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32)
바다새와 늑대 (131)화(132/347)
#131화
보이는 대로 급하게 집어온 무기 중에서 창을 던져 건네받은 도멤이 돛대 줄을 밟고 난간 너머 아래를 보았다.
나와 키이엘로, 네토르 역시 칼과 검 따위를 건네받고 허리춤에 차는데, 네토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상한데. 크라켄은 난폭해지는 시기가 아니라면 굳이 지나가는 배를 붙잡진 않아. 왜 이렇게 날뛰지?”
“알 게 뭐야! 당장 공격받게 생겼는데!”
그 순간 배 주변의 물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물뿐만이 아니었다. 청명하던 주변에도 까만 안개가 낀 것처럼 어둑해지기 시작하자, 밝은 대낮이었던 것이 거짓말처럼 사방이 흐린 날처럼 침침해졌다.
크라켄이 먹물을 뿜어낸 것이다. 까만 선체와 검은 물 탓에 수면과 선측을 구별하기 어려웠다. 이 망할 배는 왜 칠을 까맣게 한 거란 말인가? 세이렌과 인어에 이어 크라켄까지, 어쩌면 이 검은색 때문에 재수 옴 붙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 까맣게 물든 바다가 휘몰아친다 싶더니 수면 밖으로 나와 있던 암초의 바위를 커다란 문어 다리가 짚으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젠장, 배를 바다에서 아예 건져낼 심산인가?
디겔이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속도를 높여라! 유리한 고지로 이동한다!”
함저 구역으로 선원들이 말을 옮겼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속력을 더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잠시 지체하는 사이 크라켄의 다리는 벌써 다섯 개 정도가 바다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크라켄의 다리는 배를 부수지는 않고 선측을 더듬어가며 움직일 뿐이었지만, 커다란 다리가 언제 배를 움켜쥐고 부수려 들지 알 수 없어 긴장감이 감돌았다.
“우홉피아주도 이 바다를 지나갔을 텐데 갑자기 이렇게 나타날 수가 있나?”
내가 의아하게 중얼거리는데, 우투그루가 질색하는 선원들에게 외쳤다.
“크라켄은 그렇게 호전적인 성격이 아냐! 괜히 자극하지 마라!”
불시에 덤벼온다면 곧장 공격할 수 있게 무기를 꺼내든 우리는 크라켄의 다리가 움직이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디겔이 말했다.
“되도록 손해를 줄여야 해. 우리는 우홉피아주가 중요하다고.”
그의 말마따나 붉은 바다에 가서 우홉피아주와 맞붙게 될 텐데 굳이 괴물을 상대하며 전력에 손실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그 순간 파도 사이로 크라켄의 머리가 드러났다. 어두운 몸체에 밝은색의 점이 찍힌 거대한 문어는 마치 염소의 것 같은 눈알을 데룩 굴리며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돛대 줄에서 갑판으로 내려온 도멤이 긴장하며 창을 고쳐 쥐었다.
“미치겠네. 왜 갑자기 크라켄이 나타났지?”
“우홉피아주는 이쪽으로 가지 않은 건가? 우리가 크라켄과 마주친다면 그놈들도 먼저 왔을 때 마주쳤어야 하는 거 아냐?”
“아니면 그놈들 때문에 크라켄이 깨어난 것일지도 모르지.”
네토르가 그렇게 말하더니 크라켄을 곁눈질하며 쳐다보았다. 파도가 몰아치는 와중에도 속도가 붙은 배가 매끄럽게 크라켄의 옆을 지나가는데, 배를 더듬던 다리들이 별안간 배를 붙들었다. 카드득, 하고 배의 나뭇결이 서로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음이 들리자마자 우투그루가 외쳤다. 공격해라! 선원들이 저마다 크라켄의 다리를 베어낼 때마다 다리는 움츠러들며 물러났지만 금세 다시 배로 가까이 다가왔다. 공격보다는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갖고 놀 듯 구는 모양새였다.
도멤이 욕을 짓씹었다.
“빌어먹을, ‘분노한 크라켄과 만난다면 배를 버리라’, 그건가?”
“분노한 것 같아 보이진 않는데 대체 왜 이러는 거람…….”
