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30)
바다새와 늑대 (129)화(130/347)
#129화
바다의 마녀가 다녀간 뒤 며칠이 지났다. 평화로웠던 거인의 바다를 지나 비좁은 바다에 다다른 검은바다의 선원들은 저마다 술렁이거나 긴장한 기색으로 무기를 다듬으며 시간을 보냈다.
한편 루루미가 내 저주를 풀었다는 것이 흰소리는 아니었는지, 어디 구멍 뚫린 마냥 기운이 줄줄 새는 것 같던 피로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서 요 며칠 나는 꽤 개운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는 중 부상의 차도가 가장 느리던 도멤도 드디어 붕대를 풀고 기지개를 켰다.
“목적지는 뚜렷한데 분위기는 영 별로네.”
우중충한 선내의 공기에 도멤이 툴툴거리며 말하자 나는 어깨만 으쓱였다. 내가 연신 시큰둥한 기색으로 반응하자 도멤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지만 알만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는 이유가 있었다.
이 망할 마을의 동창 새끼가 일전의 대화로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선원들에게 도움을 구하며 다녔는데, 그가 아가리를 어떻게 털었는지 선원들이 나를 보는 눈이 마치 매정하기 그지없는 사람을 보듯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다른 녀석들 시선이야 아무렴 상관없었지만, 식사를 하기 위해 마주친 요한까지 ‘로트, 같은 마을 녀석헌티 너무한 것 아니냐?’하고 말하자 나는 슬슬 짜증이 치솟은 상태였다. 우홉피아주와의 조우가 정말 목전으로 오자 이전보다 더 열심히 검을 배우는 중인 헤더 역시 그런 선원들의 시선을 눈치채고 내게 힘내라고 할 정도였다. 나는 불현듯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그 새끼는 왜 안 죽지?”
“진정해…….”
“그래, 나 매정한 새끼다. 피도 눈물도 없는 마녀라 민간인인 녀석 돌봐주는 것도 안 하는 야박한 계집애다, 망할…….”
“진정하라니깐…….”
도멤이 침착하게 말리는 것을 뒤로하고 나는 해먹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부쩍 잦아진 간부진 회의에 키이엘로가 불려 나가 자리에는 나와 도멤뿐이었다. 해먹 줄에 앉아 있던 발카가 얼른 내 어깨에 날아와 앉았다. 나는 기분전환이나 할 겸 도멤을 보고 말했다. 나가자.
그에 도멤은 그래, 하며 손질하던 창을 내려놓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문득 아주 예전에 산호섬에서 주워 아직까지 쓰고 있는 검을 보았다가 생각했다. 우홉피아주와 곧 싸우게 될 텐데 나도 손질을 해둬야 하나? 어쨌든 나와 도멤은 노상 갑판으로 나와 때에 맞지 않게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와, 날씨 무슨 일이야.”
“상황은 긴장감 넘치는데 날씨는 태평하네.”
“그러게나 말이야…….”
도멤이 한숨을 쉬더니 난간에 걸터앉았다. 비좁은 바다는 이름처럼 바다가 암초로 인해 비좁은 곳이었다. 크고 작은 암초들이 즐비한 탓에 키를 잡은 우투그루와 항해사인 디겔이 해도를 보며 해로를 따지고 있었다.
조타수가 명확히 정해져 있지 않은 검은바다에서는 주로 그날의 당번이 키를 잡거나 간부진 중 하나가 키를 잡았다. 항해사인 디겔의 명령 없이는 함부로 키를 잡아선 안 되지만 위급할 때는 다른 간부진의 명령에 따라 손대는 게 가능했다.
이틀 정도 전에 발카의 도움으로 암초가 가장 많았던 지대를 지나온 이후로는 디겔도 나에게 더 도움을 구하진 않았다. 클루스도가 그에게 아예 나를 보조항해사 같은 개념으로 붙여줄까, 하고 넌지시 말했었으나 디겔이 거절했다.
디겔은 자신의 실력도 있고, 발카는 자기가 읽지 못한 부분에서만 도움을 주면 된다고 말했다. 이른바 발카는 내 새니 디겔 본인이 자꾸만 찾는다면 결국은 주객전도가 된다는 뜻이었다. 상당히 의외인 말이었다. 그러나 디겔은 내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자신을 보든 말든 헤더가 다치지 않게 확실히 가르쳐두라며 으름장을 놓았었다.
