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37)
바다새와 늑대 (136)화(137/347)
#136화
“이제 곧 우홉피아주와 결전이 있을 건 알고 있지?”
“네. 함저 구역에도 소식은 다 퍼졌어요. 비전투 인원은 하몬이랑 이곳에서 대기할 예정이기도 하고요.”
그 이야긴 듣지 못한 우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멤 역시 아, 그래? 하고 놀란 반응을 하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대략적인 작전과 계획을 이야기해주자 가만히 듣고 있던 클레인스가 가뿐하게 말했다.
“할게요.”
“이렇게 순순히?!”
“한다고 해도 그래요?”
깜짝 놀란 도멤을 뒤로하고 키이엘로가 당황한 얼굴로 클레인스를 보았다. 클레인스는 정말로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고 어쨌거나 우리는 계획이 성립되었으니 다행인 일이었지만……. 예상보다 더 대수롭지 않은 빠른 승낙이긴 했다. 키이엘로가 클레인스에게 다시금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훨씬 위험할 거고, 잘못되면 도리어 적진 한가운데에서 포위되는 꼴이 될 거야.”
“이 누나나 형도 다 각오한 일이잖아요. 그리고 그런 건 키이엘로 형도 못지않죠. 간부라 최전선에 서야 하는 분이 말해봤자…….”
“이놈이나 저놈이나 우홉피아주 얘기에 눈 돌아가는 건 똑같지.”
가만히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휠체어의 팔걸이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괴고 있던 하몬이 돌연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클레인스가 그 소리를 듣고 움츠러들 듯 어깨를 모으며 고개를 수그렸다. 그런 진저 소년을 보며 하몬은 탐탁잖은 기색으로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로트 녀석이야 제 동생이 잡혀있고 도멤이나 네토르는 저 녀석이랑 친해 뵈니 그렇다 쳐도, 넌 뭘 믿고 그리 부나방처럼 못 굴어 안달이야?”
친하진 않은데. 나와 네토르는 하몬의 말에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가 뚱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몬이 말을 이었다.
“복수 그런 것도 사지 멀쩡하고 대가리 멀쩡할 때 사리 밝게 굴면서 해야 하는 법이다. 당장 뛰쳐나갈 생각 말고 좀 더 생각해보고 결정해.”
“하몬의 말이 맞아요.”
클레인스가 꾸중을 듣고 시무룩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퍼뜩 들고 하몬에게 말했다.
“하지만 전 저 나름대로 ‘선택’을 한 거예요. 결정했어요. 로트 누나네 유격대에 동참할래요. 전 잠입에 자신이 있고, 유격대로 가지 않아도 전선에 서야 하는 건 똑같아요.”
클레인스가 침착하게 말하자 하몬은 낮게 가라앉은 얼굴로 소년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클루스도 놈은 다리 병신인 난 여기에 두더니 앞도 안 보이는 네놈은 전선에 세우겠다더냐?”
어쩐지 날 선 말투였다. 클레인스는 얼른 ‘앞이 아예 안 보이는 건 아닌데…’ 하며 웅얼거렸지만 하몬은 여전히 심통스러운 얼굴로 클레인스를 보고 있었다.
키이엘로는 애초에 우리가 유격대로 나서는 것이 걱정스러운 입장이었던 만큼 하몬의 말에 공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느 쪽의 편을 들어주며 말을 거들지는 않았다.
클레인스의 말대로 키이엘로는 최전선에서 가장 큰 전력으로 있어야 하는 자신이 그런 말을 해봐야 누워서 침 뱉기임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네토르가 얼핏 시큰둥하고 거만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하몬은 몰라도 클레인스는 큰 전력이 되어줄 수 있어요. 무엇보다 기척과 소리 감지에 유능하고, 클레인스의 눈이 부족한 건 여기 눈 멀쩡한 사람만 셋이니 눈 여덟 개 중에서 두 개 모자란다고 큰일이 일어나진 않아요. 다리가 불편한 것도 아니고 눈이 아예 안 보이는 것도 아닌데 못할 이유는 없죠.”