얼핏 태평하게까지 들릴 정도로 지껄인 키이엘로는 검을 뽑아 들고 난간 너머로 넘어갔다. 키이엘로! 도멤은 깜짝 놀라 외쳤다가 그가 배 밖에서 난간을 붙든 것을 보고 에효, 에효! 하며 재빨리 달려가 키이엘로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크라켄의 다리 두 개가 우리 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키이엘로가 순식간에 다리 하나를 베어내고, 나와 네토르도 합세해 크라켄의 다리를 견제하며 도멤을 엄호했다. 언제 갑자기 우리를 붙들고 으깨려 들지 몰라 칼로 찌르거나 베어내며 나는 도멤에게 급하게 물었다.
“왜 키이엘로 손목을 붙든 거야? 크라켄을 견제하는 게 더 낫잖아!”
“키이엘로 녀석이 무심코 힘줘서 난간을 부수면 어떡해!”
“…….”
젠장, 일리 있는 말이었다. 나는 무어라 반박하지 못했다. 난간을 붙들고 매달려 크라켄과 배를 살피던 키이엘로가 그것을 들었는지 어이없어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정도 힘 조절은 하거든? 네토르가 키이엘로의 말을 가뿐히 무시하고 물었다.
“뭐 특이한 점이 있어?”
“모르겠어……. 잠깐!”
배를 최대한 지켜라! 디겔이 외치는 소리와 함께 선원들이 내지르는 고함과 크라켄이 뱃전을 내리치는 소리가 울리는 찰나, 키이엘로가 말했다.
“바닷물이 이상해! 이건…… 빛?”
“무슨 소리야?”
도멤이 인상을 찌푸리며 키이엘로가 매달린 난간 너머로 몸을 기울였다. 나 역시 크라켄의 다리를 베어내면서도 바닷물을 힐끔힐끔 보았다. 그냥 봐서는 여전히 크라켄의 먹물이 깔린 검은 물이었다. 그때 도멤이 헉, 하며 눈을 크게 떴다. 바다가 빛나잖아! 네토르가 사납게 외쳤다.
“무슨 헛소리야!”
“정말이야! 먹물과 비슷한 색깔이라 잘 안 보였지만, 검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어……. 로트!”
『로트!』
그 순간 크라켄의 다리가 네토르와 나를 후려쳤다. 도멤의 창대에 걸려 넘어진 네토르와 달리 나는 난간에 등허리를 부딪치고 그것도 모자라 몸이 기우뚱 기울어졌다. 발카가 날개를 퍼덕이며 내 팔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발카가 날 끌어올리려 하기도 전에 머리카락이 먼저 위를 향해 휙 솟구쳤다.
도멤이 창을 내던지고 날 붙잡으려 했지만, 셔츠 끝만이 그의 손가락을 스치며 지나갔다. 나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젠장, 크라켄이 있는 바다로 떨어진다니!
그때 떨어지던 몸이 덜컥 멈추더니 발목이 꽉 붙들렸다. 키이엘로였다. 나는 내 뺨을 스치고 키이엘로의 검이 바다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거꾸로 매달린 꼴이 되자 머리로 피가 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황에 맞지 않게 나는 도멤이 말한 ‘바다가 빛난다’가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 먹물에 물든 바다는 그저 까만색이 아니라 마치 검푸른 모래가 몰아치듯, 밤하늘의 은하수가 그러하듯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것을 어디선가 보았던 기억이 났다. 색깔은 달랐지만 저렇게 은은하게 빛나며 물결치던 것이 낯설지 않았다. 발카를 처음 만났던 그 새벽의 바다…….
키이엘로가 내 발목을 쥐고 있는 사이 나는 끙, 소리를 내며 상체를 위로 끌어올렸다. 내가 랄티아였으면 큰일 날 뻔했다. 내가 내 발목을 쥔 키이엘로의 팔뚝을 움켜쥐자 키이엘로가 재빨리 내 발목을 놓고 팔뚝을 마주 쥐었다. 발이 아래로 꺼지며 몸이 휘청 흔들리자 도멤이 외쳤다. 키이엘로, 난간 쥔 손에서 힘 빼!
네토르가 근처에 있던 밧줄을 내렸다. 올라와! 나는 흔들리면서도 용케 한 손으로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밧줄을 쥐었다. 그때였다.
「마장(魔障)의 기운이 만연하도다. 아, 초월자들은 죄를 바로잡을 생각이 없는가…….」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검게 물결치는 바다를 보았다. 키이엘로 역시 일순 놀랐는지 날 붙든 손에 힘이 반쯤 풀렸다가 다시금 바투 잡았다. 네토르가 위에서 외쳤다.
