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29)
바다새와 늑대 (128)화(129/347)
#128화
그 갑판으로 끌려 나간 사람 중엔 랄티아도 있었다. 다만 랄티아는 서로 꽁꽁 묶여 갑판 한가운데에서 무릎을 꿇은 다른 포로들과 달리 선장의 옆에 앉혀졌다. 노상 갑판 위로 해적들이 선미루 앞에 놓인 의자를 시작으로 둥글게 둘러싸고 모였다.
그리고 누가 봐도 상석인 그 의자에는 푸르죽죽한 진녹색 머리카락이 구불구불 내려온 선장이 앉아 있었다. 우홉피아주의 선장이었다. 랄티아가 그의 옆에 털푸덕 주저앉자 그가 낄낄 웃었다.
“반갑다, 꼬마 아가씨.”
나는 선장 페데르라고 한다. 그가 씨익 웃자 까만 눈이 벌레의 껍질처럼 번들거렸다. 그는 소금 바람에 쏘여 피부가 거친 것만 빼면 중년 특유의 청수하고 음전한 이목구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음험한 기세가 그의 인상을 매력적이기보단 섬뜩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 주변으로 번진 피 냄새와 비딱하게 기울어진 자세 탓에 그런지도 몰랐다. 그런 것들은 그의 준수한 외모와 지독한 위화감을 주다 못해 기이한 인상을 불러일으켰다.
랄티아는 무어라 말해야 하는지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별다른 대꾸를 기대한 것은 아닌 듯 금세 고개를 돌린 페데르는 우홉피아주의 선원에게 손짓했다. 갑판 위에 저열한 환호성이 울렸다.
오, 도망가, 작은 보트! 잡히면 죽게 될 거야!
오, 도망가, 이 겁쟁이! 잡히면 혓바닥을 뽑으리!
파도 뒤지던 손, 늑대 모가지를 잡았네
그 목을 지키고 싶다면,
오, 도망가, 작은 보트! 잡히면 가만 안 둔다!
잘 숨어라! 잡히면 내장을 갑판 위에 늘어놓으리!
우리는 어디든 간다네, 바다 어디든!
네가 숨은 곳도 헤집어 버릴 테다!
그들은 막무가내로 노래를 부르며 낄낄깔깔 떠들었다. 공포에 질린 포로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해적 중 하나가 날이 무딘 칼을 들고 앞으로 나서며 왁 소리를 질렀다. 그에 붙들린 포로들은 기가 질려서 움츠러들었다. 다른 해적들이 그에게 환호를 보내며 박수를 쳐댔다. 칼날이 횃불로만 밝혀진 어두운 밤공기를 갈랐다.
검붉은 전열함 위로 핏자국이 몇 번이고 겹쳐지는 동안, 랄티아는 먹은 것도 없는 속을 게워내며 갑판의 광경에서 눈을 돌렸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페데르는 낄낄 웃으며 랄티아의 턱을 붙들고 그것을 바라보게 했다. 눈을 질끈 감을 적이면 그들이 제 눈을 파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랄티아는 억지로 턱이 붙들린 채 갑판을 바라보아야 했다.
“잘 봐둬, 아가씨. 너도 저 꼴이 날 수 있었지만, 네 언니가 곧 바다새를 데려올 것이니 봐주는 거다.”
페데르가 럼을 물처럼 들이켜며 킬킬 웃고는 말했다. 똑똑히 기억하라고. 그러더니 페데르는 랄티아의 앞에 신문 하나를 내던졌다. 불쾌한 웃음을 내내 입꼬리에 매단 채로 그는 피바다가 된 갑판을 마치 신선한 안주라도 되는 듯 즐겁게 구경했다. 배부른 하이에나처럼 여유로운 기색으로 럼을 마시는 그의 발치까지도 핏방울이 튀었다. 랄티아는 다시금 헛구역질이 치솟는 것을 느끼며 그가 던진 신문을 보았다.
신문 안에는 로트렐리에 대해 적혀있었다. 언니가 섬에서 내쫓겼다. 자신을 구하러 오고 있나? 이 끔찍한 해적들을 향해서? 아니면……. 랄티아는 순간 지독한 양가감정을 느꼈다. 로트렐리는 아마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에 기뻐하는 마음과 약간의 불신, 그리고 염려가 맹렬하게 충돌했다.
랄티아가 홀로 혼란스러워하든 말든, 탈출을 시도한 죄인들이 모두 죽자 페데르는 혀를 끌끌 차며 올라온 포로들을 주욱 훑어보았다. 몸을 잔뜩 움츠리고 울거나 토하는 이들을 보던 그가 대뜸 한 명을 가리켰다.
“오늘은 저놈으로 하자.”
그 말에 갑판 위에 한 번 더 환호성이 울렸다. 지목된 포로가 울음을 쏟아내며 무어라 빌었지만 오열하는 소리와 해적들의 환호에 뒤섞여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릴 뿐이었다. 나머지는 도로 넣어둬. 마치 가축을 가리키듯 단조롭게 말하며 페데르가 손을 내젓자, 해적들이 포로들과 랄티아를 데리고 다시 함저 구역으로 들어갔다.
괴물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것처럼 새까만 계단을 내려가는 그들의 등 뒤로 포로의 비명이 귓가를 찢어내며 울려 퍼졌다. 비명과 뒤섞여 들리는 와하하 웃음소리에 랄티아는 속이 다시금 뒤집히는 기분을 느꼈다. 인질로 잡혀 온 이래 최악의 밤이었다.
