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43)
바다새와 늑대 (142)화(143/347)
#142화
불, 불씨, 불꽃, 화염.
그것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 같다가도
결국엔 누군가를 따스하게 끌어안는다.
끝내 재개비가 되어 세상 곳곳으로 흩어진다.
그러니 우리는 가까운 불을 겁내지 않노라.
그 무엇도 겁내지 않노라.
불과 풀과 물과 바람과
그 모든 자연에
기도하며
어머니 대지에게 감사를!
* * *
키이엘로는 제 팔을 살라 먹을 듯 타오르던 열기가 사라진 것을 느꼈다. 그는 그것에 불현듯이 한기를 느꼈다. 식은땀을 흘리던 와중이라 내심 불에 따뜻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러나 웃기게도, 키이엘로는 불을 내뿜을 때마다 내장이 전부 뒤집히고 뼈가 쇳물처럼 녹아 온몸을 태우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곤 했다. 그는 고개를 드는 동시에 파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로트였다.
……로트? 키이엘로가 중얼거리자 로트가 그래, 하고 대꾸했다. 키이엘로는 고통에 흐물텅 일그러지는 시야 틈으로 로트의 손과 팔뚝이 붉게 달아오른 것을 보았다. 그로 인해 화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깨닫자 그는 일순 누가 칼로 자신을 찌른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그러나 키이엘로가 무슨 생각이든 로트렐리는 금방 뒤를 돌아보았다. 페데르를 향해 던졌던 폭발 통은 제대로 터졌으나, 그 앞을 가로막은 헤로이핀이 우뚝 서 있었다. 로트는 이를 갈며 거구의 사내를 보았다.
아무리 헤로이핀이어도 폭발을 코앞에서 마주한 것을 피하지는 못했는지, 얼굴을 비롯한 상완이 온통 새까맣게 변해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불에 탄 건지 그저 탄 화약을 뒤집어써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딱 하나 명료한 것은 헤로이핀 덕에 페데르가 폭발을 피할 수 있었고, 멀쩡하다는 것이었다.
헤로이핀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쩌렁쩌렁 고함을 내질렀다. 귀가 찡하고 울릴 정도로 커다란 소리였다. 귀를 틀어막은 로트는 혀를 차며 키이엘로의 왼팔을 잡아 일으켰다. 키이엘로가 그 손길에 휘청이며 일어났다.
“너 괜찮아?”
“난 걱정 마.”
로트렐리는 키이엘로의 희미한 대꾸에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빠르게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딱히 걱정이 필요 없는 몰골은 아니었다. 그래서 키이엘로가 무어라 하든 로트렐리는 그를 걱정하기로 마음먹었다.
로트는 키이엘로의 앞에 버티고 서서 헤로이핀과 페데르를 노려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페데르가 흉흉하게 눈을 빛냈다.
“너! 그래, 너구나!”
로트렐리는 말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로트렐리는 알고 있었다. 원군이 별로 없다. 검은바다는 그들 나름대로 배에서 전투하고 있었고, 유격대는 수가 적어 어차피 열세였다. 키이엘로는 부상 때문인지 통 정신을 못 차리니 절대적으로 로트렐리가 불리했다.
하지만 로트는 동시에 생각했다. 그딴 건 무시하지, 뭐. 끽해야 뒤지기밖에 더 하겠어? 로트는 검을 든 상태로 페데르를 마주했다.
그러자 소리를 지르는 헤로이핀을 뒤로하고 페데르가 휘적휘적 앞으로 나와 말했다.
“바다새는 데려왔나? 응? 네가 인질을 빼돌렸나? 이거 유감이야, 서로 대화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미 내게 피해를 줘놓고 ‘대화’? 웃기지도 않은 소리.”
“이봐……. 잘 생각하라고. 지금 저 검은 배와 싸우는 건 너 때문이 아니었어. 애초에 저 녀석들이 우리와 악연인 거지. 나는 너와는 따로 대화의 자리를 마련할 생각이 만만이라고.”
키이엘로는 웅웅 울리는 머리로도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요컨대 검은바다와 로트렐리는 별개의 문제로 다루겠다는 뜻이었다. 굳이 그들과 손잡고 싸울 필요가 없다는 말은 일견 솔깃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키이엘로의 생각과는 달리 로트렐리는 싸늘했다.
로트렐리의 푸른 눈이 파도처럼 빛났다.
“필요 없어. 이미 내 동생은 되찾았고, 난 바다새를 넘길 생각이 없으니까.”
“워, 워! 으하하, 정말이야? 진심이냐고!”
