해적과 싸우러 가는 해적선에 오른 것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나는 그에게 좋은 감정이라곤 없고, 그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테드는 내가 매정하다고 나를 원망하는 것 같았지만 정말로, 내가 그를 어여삐 여길 여지가 어디 있단 말인가?
“넌 최소한의 도덕도 없냐? 너는 동정심도 없어? 네가 사람이냐?”
“아니면 어쩔래, 새끼야.”
나는 욕을 짓씹고 테드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나 테드는 역으로 내 팔을 붙들고 이를 갈았다.
“너 진짜 미쳤어? 이래서 시집은 가겠냐? 남자들 틈에서 뒹굴면 네가 남자가 될 것 같아?”
“야, 말조심해.”
도멤이 날 잡은 테드의 손을 쳐내며 거칠게 을렀다. 테드는 도멤의 개입에 주춤하면서도 나를 노려보았다. 화를 내는 건지 간절하게 비는 건지 알 수 없는 시선이었다. 나는 헛웃음만 나왔다.
“시집 못 가면 나야 감사하지……. 아니,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너 우리 염탐 하냐?”
나는 도멤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고개를 까딱이며 테드에게 비아냥거렸다.
“내가 남자 틈에서 뒹굴면 어때서. 너랑도 뒹굴어줄 줄 알고? 착각도 가지가지 한다.”
도멤은 황당하단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다른 손으로 도멤의 고개를 밀어 앞으로 돌려주었으나 도멤이 다시 날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자 그냥 포기했다. 어쨌거나 나는 테드를 보며 공갈을 쳤다.
“하나만 해, 이 새끼야. 우홉피아주가 무서워서 탈출하고 싶으면 알아서 기어나가든, 내 도움을 받고 싶으면 이제라도 납작 기든. 누가 알겠냐, 갸륵하게 여겨서 옆구리에 끼워줄지. 둘 다 아니면 걍 눈앞에서 꺼지시고.”
하여튼 사람 빡치게 하고 앉았어……. 혀를 차며 꿍얼거린 나는 도멤의 어깨에 둘렀던 팔을 내리며 이때다 싶어 얼른 걸음을 옮겼다. 얼이 빠진 테드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나를 응시하다가 뒤늦게 머리를 헤집으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테드와 멀어지자 곧장 도멤이 질색했다.
“미쳤어, 로트? 뭐 그런 말을 해?”
“뭐 어때, 솔직히 이 배에서 내가 그렇게 얘기한다고 진짜 믿는 놈이 있기는 해?”
“그건 그렇지. 아니, 그래도 그렇지, 저기요, 전 순결한 사람이거든요? 참나, 진짜 어이가 없어서.”
도멤이 내게서 한 발짝 멀어지며 제 가슴 앞에 팔로 엑스 자를 그렸다. 나는 피차 질색인 얼굴로 으, 하며 고개를 설설 저었다. 한차례 서로 줄기차게 질색한 뒤에야 우리는 테드를 호박씨 까듯 까기 시작했다. 저놈은 진짜 어쩌면 좋냐, 뭘 어째, 뒤지라고 해, 로트 넌 뭐가 문제야, 내 인성이 원래 그래, 아이고 이런 애와 친구 한 내가 잘못이지…….
한참을 즐겁게 테드의 뒷담을 하고 있자 키이엘로가 터덜터덜 들어왔다. 그는 잠시 우리의 눈치를 살폈는데, 이미 그가 얼버무린 것을 굳이 들추지 말자고 합의한 도멤과 나는 별다른 거리낌 없이 그를 반겨줬다. 우정의 펀치로.
“로트 네 덕분에 우홉피아주의 정보가 해결됐어.”
“뭐랄까, 환상적인 일들이 많았는데 결국 결론은 현실과 맞닿아 있구나.”
“우리한테 중요한 건 창조 신화가 아니라 우홉피아주의 정보니까…….”
키이엘로가 얻어맞은 옆구리를 문지르며 전해준 이야기에 우리는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시선을 마주쳤다. 정말로 우홉피아주와 전면전을 벌이게 될 것이었다. 초월자가 전해준 이야기이니 그 가치는 믿어도 좋았다.
나는 다시금 루루미를 떠올리고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자신이 마녀가 아니라 주인이라고 한 이야기는 무슨 뜻이며, 왜 유독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걸까?
내게 있다는 메흐의 힘으로 그를 되살릴 수 없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으면 그저 그렇게만 얘기해도 됐을 것이다. 굳이 태초 신화를 이야기하고 온갖 정보를 넘겨준 이유가 뭐지? 루루미가 금언이 있다며 이야기를 못 해주는 부분이 있는 만큼,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준 정보 같다는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뭔가 일어나려나…….
무엇이든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 것을 알아챘는지 키이엘로가 말했다.
“바다의 마녀가 한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마. 지금 집중해야 하는 건 우홉피아주와 네 동생이잖아.”
“……맞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랄티아를 떠올렸다. 뒤숭숭하던 마음이 하나로 뭉쳐 가라앉았다. 책을 끌어안은 둥근 손, 까맣게 나부끼는 긴 머리와 그 사이에서 명료하게 빛나는 회색 눈과 웃는 입이 떠올랐다. ……그 애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랄티아, 조금만 더 기다려줘. 곧 너를 구하러 가.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확고한 목표가 코앞에 놓여있었다. 정말 이제 곧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