“지금 뭐라고 했냐?”
하몬이 무섭게 굳힌 얼굴로 네토르를 보았다. 네토르는 일순 약간 당황한 것 같았다. 하몬이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미약하게 네토르를 흐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 새끼는 그냥…… 자기가 뭔 말을 하는지 모르는 새끼였던 걸까……? 도멤 역시 네토르의 발언에 눈에 띄게 당황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결국 가엾은 도멤이 서둘러 나섰다.
“하몬, 진정해요. 네토르가 말을 좀 밉살스럽게 하잖아요. 그리고 하몬 말이 맞아요. 클레인스 반응은 우리한테도 좀 의외였으니까요…….”
“……쯧!”
하몬이 대차게 혀를 차며 휠체어 바퀴를 돌리며 앵돌아졌다. 나는 우리에게 등을 돌린 하몬을 보고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기색인 네토르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클레인스에게 말했다.
“도멤 말이 맞아. 우리는 네 힘이 필요하긴 하지만 섣부르게 행동하는 사람을 잠입조로 들일 수는 없어. 하몬도 반대하는 것 같고……. 제안한 입장에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더 신중하게 생각해보는 게 어때? 아직 며칠 더 시간은 남았으니까.”
“……저는 제가 섣부르게 결정했다고 생각 안 하는데요.”
“뭐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럼 그걸 적어도 하몬에게는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어쨌든 우린 이만 갈게. 함저 구역에서 나오는 데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 결정한 뒤에 우리한테 찾아와줘.”
내 말에 클레인스가 뚱하게 입을 댓 발 내밀고 있다가 이내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어리벙벙한 목소리로 ‘하몬, 삐졌어요?’하고 말을 걸었다.
나는 그 천연덕스러운 물음에 약간 황당한 기분이 되었으나 그런 것이 익숙한지 하몬은 투박하게 클레인스를 밀어내며 ‘됐다, 말 걸지 마!’하고 꿍얼거릴 뿐이었다.
하몬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온통 푸르스름했던 선실을 나가자 어두컴컴한 복도가 다시 나타났다. 함저 구역에서 우리의 해먹이 있는 선실로 올라가며 나는 새삼 정말 계단이 많다고 생각했다. 선실로 가며 키이엘로가 말했다.
“사실 하몬이 저렇게 반대할 줄은 몰랐어.”
“클레인스를 아끼시잖아. 그리고 하몬이 겪은 것도 있고.”
도멤의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하몬이 겪은 일? 내가 묻자 도멤이 말했다.
“하몬이 말했듯이, 하몬은 예전엔 작은 나라의 시골 자작이었어. 어쨌든 계급은 까마득한 귀족이었단 거지. 꽤 인망 좋은 지주였다 봐.”
“그 나라……. 지금은 제국에 먹혀서 이름이 뭐였는지도 모르지, 아마?”
네토르가 심드렁하게 덧붙이자 도멤은 어색한 얼굴로 그렇지, 하고 답했다.
“우홉피아주가 그 작은 해변마을을 습격했고……. 한순간에 땅은 망쳐지고 소작농들도 잃고, 재산은 약탈당하고 가족들도 변을 당했지.”
“…….”
“하몬의 다리가 그렇게 된 것도 그때야. 듣기론 우홉피아주가 저택에 불을 질러서 무너지던 기둥에 다리가 깔렸다나. 용케 살았지만 뭐……. 어쨌든 하몬이 우리 해적단과 합류할 때, 그는 숨겨뒀던 비자금까지 모조리 털어서 우리에게 지원했어. 고향 섬의 원조도 물론 있었지만 검은바다가 번듯한 항해를 금방 출발할 수 있었던 건 하몬의 덕도 컸지. 게다가 귀족이었으니까 아는 것도 많고…….”