페데르가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러는 동시에 그는 로트의 뒤쪽에 서 있는 키이엘로를 훑어보고 로트의 상태도 살펴보고 있었다. 경우의 수를 가늠하며 번들거리는 까만 눈을 웃음에 파묻은 페데르는 낄낄거리며 빈정댔다.
“왜 그렇게 날카로워, 이 아가씨야. 바다새만 넘기면 우린 너와 네 동생에겐 손도 안 댈 텐데. 오, 그렇지, 아니면 아예 우리 배에서 으리으리하게 대접해줄까? 응? 해적들 사이에서 공주 노릇이라도 해볼 생각 있나?”
그러나 페데르의 사탕발림은 로트렐리에겐 모욕이었다. 로트는 날카로운 눈을 새파랗게 치뜨며 검을 추어올렸다.
“시답잖은 소리 마시지. 왜 이리 말이 길지? 쫄리나 봐?”
“…….”
로트렐리의 말에 페데르가 짝짝거리더니 코를 훌쩍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페데르가 입속으로 웅얼거리자 데인 살을 어쩔 줄 몰라 하던 헤로이핀이 가만히 섰다.
로트렐리의 다리에 느리게 긴장이 스몄다. 키이엘로 역시 이를 악물고 정신을 붙들며 검은바다 쪽을 보았다. 그들은 열심히 싸우고 있었으나 로트의 생각처럼 곧 열세에 몰릴 형국이었다. 키이엘로 역시 그것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그때 페데르가 들으란 듯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말했다.
“요즘 애들은 왜 이리 어른의 말을 안 듣나 몰라……. 웃어른 말을 안 들어서 좋을 건 없어, 알고 있나?”
페데르는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히죽 웃었다. 형형하게 드러난 이가 마치 백상아리의 이빨과 같이 위협적이었다.
“내가 널 봐줘서 이런 말을 하는 거란 것을 몰랐더냐? 응? 이 배에 쥐새끼가 숨어들었단 것은 진작 알았다. 크게 타격이 없으니 가만둔 것이었지. 그리고 지금 보니…….”
느리게 말끝을 끄는 소리에 로트렐리는 오한이 거미처럼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키이엘로가 로트의 옆에 서며 헤로이핀을 응시했다.
긴장한 둘을 포위하듯 둘러싼 해적들을 향해 고갯짓한 페데르는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조소했다. 해적들은 로트와 키이엘로를 공격하는 대신 가만히 그들을 포위하고 있거나 몇 명은 어디론가 뛰어갔다.
로트렐리가 그 의미를 알아채고 얼굴을 굳혔다.
“네가 저 난리 통인 배에서 여기까지 도약했을 리는 없고. 그래, 그렇지? 네가 여기 있듯 네 동생도, 바다새도…….”
여기 남아있는 게 아니냐? 어금니를 꽉 물었는지 로트렐리의 턱이 느리게 비틀렸다. 페데르가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헤로이핀이 갑자기 뛰어들었다.
거구의 사내를 응시하고 있던 키이엘로가 곧바로 뛰어들며 로트의 앞을 가로막았으나 헤로이핀은 그들은 신경 쓰지 않고 지나쳐 뒤로 달려 나갔다. 그에 둘이 얼빠진 얼굴을 하는 때였다.
내기하지. 돌연 페데르가 말했다.
“내 목이 네 그 깜찍한 검에 베이는 게 먼저일지, 네 동생 머리가 저 친구에게 잡혀 터지는 게 먼저일지 궁금하지 않나? 물론, 네가 바다새를 넘긴다면 네 동생은 멀쩡할 수 있어.”
“닥쳐.”
로트렐리는 사납게 내뱉으며 눈을 굴려 헤로이핀이 달려간 방향을 보았다. 선미 쪽에서 클레인스가 이쪽의 상황을 살피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알아서 해줄 것이다…….
페데르가 검을 뽑아 들었다. 클루스도와 디겔을 동시에 상대하며 박빙을 이뤘던 자다. 로트렐리는 검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손아귀에 땀이 나 미끄러질 것만 같았다.
키이엘로는 헤로이핀을 쫓는 대신 로트렐리의 표정을 힐끔 보았다가 이내 그 옆에 도로 자리를 잡고 섰다. 굳이 소모적으로 헤로이핀을 막으러 가는 것보다 이곳에서 전력에 보탬이 되는 것이 더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순간 페데르가 로트를 향해 쐐액 내달려왔다. 흠칫 검을 막은 로트는 뒤로 물러나며 검 하나를 마저 뽑아 쥐고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캉,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이 순간 천둥처럼 들려왔다.
페데르가 로트의 검을 쳐내는 순간 키이엘로가 그의 몸통을 노리고 발을 꽂았다. 그러나 키이엘로의 검은 부츠는 검붉은 갑판 바닥만을 부쉈다. 페데르는 아슬아슬하다고 느끼기는 했는지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칼을 휘둘렀다.
