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4)
바다새와 늑대 (13)화(14/347)
#13화
잔치는 조금 늦은 오후가 되어서 시작되었다. 그동안 짐을 옮기거나 갑판 위를 정리하는 일만 열심히 하던 우리도 쉴 짬이 생겼다. 발 빠른 선원들은 벌써부터 술판을 벌이고 뱃노래를 부르며 왁자지껄하게 놀고 있었다.
키이엘로는 물론이고 나도 딱히 해적들 사이에 껴서 잔치를 즐기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음식만 가져다 갑판 구석에 앉아 먹고 있었다.
친구 없는 삶이란 씁쓸하구나….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미간을 좁혔다. 아니지, 이 배에 오르기 전에도 딱히 친구가 많은 편은 아니었잖아. 나는 떨떠름하게 그릇에 담아온 생선 요리를 입에 넣었다. 내 사회성엔 문제가 없어, 아마도…….
나와 거리를 두고 갑판 바닥에 앉은 키이엘로는 그릇에 수북하게 쌓은 고기를 텐과 나눠 먹고 있었다.
멀리에서 술을 마시며 친해 보이는 선원들과 이것저것 떠들던 도멤을 클루스도가 부르는 것이 보였다. 클루스도의 옆에는 언제나처럼 디겔과 우투그루가 있었다. 저 둘은 항상 클루스도랑 붙어 다니는군…….
그때, 클루스도가 도멤에게 키이엘로 쪽을 가리키며 뭐라 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우투그루의 얼굴이 미미하게 불쾌한 표정을 했다. 도멤은 키이엘로를 슬쩍 보더니 뭔가 알았다는 듯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 보니 너 저기 혼자 있는 내 아들과 놀아줘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혀를 차고 발카에게 청포도를 쥐여주며 말했다.
“저 선장님은 젊은 사람들 관계에 끼어들면 안 된다는 걸 언제쯤 깨달을까?”
『모르지. 오지랖이 너무 넓은 인간이야.』
아니, 뭐 자기 자식이니 신경 쓰일 수는 있다만……. 나는 발카의 말에 혼자 항변하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애초에 그러면 키이엘로에게 누구와 놀아라, 하고 말해야지 왜 도멤에게 말한단 말인가? 클루스도의 태도는 애매하고 알기 힘든 것이 많았다.
서자라서? 여기서 키이엘로는 사실 서자라기보다 사생아에 가까워 보였다. 그런 이유라기엔 우투그루에게 하는 태도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데도…….
아들들을 이해하기는 포기한 채 각자 알아서 지내라고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친구 관계에는 나서면서, 제 자식들이 싸우면 잘잘못을 가르고 해결하기보다 그저 조용히 지내라고 하고.
설마 싸우면서 친해질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건가? 그렇다 해도 클루스도의 태도는 어딘가 미심쩍었다. 못마땅한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도멤이 가볍게 걸어와 키이엘로의 옆에 앉았다. 키이엘로는 도멤을 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도멤이 제 아버지의 말을 듣고 왔다는 걸 이미 눈치챈 모양이었다.
만약 클루스도의 저런 보살핌이 계속되어왔다면 눈치가 늘지 않고서는 못 배겼겠다 싶었다. 물론, 그걸 제외하더라도 키이엘로는 좀 예리한 면이 있었다.
문득 도멤이 날 발견한 듯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한숨을 쉬다가 클루스도가 기대 어린 얼굴로 내 쪽을 은근히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욕을 삼켰다. 나는 별수 없이 일어나 도멤과 키이엘로 쪽으로 걸어갔다. 키이엘로는 날 보고 반가우면서도 미안한 것 같은 표정을 했다.
그 얼굴을 보고 나는 퍽 충동적으로 말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딱히 네 아버지 때문에 온 건 아니니까.”
물론 말하고 5초 정도 후회했지만, 키이엘로가 얼떨떨한 얼굴을 조금 붉히며 정말? 하고 묻자 가볍게 털어낼 수 있었다. 너는 얼굴만 뜯어먹고 살아도 3대는 살 수 있을 거 같아. 내가 자리에 앉으며 하는 말에 도멤은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도멤에게 짧게 말했다. 너는 뜯어먹기엔 뭐가 없고. 도멤이 웃음을 뚝 그쳤다.
이렇게 모여서 보니 서로의 접시에 개성이 넘쳤다. 생선과 과일 위주인 내 접시와 살코기와 향신료 위주인 키이엘로의 접시, 채소와 야채, 빵 위주인 도멤의 접시엔 각각 겹치는 음식이 하나도 없었다.
그걸 도멤도 발견했는지 제 얼굴을 붙잡고 한숨 쉬던 것을 멈추고 감탄했다.
“어째 서로 맞는 음식이 하나도 없지? 로트, 생선만 먹으면 맛있어?”