그날 이후 며칠간 랄티아는 쓸데없이 좋은 자신의 기억력에 괴로워하며, 또 며칠간은 로트렐리에 대한 생각을 하며 밤잠을 설쳤다. 어머니와 동생들은 결국 죽었나. 아냐, 그런 이야기는 신문에 있지 않았어. 언니가 또 혼자 막무가내로 뛰쳐나온 것이 분명했다.
포로들이 묶여 갑판의 광경을 볼 때 선장 옆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는 이유로 포로들은 다시금 랄티아를 향한 ‘특별 대우’에 분노했다. 사실 랄티아라고 선장의 옆자리가 부드러운 비단 방석 같았겠냐마는, 코앞에서 잔인한 광경을 목격하며 피를 고스란히 뒤집어써야 했던 입장에서는 그마저도 호화롭게 비친 모양이었다.
그들을 뒤로하고 랄티아는 머리를 굴렸다. 탈출해야 해. 탈출해야 했다. 그러나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탈출해서 마을로 돌아가서, 언니에게 연락할 방법을 찾아서…….
랄티아는 마치 풀리지 않는 난제에 직면한 것 같은 두통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때 함저 구역을 맡은 해적들이 서로 교대하며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알라프라리에 들른대?”
“그렇지. 몇 주 뒤면 정박할 거야. 거인의 바다를 거치는 참이니까. 헤로 뭐시기도 받아온다던데.”
랄티아는 번뜩 고개를 들었다. 항구. 정박. 몇 주 뒤……. 알라프라리라면 제국령인데. 이 해적들이 간덩이가 튀어나왔나? 하지만 자신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간덩이가 나간 해적들이 제국령으로 가서 추포된다면 랄티아에게는 희소식 아니겠는가?
마장석 기기를 힐끔 본 랄티아는 생각했다. 어쩌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곧장 탈출하기엔 신체적 요건이 부족했다. 언니의 말마따나 종일 집구석에서 책만 읽어댄 몸이기 때문이었다.
이번 기회로 다른 포로들을 탈출시켜보자. 말하자면 실험군으로 쓰는 것이다. 그들의 행동에 따라 해적들이 움직일 것이고, 그것을 계산하면 앞으로의 움직임을 계획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누군가 탈출을 꾸민 게 아니라 우발적인 사고로 기회가 생겨난 것처럼 보여야 했다.
그래, 불시에 일어난 사고처럼.
랄티아는 마장석 기기를 바라보았다.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였다.
정박하려던 중 마장석 기구의 출력이 튀어 항구와 선박이 부딪쳤다. 함저 구역과 그 위층의 중간 즈음이 부서졌고, 그 틈새를 통해 포로들은 도주했다. 어쨌든 랄티아는 다른 포로들에게는 탈출의 기회를 줬고, 그에 따른 탈출에 대한 정보 기반을 얻어냈다.
포로들은 탈출을 시도할 기회라도 얻었으니 서로 윈윈인 셈이었다. 더불어 랄티아는 더는 자신을 방해할 사람이 남지 않았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사람들 시선에 연연하지 않고 다시 머리를 쓸 기회를 얻은 것이다.
포로들이 대거 사라졌지만 랄티아만은 남아있는 것에 안도했는지, 해적들은 혼자 있는 랄티아를 그렇게 삼엄하게 감시하지는 않았다. 피차 좋은 일이었다. 랄티아는 속치마에 감춰둔 마장석 부품들을 꺼내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보던 소녀는 눈을 감았다.
“좋아.”
언젠가 제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나라고 쟤네가 떠드는 게 신경이 안 쓰이겠어? 나도 가끔…… 벽에 부딪히는 기분을 느껴.’
‘언니가?’
의외라는 듯 되묻는 말에 로트렐리는 조용히 입꼬리만 올렸다. 그 표정……. 어쩌면 그 표정 탓에 로트렐리가 항상 거대하고 아득하게 느껴진 것인지도 모른다. 로트렐리의 시선은 언제나 바다에 닿아있고, 아직 바다를 모르는 자신은 항상 언니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럴 땐 어떻게 하는데?’
랄티아는 그 선명하게 푸른 눈을 기억했다. 자신의 물음에 높게 묶은 까만 머리칼을 밤하늘의 구름처럼 휘날리며 선언하는 새벽 같은 눈동자를. 등대를 마주하는 바다처럼, 거칠게 파도치는 수면처럼 야성적인 웃음을.
‘벽에 부딪혔으면 그 벽을 더듬어보긴 해야 할 것 아냐? 어느 정도 되면 넘을 수 있나, 혹은 부술 수 있나 보게.’
로트렐리는 또 일견 장난꾸러기처럼 청명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면 돼.’
그게 어려우니까 그러잖아. 삐딱하게 기우는 랄티아의 고개를 본 로트렐리는 어깨를 들썩였다.
‘아득히 멀리 있는 것을 보며 지금 처지에 비관하는 것보다 당장 코앞의 일을 해결하는 게 나을 때가 있어.’
로트렐리는 푸른 바다 위에 선 늘 항해사처럼 보였다. 랄티아는 때로 로트렐리가 항해사라면 자신은 그것을 지켜보는 등대일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로트렐리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 그 뒤엔 어느새 벽을 넘고 부숴버린 나를 발견하게 돼.’
어쩌면 우리는 매번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걸지도 몰라. 로트렐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랄티아를 보았다.
돌연 기억 속의 그녀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랄티아는 어두운 함저 구역에서 회색 눈을 밝게 떴다. 그래, 코앞의 일을 해결하는 거야.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말이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