“빨리 안 올라오고 뭐 해?!”
그 말에 나와 키이엘로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네토르는 직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도멤이 숨을 허덕이며 기겁했다.
“방금 누구 목소리야?”
도멤의 말에 나와 키이엘로는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도멤이…… 목소리를 들었단 말인가? 어떻게? 그러나 길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네토르가 빨리 올라오라며 소리치는 것에 밧줄을 바투 잡고 위를 보는데, 별안간 크라켄이 몸을 뒤틀며 다리를 휘둘렀다.
배가 마구 흔들려 제대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키이엘로가 이를 꽉 물고 발로 선체를 디뎠다. 작게 나무가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예 부서질 정도는 아니었다. 도멤과 네토르도 균형을 잃고 휘청이다가 욕을 짓씹었다. 그때 네토르가 도멤 쪽을 보고 외쳤다.
“피해!”
크라켄의 다리가 갑판 난간을 부수고 들어와 몰아치며 도멤을 후려쳤다. 비틀거리던 탓에 미처 피하지 못한 도멤이 악 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넘어졌다. 도멤! 내가 그를 부르며 서둘러 밧줄을 놓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돌연, 도멤이 초록빛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바다를 돌아보았다. 마치 내가 아니라 바다에서 누군가 그를 불러서 돌아보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저 멍청이가 어딜 보는 거야! 나는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팔을 뻗었으나 도멤은 그대로 바다 위로 떨어졌다.
“도멤!”
키이엘로가 크게 외쳤지만 도멤을 삼킨 바다는 까만 우주처럼 부드럽게 물결치고 있었다. 나는 이를 갈며 허리춤의 단도를 뽑아냈다. 선체에 단도를 박은 내가 발을 그곳에 디디고 난간의 다리를 붙잡자 키이엘로는 불안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로트, 뭐 하려고?”
“저 멍청이가 바다에 빠졌잖아! 넌 먼저 올라가.”
“너도 바다에 빠지겠다는 거야?!”
나는 난간이 어디 부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키이엘로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일단 가 봐야지. 내 말에 키이엘로는 말문이 턱 막힌 것처럼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때 날뛰는 크라켄의 다리를 찌르던 네토르가 성질을 내며 외쳤다.
“둘 다 헛짓거리 말고 빨리 올라와서 나나 도와! 배에 매달려서 건오징어처럼 뒤질 참이야?”
“시끄러워! 크라켄이나 건오징어로 만들 생각 하시지.”
“저건 문어야, 멍청아!”
어쩌라고! 나는 남은 손으로 위의 네토르에게 엿을 날려주고 검을 뽑아 들었다. 다행히 바다에 잠겨있는 크라켄의 다리는 얌전했다. 물 밖에 나온 것들만 난장을 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 목소리……. 나는 수면 밖에 나와 검은바다를 응시하는 크라켄의 머리를 보았다. 크라켄이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진작 나와 키이엘로가 저 망할 문어를 말릴 수 있었으리라.
어쩌면…… 또 다른 바다새인가? 내가 발카와 만났을 때와 같다면 도멤은 무사할까? 나는 발카와 만났던 과거의 새벽녘이 특수한 경우에만 그렇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
몇 번이고 뱃일에 나서며 이런 물결은 특이한 존재에 의해 생겨난다는 정도는 눈치껏 알 수 있었다. 도멤이 빠진 지금도 바다 밑에는 무언가 알지 못하는 존재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위험한 괴물일 수도 있으니 만일을 대비해 내려가야 했다.
그런데 크라켄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더니 배를 감쌌던 다리를 물속으로 도로 집어넣었다. 필사적으로 다리를 베어내고 찌르던 선원들이 얼빠진 소릴 내며 의아해하는데, 크라켄은 눈만 내놓고 다리며 몸을 거의 바다에 푹 담갔다.
마치 반신욕이라도 즐기는 것 같은 모습에 나는 검을 들고 찌르려던 자세 그대로 어처구니없단 얼굴을 했다. 이 문어 새끼가 숙회가 되고 싶나……. 기껏 건들며 배를 뒤집어 흔들더니 이제 와 가만히 있느냔 말이야?
이를 바득바득 갈던 나는 퍼뜩 이때가 기회라는 생각을 했다. 도멤은 아직도 바다 안에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