“왜 시비야?”
“키이엘로는…… 내가 그 식단으로 먹었으면 아마 갑판을 굴러다닐 수 있을 거야.”
키이엘로는 우리가 뭐라 하든 입에 햄 조각을 넣다가 나와 도멤의 시선에 느리게 씹어 삼키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가? 도멤은 고개를 설설 저였다. 성인병의 온상지가 여기 있네…….
도멤의 말대로 키이엘로의 접시에는 햄, 훈제 고기, 구운 고기 할 것 없이 여러 고기들과 육두구나 머스타드 같은 향신료 소스가 가리지 않고 담겨있었다.
나는 육두구의 향에 코 밑을 문질러 냄새를 날리고 물었다.
“향이 너무 강하지 않아?”
“사실 난 가리는 거 없이 잘 먹는데……. 굳이 따지면 자극적인 맛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해.”
키이엘로가 애매하게 대꾸하며 매워 보이는 소스를 바른 꼬치를 들었다. 옆에서 도멤이 꼬치를 가로채 한 입 베어 물고는 오만상을 썼다.
“매워!”
“저런.”
키이엘로가 목까지 벌게진 도멤에게 술잔을 내밀어주며 태연하게 꼬치를 먹었다. 나는 조금 질린 눈으로 키이엘로를 보았다. 저게 멀쩡하게 들어가는구나……. 술을 꼴깍꼴깍 마신 도멤이 불이라도 내뿜을 것처럼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나는 굳이 키이엘로의 접시에 담긴 음식에 도전하지 않고 내가 담아온 음식이나 열심히 먹었다. 도멤도 자신의 어리석은 시도를 반성하며 그 뒤로는 키이엘로의 접시에 손대지 않았다.
술에 취한 해적들이 부르는 뱃노래가 흥겹게 들려왔지만 나는 어쩐지 들뜨는 기분은 아니었다. 이거 어디서 느껴본 적이 있는데. 아버지들이 섬으로 돌아오는 때에 느껴봤던가. 들뜬 분위기와 나 홀로 침잠하는 암울함이 공존하는 기분을……. 나는 멍하니 포크로 연어 위에 올라와 있는 양파를 찍어 입에 넣었다.
시끌벅적한 잔치에 끼지 않고 도란도란 대화만 하고 있자 키이엘로는 도멤에게 미안했는지 민망해하는 얼굴로 말을 걸었다.
“그……, 너 다른 친구들하고 놀 거면 가도 돼. 선장님도 지금은 들어가셨고.”
“에엥? 됐어. 딱히 걔네랑 놀고 싶어 죽을 지경도 아니고. 거기 있어봤자 술이나 진탕 마시고 내일 술병 나서 고생하겠지.”
도멤은 그렇게 대답하더니 제 접시의 샐러드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키이엘로를 보고 포크로 삿대질하듯 가리키며 말했다.
“선장님이 나한테 너 혼자 있으니까 챙겨달라고 한 건 맞아.”
그 말에 키이엘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그가 더 삽질하고 들어가기 전에 도멤이 빠르게 마저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난 걔네랑 있는 거보다 너랑 로트랑 같이 있는 게 더 마음 편하더라.”
그 말엔 나까지 의외라는 얼굴로 도멤을 볼 수밖에 없었다. 빈말로도 내가 도멤에게 크게 친밀감을 표하거나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 할 수 없는데도 도멤이 나를 더 우선으로 두고 있다는 것은 놀라웠다.
키이엘로는 눈을 깜빡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접시 위의 그릇을 깨작였다.
그건 나도 그런 것 같아. 키이엘로가 꽤 멋쩍게 말했다. 그러자 도멤이 매몰차게 말했다. 너 우리랑 텐 말곤 친구 없잖아. 그 말에 키이엘로는 입을 꾹 다물고 포크로 접시를 한 번 챙 치는 것으로 도멤에게 불만을 표했지만 그뿐이었다.
도멤은 그저 낄낄 웃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키이엘로 네가 나랑 로트랑 있는 걸 싫어하진 않아서 다행이지. 난 옛날에 네가 왜……. 어렸을 때부터 늑대한테 큰 늑대소년 같은 건 아닐까 생각했었다니까.”
『맞는 말이야. 인간은 인간과도 잘 지내야지.』
텐의 목소리였다. 나는 내심 놀라서 텐을 흘끔 보았다. 늑대가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던 탓이다. 키이엘로는 도멤의 말에도 텐의 말에도 어색하지 않을만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가…….
도멤은 텐이 뭐라고 했는지는 알지도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로트, 키이엘로가 몇 년 전에 어땠는지 알아? 내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음에도 도멤은 옛 기억을 떠올리는 듯 허공을 잠시 보다가 웃었다.