그때 칼의 궤도 빈틈을 따라 로트의 검이 파고들었다. 결국 뒤로 훌쩍 뛰어 물러난 페데르는 킬킬 웃었다.
“공경이 없는 연놈들이네. 불공평하다고는 생각 안 하나?”
로트렐리도 키이엘로도 대답하지 않았다. 키이엘로는 잠이 든 것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팔다리를 깨우기 위해 입안을 깨물고 있었고, 로트렐리는 다른 곳의 전황을 살피면서 타개책을 찾는 것처럼 때때로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페데르가 그런 그들을 보고 혀를 찼다.
“에잉, 야박하게 대답도 없긴.”
그러더니 이번엔 키이엘로를 향해 그가 달려들었다. 키이엘로가 몸을 돌려 가까스로 피하는 사이로 검을 찔러 넣어 페데르를 공격한 로트는 조바심이 솟는 것을 느꼈다. 이 개자식, 시간을 끌려는 속셈이다!
랄티아와 발카를 찾을 때까지 시간을 끌려는 것이 분명했다. 주변에 로트와 키이엘로를 둘러싼 해적들이 굳이 검은바다에서 일어나는 전투를 향하지 않는 것도, 그럼에도 당장 달려들지 않고 그들이 이 검붉은 갑판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도 모두!
차라리 키이엘로가 아까처럼 불을 쓸 수 있다면 나을지 모르겠으나, 어쩐 일인지 그는 한 번 꺼진 불을 다시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다. 로트렐리는 키이엘로의 괴력이나 불에 의지하는 것을 빠르게 포기했다.
남은 것은 선미에 남았을 이들을 믿는 것과 이 기회에 페데르를 처치하는 것뿐이었다. 페데르의 말을 상기하자면 설사 랄티아가 헤로이핀에게 잡힌대도 곧바로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랄티아를 인질 삼아 로트렐리를 위협하긴 하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들의 목표는 바다새였다. 로트는 그것을 알았다. 몇 번이고 칼날이 부딪치며 소음을 만들어냈다. 페데르가 진녹색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까만 눈을 휘었다.
“검술이 너무 판에 박힌 것 아닌가? 기사한테 배웠나?”
“……!”
한껏 비아냥댄 뒤 휘두르는 서슬에 로트가 헉, 하고 물러나는 순간 다시금 빠르게 페데르가 따라붙었다. 코앞에서 칼날을 막아낸 로트가 이를 갈자 그 틈을 타 키이엘로가 페데르를 걷어찼다. 움직일 때마다 오른팔의 통증이 무거운 추처럼 따라붙었으나 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몸을 들썩일 뿐 앓는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로트렐리는 검을 고쳐 쥐며 페데르를 노려보았다. 긴장이 지속된 팔이 옅게 떨리고 있었다. 페데르와 로트의 속도가 엇비슷했다. 교본 같은 검술의 틈을 속도로 메우는 로트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상황이 불리해요.”
선미에서 상황을 보던 클레인스가 말하자 도멤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헤로이핀이 랄티아를 노리는 것 같다는 클레인스의 의견을 들은 뒤로, 그들은 모두 무기를 꺼내 들고 랄티아를 가운데에 둔 상태였다.
솔직히 말해, 도멤은 키이엘로에게 유의미한 부상을 입힐 정도의 악력을 가진 헤로이핀을 이길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도멤은 랄티아를 보았다. 로트의 동생은 회색 눈을 단단히 굳힌 뒤 마장석 파이프를 몇 개 이어붙인 것 같은 모양새의 피스톨을 들고 발카를 끌어안고 있었다. 아직 어린 티가 나는 여자애였지만 입술을 깨물고 얼굴을 굳힌 모습은 로트와 빼닮아 있었다.
랄티아는 열여덟이랬다. 도멤은 어쩐지 숨통이 꽉 조여드는 것 같았다. 도미나가 살아있었다면 딱 그 나이였을 것이다. 도멤은 생각을 흩어내고 말했다.
“섣불리 이동할 수도 없고 당장은 로트 쪽도 도와줄 수 없어.”
상황을 보니, 거구는 가장 먼저 선내로 들어가 살펴보는 중인 것 같았다. 그 뒤를 따라 들어간 해적들 역시 선내를 뒤지고 있었지만, 그곳을 다 뒤지고 나와서는 선미까지 올 것이 분명했다.
그도 아니면 페데르와 합세해 로트와 키이엘로를 상대할 것이다.
도멤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고개를 들었다. 적어도 친구들의 짐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창을 고쳐 쥐고 말했다.
“헤로이핀 쪽을 더 살펴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