디겔과 우투그루의 모습에서 눈을 떼고 도멤과 시답잖은 이야기나 나누며 바닷바람을 맞던 나는 선장실에서 요한과 키이엘로가 나오는 것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우리를 발견한 요한이 키이엘로의 등을 때리며 주방으로 발을 옮기고, 키이엘로는 얻어맞은 등을 문지르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내가 물었다.
“무슨 얘기 했어?”
“뭐가 있겠어, 우홉피아주를 어떻게 상대할지, 뭐 그런 거 얘기했지…….”
“걔네 본선을 쳐야 하는데. 산하 해적들이 또 그 주변에 빨판상어처럼 붙어있겠지?”
도멤이 질색하며 꿍얼거렸다. 키이엘로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반면 나는 우홉피아주의 산하 해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때 마주쳤을 땐 산하 해적 없이 본선만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발카의 깃털을 쓸다가 물었다.
“우홉피아주의 산하 해적이 많아?”
“동맹처럼 우홉피아주와 교류하는 놈들도 있지만 그런 놈들은 정말로 얄팍한 관계라 신경 안 써도 돼. 문제는 항상 붙어있는 녀석들이지. …잠깐, 이상한데. 로트 너는 우홉피아주와 마주쳤었다며. 그럼 거기서 붙어있는 녀석들 못 봤어?”
도멤이 설명하다 말고 의아하게 물었다.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본선만 있었어. 해적기가 있었고 그놈들이 날 걸고넘어져서 해적이란 걸 알았지,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가는 배라고 알았을 거야.”
“그래? 이상하네. 보통 두세 척 정도 되는 산하 해적이 항상 꽁무니에 붙어있거든.”
도멤은 어깨를 들썩이고는 어쨌든 그래, 안 그래도 쪽수 딸리는데 여럿이랑 붙어야 하니까, 하고 말했다. 발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을까, 로트?』
“안 괜찮으면 어째, 어차피 맞붙긴 해야 하는 놈들인걸.”
내 대꾸에 도멤이 자기도 동물 말 좀 듣고 싶다며 툴툴거리는 것을 뒤로하고 키이엘로는 피곤했던 모양인지 도멤이 앉은 난간에 기대앉았다. 자연스럽게 옆구리에 자리를 잡는 텐의 털을 만지작거리며 키이엘로는 머리를 헤집었다.
“선장님은 아무리 그래도 정면 돌파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그렇지. 수가 딸리잖아.”
“우리 쪽이 나름 일당백이라 해도 상대가 너무 많아. 게다가 우홉피아주 전체가 잡졸 같은 놈들만 있겠어? 그랬으면 벌써 그놈들 목을 따서 바다에 던져놨을걸. 선장님 생각이 틀리진 않았어.”
나와 도멤이 차례로 동의하자 키이엘로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클루스도의 생각에 반대해서 꺼낸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도멤이 그 낌새를 눈치채고 눈을 가늘게 뜨더니 그를 보며 추궁했다. 무슨 생각이야? 그러자 키이엘로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유격대처럼…… 전투 중에 우홉피아주 놈들 몰래 본선에 숨어드는 방식으로 싸워보는 건 어떨까 싶어서.”
“누구 목숨 버릴 일 있어? 들키면 끝장이잖아. 아니, 그 전에 어떻게 숨어드는데?”
도멤이 기겁했다. 나는 난간에 팔을 걸치고 흠, 하며 키이엘로를 보았다. 허투루 얘기를 꺼낼 바에야 입을 다무는 것을 택하는 놈이니 나름대로 계획을 생각해놨을 터였다.
그리고 클루스도 역시 정면 돌파는 어려울 것이란 의견을 냈으니 간부진들이야 계속해서 그것의 대안을 생각했을 것이다. 뭐, 우투그루와 디겔은 중간에 나온 것 같았지만 대화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도 나야 모르는 일이고.