“내가 열네 살일 때 배에 몰래 올라탄 적이 있었거든.”
“아까는 열일곱 때 배에 올랐다며.”
“정식적으로 배에 오른 거고. 열네 살 때 몰래 올라탔다는 말이야. 그때 키이엘로를 만났거든.”
벌써 팔 년 전이네. 도멤이 열네 살이었을 때라면 내가 열두 살, 키이엘로가 열세 살일 때다. 키이엘로는 딱히 옛날이야기가 나와도 별생각은 없는지 텐에게 접시에 있던 고기를 주고 있었다.
도멤이 뭔가 떠올렸는지 표정이 좀 안 좋아졌지만, 이내 그런 기색을 지우고 웃었다.
“그때 키이엘로 완전 무서웠어. 지금이야 사람한테 서툰 성격을 알지만, 그땐 초면이어서. 그때 우리 배에서 어지러운 전투가 한창이었거든. 근데 거기에 어리고 약한 내가 있었던 거야. 어떤 해적이 날 공격하려는데 키이엘로를 등에 태운 텐이 멋지게 뛰어들어서 그 해적 머리통을 아작내 버렸지.”
그 말에 그때의 느낌이 생각나기라도 한 듯 텐이 입맛을 쩝 다시며 고기를 물었다. 상당히 실감 나는 말투에 나도 모르게 도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는데, 도멤이 목소리를 깔고는 말했다.
“어느 정도 전투가 끝나고, 키이엘로도 이런저런 일이 있은 다음에……. 우리 섬에서 내가 키이엘로를 찾아갔단 말이야. 고맙다고 라도 말하려고! 그런데 얘가 나한테 반응도 안 하고, 어쩌다 건들면 물 닿은 고양이처럼 신경질을 부리고…….”
나는 힐끔 키이엘로를 보았다. 키이엘로는 묵묵히 접시를 비우며 그런 때도 있었지, 하는 얼굴이었다, 사실 도멤이 뭔 말을 하든지 별생각 없는 것 같았다. 키이엘로 녀석, 사춘기를…… 거칠게 보냈나?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계속 시답잖은 이야기가 흘러나오니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런 애한테 끈질기게 달라붙은 너도 참 너다. 내 말에 도멤은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그건 그렇지. 그래도 그래서 키이엘로가 나쁜 녀석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으니까 괜찮아.”
도멤의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도멤은 키이엘로가 나쁜 녀석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는 이야길 하며 나에게 키이엘로를 알려주고 있었지만, 나는 역으로 도멤이 상당히 괜찮은 녀석이라는 걸 알게 된 기분이었다.
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훈제 연어를 입에 넣었다. 내 사정이 나았다면, 적어도 내가 남자였다면 지금쯤 이 녀석들과 친하게 지낼 마음이 가득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사실 키이엘로와 도멤은 내가 여자든 남자든 이종족이든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희미한 믿음은 있었다. 하지만…….
그때 도멤이 화제를 바꿨다.
“그러고 보니 우리 항로가 바뀌었잖아. 그래서 정보원에게 기다려 달라고 전서구를 날렸는데 답이 없나 봐.”
“설마 이번에도…….”
키이엘로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도멤도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느새 비운 접시를 내려놓고 술잔을 쥐었다.
“또 모르지. 섣부른 판단은 이르잖아.”
“그래서 다음 정박은 언제인데?”
내 물음에 도멤이 고개를 까딱였다. 내가 누구야, 다 들어왔지. 그러나 도멤보다 한발 빨리 발카가 말했다.
『오늘 새벽쯤에.』
“다행히 바꾼 항로 근처에 섬이 있어. 곧 정박한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키이엘로가 발카를 힐끔 봤다가 도멤에게 물었다. 무슨 섬인데? 그러자 도멤이 코를 훌쩍이며 산호섬, 하고 대꾸했다. 키이엘로의 얼굴이 금세 느긋해졌다. 사람이 살진 않는 곳이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이 꽤 흘러, 왁자지껄하던 선원들의 수도 줄어있었다. 나는 키이엘로가 음식을 더 가져오며 챙겨온 내 몫의 술잔을 기울이며 밤바다를 보았다. 어떻게든 이야기를 이어가다가도 대화가 끊기는 때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우리 셋은 침묵도 그다지 개의치 않아 했다. 서로가 한 발짝 물러나 배려해주는 기분이었다. 다소 서로에 대한 거리감이 상기되는 순간이기는 했으나, 적어도 우리에게는 이 정도의 거리가 필요했다.