도멤은 그렇게 말하다가 근심스럽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 하몬은 정말 우홉피아주에 눈 돌아간 사람이었어. 옛날엔 좀 괴팍한 사람이었지.
그렇게 말한 도멤에게 네토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 배에 안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한가. 그에 키이엘로가 조용히 동의했다. 검은바다의 선원은 다들 한때 우홉피아주에게 이를 갈며 부나방처럼 부딪친 적이 있거나 그럴 예정인 사람들이었다.
그 거대한 분노와 복수심이 뭉쳐 이 배를 나아가게 했다. 이 배는 아마 마장석이 아니라 그런 분노로 움직이는 게 아닐까. 분노가 연료가 되어 나아가는 것은 비단 배뿐만은 아니었다. 내가 한가로운 생각을 하는 동안 도멤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하몬은 몸이 불편하잖아. 전투가 있을 때마다 전면에 나서겠다고 나서는 걸 가로막힌 적도 많고, 막말로 그 덕에 하몬이 숱한 전투가 있었음에도 살아있을 수 있었던 건 맞아. 게다가 지금은 함저 구역에서 일하고 있고……. 그렇게 있는 동안 마음이 좀 식은 걸까?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즘엔 정말로 별로 나서지 않고 있는 거지.”
나는 휠체어에 앉은 하몬을 떠올렸다. 사고 이후 걸을 일이 없었을 다리는 바지에 감싸여 있음에도 앙상하게 마른 태가 보였었다.
“아마 자기가 그렇게 겪은 일이 있으니 클레인스를 말리는 게 아닐까. 몸 불편한데 괜히 나섰다가 다치지 말라는 거지. 뭐…… 내가 하몬 생각을 어떻게 알겠냐마는.”
도멤은 애매하게 말을 끊었다. 나 역시 애매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과연 정말로 하몬의 복수심이 식은 걸까? 그래서 부나방처럼 덤비던 작자가 이제는 마찬가지로 부나방처럼 구는 젊은이를 말리는 것일까?
나는 어쩐지, 이유도 알 수 없지만 그게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오히려 더 꽁꽁 압축되어 뭉쳐있는 걸지도 모르지. 부나방이 아니라 그 전의 번데기가 된 것처럼…….
함저 구역을 벗어나자 어두운 것에 익숙해졌던 눈이 부셨다. 평소엔 아무 생각 없이 거닐던 선실이었음에도 이상하게 눈살이 시렸다. 함저 구역이 너무 어두웠던 탓이리라.
그 어두운 함저 구역엔 하몬이나 클레인스처럼 몸이 다소 불편한 선원들이 많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함저 구역에서 클레인스와 하몬을 제외하면 사람을 보지 못했다.
어두워서인가? 내가 그것에 관해 의아해하자 키이엘로는 이렇게 말했다.
“다들 잘 안 돌아다녀서 안 보였던 거지 족히 열댓 명은 있어.”
나는 그들이 왜 안 돌아다니냐고 물어보려다 말았다.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클레인스가 찾아왔다. 결국 하몬을 설득했는지 클레인스는 우리에게 합류한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키이엘로는 반쯤은 체념하고 반쯤은 예상한 얼굴로 이를 클루스도에게 알렸고, 우리는 이틀가량 지나는 동안 거의 매시간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짰다.
클레인스에게 하몬에 관해 묻자 어린 소년은 하몬은 심술쟁이라 그런다며 꿍얼거릴 뿐이었다. 친한 삼촌에게 투정 부리는 것 같은 어조였다.
어쨌거나 일이 잘 풀렸으니 됐지, 그렇게 생각하며 우리는 몇 번이고 작전 회의를 했다. 그 며칠 동안은 파도도 거세지 않았고, 일전의 크라켄처럼 난데없는 괴물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짧은 폭풍전야의 평화가 그렇게 지나가고, 이윽고.
칠흑색의 피네스는 붉은 바다에 닿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