키이엘로는 별안간 내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우리 배로 우홉피아주를 끌어들이는 거야. 물론 위험 부담이 있지만, 우홉피아주와 그 산하 해적들 시선이 이 배로 끌린 틈에 소수가 몰래 우홉피아주로 올라타는 거지. 그렇게 하면…….”
키이엘로가 다시 한번 내 눈치를 보았다.
“로트 동생이 안전할 확률이 높아질 것 같아서.”
“…….”
나는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생각도 못 한 이야기였다. 새삼 내 안이함이 갈빗대를 찔러왔다. 우홉피아주를 해치우면 자연히 뿅 하고 랄티아가 구해질 것이라 생각했던 걸까?
키이엘로의 말대로, 랄티아는 전투가 끝날 때까지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순간 머리가 지끈 아팠다. 랄티아 걘 운동 신경도 좋지 않아서 요령껏 도망치는 것도 못 할 텐데…….
그때 도멤이 말했다.
“그치만 너무 위험해. 그 교활한 녀석들이 어떻게 눈치를 못 채게 하는데? 우홉피아주 안으로 숨어들 정도가 되려면 실력도 좋아야 하는데 누가 가겠어?”
“그건 그렇지…….”
“정면 돌파가 어렵다면 진영을 잘 파고들면 될 거야. 굳이 목숨 갖고 도박을 할 순 없지.”
도멤의 말마따나 신중해져야 하는 건 맞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출렁이는 바다를 응시했다. 붉은 바다까지 이틀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갑판 한쪽에서 검을 연습하는 헤더를 보았다가 한숨을 쉬었다.
암만 헤더에게 검술을 알려줬다지만 그렇다고 바로 실전으로 등 떠밀 수는 없었다. 그리고 프라세도……. 요새 베제와 프라세가 우리를 피해 다니는 탓에 마주친 적이 손에 꼽았다. 그러나 근래 서먹하게 지냈다 해서 프라세가 걱정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랄티아가 걱정이었다. 적어도 전투를 피해야 하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보장이 있다면 불안감이 좀 가실 것 같았다.
나는 울렁이는 파도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비전투 인원은 어쩌지?”
“비전투 인원?”
도멤은 눈을 깜빡이다가 아, 하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이제야 떠올린 모양이었다. 키이엘로 역시 곤란한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도멤이 앓는 소리를 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네, 세운도 헤더 누나도 싸우라고 하기엔 무리지. 게다가 그 잡일꾼도 있어.”
“세운 같은 경우는 원이 호위해주겠고, 프라세는 베제가 지켜주겠지만……. 헤더 누나는 어쩌지.”
“디겔과 함께 있을 수는 없나?”
“디겔 아저씨는 간부잖아. 원래 전투 때엔 간부가 가장 앞에 나서야 해.”
나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뜨며 키이엘로를 보았다. 그럼 너도? 내 물음에 키이엘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난 대뜸 말했다.
“야, 간부 때려치워.”
“갑자기?”
“지병이 도졌다 해.”
“말이 되는 소릴 해…….”
키이엘로가 황당해하는 사이로 도멤이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우리 그 잡일꾼 걱정은 하나도 안 하네. 그 말에 나는 곧장 씹어 뱉었다. 뒤지든지 말든지. 그에 다시 한바탕 웃은 도멤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뭐, 어쨌든 비전투 인원들은 선장님도 어떻게 생각이 있으시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야 다행이었다. 그보단 키이엘로가 전투에서 가장 앞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듣자 정말로 전투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정말로 곧이구나. 곧 우홉피아주를 만나 복수를 하고 랄티아를 구하든 내가 죽든 결정이 날 것이다.
그때 나와 도멤은 어디에 있을까? 내가 자기들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만 알 뿐 검은바다와 합류했다는 것은 모를 텐데 우홉피아주는 어떻게 나올까……. 나는 문득 어? 하고 멍청한 소릴 냈다.
키이엘로가 왜 그러냐며 쳐다보는 것에 나는 미간을 좁히며 골몰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 정말로, 우리 쪽이 정보 면에서 앞서는 편이지 않던가?
나는 키이엘로에게 물었다.
“우홉피아주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는 걸 모르겠지?”
“흠, 아마 그러지 않을까?”
“그럼…… 아까 키이엘로가 말한 유격대, 내가 할 수 있지 않겠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