산호섬 얘기가 나온 김에 디겔에게서 해도와 지도를 얻어온 도멤이 그동안 검은바다가 어디를 가보았는지 포크로 가리키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꽤 즐거운 이야기였지만, 가끔 만났다는 바다 괴물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뒷골이 선뜩해졌다. 나는 무기를 꽤 다루는 편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대인 기술에 치중되어 있었다. 괴물 같은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가 그때 싸울 수는 있나 고민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걱정을 읽은 듯 키이엘로가 검은바다의 전력을 얘기해줬지만 그다지 가늠이 되진 않았다. 다들 싸우기 바쁜 때에 내가 위험하다고 지켜줄 사람이 있을 리도 없고. 게다가 애초에 나는 누군가에게 도와달라며 덜덜 떨고 있을 성격은 아니었다.
그래도 전력 중에서 손에 꼽는 수준이 높은 이들 중 도멤의 이름이 있는 것은 의외였다.
물론 키이엘로는 단연코 한 손에 꼽는다고 했다. 도멤이 키이엘로에겐 괴력이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게 어느 수준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밤이 깊어지자 식사도 한참 전에 끝난 우리는 술을 마시며 대화를 했다.
도멤은 하품하면서도 키이엘로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텐을 보며 부럽단 눈을 했다.
“난 어쩌면 열네 살 때 텐에게 구해지면서 계속 희망을 갖게 된 걸지도 몰라.”
“무슨 희망?”
“동물과 소통하는……. 전에도 말했잖아, 난 동물들과 교감하는 게 꿈이라고!”
그랬나? 나는 심드렁하게 술잔을 기울이다 하늘을 보았다. 갑판 위로 허리를 숙인 밤하늘이 금방이라도 별을 쏟아낼 듯 가까웠다. 흐릿하게 올라온 취기가 별 가루가 실려 온 바람에 쓸려갔다.
그때 바다 수평선 근처에서 희미한 빛무리가 보였다. 나는 미간을 좁히고 몸을 조금 일으켰다. 키이엘로가 의아한 얼굴로 왜 그래, 하고 물었다.
나는 그에 대답하지 않은 채 난간을 잡고 몸을 조금 더 앞으로 뺐다. 수평선 한 군데에서 마치 달빛이 바다에서 나오는 것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그걸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한 군데가 빛나는데.”
“엥?”
도멤이 나를 따라서 미간을 좁히고 수평선을 물끄러미 보았다. 모르겠는데. 그러나 잠시 후, 좀 더 빛이 가까워지자 도멤이 눈을 반짝 떴다. 저기가 산호섬이야! 눈에 보일 만큼 가까이 왔구나!
그러더니 나를 보며 감탄했다.
“이야…. 로트, 매의 눈이다, 매의 눈.”
나는 눈을 굴리고는 빛나는 섬을 보았다. 한눈에 모든 섬의 지면이 보일 정도로 작은 섬이었다. 바위 같은 것을 빼면 빛나는 백사장만 있는 것 같았지만, 멀었기 때문에 확실하진 않았다. 때마침 디겔이 그것을 보았는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품에서 망원경을 꺼내 이리저리 살피던 그가 잠시 멈칫하더니 손을 내렸다. 우리 셋이 의아하게 디겔을 보고 있는데,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게 뭐야?”
“왜 그래요?”
“……다른 배가 이미 정박한 모양인데.”
도멤의 물음에 돌아온 대꾸는 의외였다. 그러자 도멤이 얼른 말했다. 로트가 눈이 좋아요. 그 말을 듣고 디겔은 대뜸 내게 망원경을 내밀었다.
“살펴봐라. 나는 눈이 침침하니까.”
나는 어색하게 망원경을 받아들고 섬을 비춰봤다. 섬은 역시 한 바퀴 도는데 두세 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은 작은 섬이었고, 바위 외에는 큰 언덕이나 깊은 숲 따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얀 백사장의 아래에서 산호가 간간이 솟아올라 있었고, 산호는 빛을 뿜어내고 있어 백사장이 하얗게 빛나는 것 같았다. 환초
1)
에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섬인 듯했다. 그 주변의 바다도 빛나는 산호에 의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과연, 산호섬이라고 이름 붙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달리 붙일 이름도 마땅히 없어 보였다.
산호섬을 살피고 있는 내 눈에 디겔이 언급한 커다란 배가 발견된 것은 그때였다. 큰 갤리어스 선
2)
이 섬 한쪽에 아예 앉아 있었다. 선체는 이곳저곳 구멍이 나 있었고, 난간도 곳곳이 무너져 있었다.
돛은 길게 찢어져 제구실하지 못할 성싶었다. 무엇보다도 메인마스트 외의 마스트들이 모조리 꺾여있었다.
어린애가 작은 배 모형을 무참히 꺾어놓은 것 같이 보일 정도여서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유일하게 꺾이지 않은 메인마스트의 가장 위에는 찢어졌으나 선명하게 알아볼 수 있는 졸리 로저가 있었다.
나는 얼굴을 굳힌 채 망원경을 홱 내리고 말했다.
“해적선이에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