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45)
바다새와 늑대 (144)화(145/347)
#144화
페데르의 명령을 들은 헤로이핀은 랄티아의 목을 팔로 붙들더니 느긋하게 다가왔다. 클레인스가 이를 갈며 덤비려는 듯 헤로이핀에게 검을 세우자 페데르가 말했다.
“칼 조심해라, 꼬마야. 혹시라도 헤로이핀이 놀라서 손에 힘을 줄지도 모르잖니?”
그에 클레인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로트.”
키이엘로는 찔린 자리를 감싸 쥔 로트렐리를 급히 살피며 페데르와 주변의 해적들을 경계했다. 그러나 이미 지친 것 같은 키이엘로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은 페데르는 헤로이핀을 옆에 세우고 보란 듯 턱짓했다.
그때 랄티아가 끌어안고 있던 발카를 놔주며 속삭였다.
“발카, 내 말을 들어줘……. 잡히지 않게 도망가, 어서.”
『뭐라고?』
발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랄티아를 보았으나 랄티아는 발카의 말을 듣지 못했다. 어서……. 랄티아가 속닥이다가 헤로이핀이 목을 죈 팔뚝에 힘을 주자 윽, 하며 입을 다물었다. 페데르가 말했다.
“바다새는 어디에 있지?”
그 순간 발카는 랄티아가 자신에게 도망가라고 한 이유를 알았다. 하지만 로트의 새이자 등불인 자신이 랄티아의 말을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정작 로트렐리는…….
로트의 파란 눈동자는 페데르를 노려보고 있었다. 발카는 로트와 대치한 상태로 페데르와 헤로이핀에게 붙들린 랄티아의 품을 붙잡고 매달렸다.
까만 코트의 안으로 몸을 숨기며 발카는 로트렐리를 보기 위해 안간힘 썼다. 그사이 해적들이 붉은 파도 위로 솟은 암초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검은바다의 일행들을 둘러 감싸기 시작했다. 키이엘로의 눈이 다급하게 로트와 찔린 부상에서 흐르는 피를 번갈아 가며 헤맸다.
로트는 페데르의 까만 눈을 뚫어버릴 것처럼 직시하며 코트를 찢어내 울컥 피가 솟는 허리춤을 묶었다. 로트렐리의 얼굴이 새하얗게 굳은 암염처럼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새파란 눈빛이 랄티아를 훑었다.
그러다가 입술을 꾹 깨문 로트렐리가 돌연 크게 외쳤다.
“발카, 멀리로 도망가!”
말이 떨어지자 곧장 랄티아의 품에서 발카가 혜성처럼 날아올랐다. 페데르가 욕설을 지껄이며 발카의 꼬랑지를 눈으로 좇았다. 그 틈에 로트는 검을 쥐고 그에게 달려들었으나, 페데르의 재빠른 방어에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만 들어야 했다.
검날 사이로 페데르가 얼굴을 분노로 물들이며 흉흉하게 이를 드러냈다.
“이…… 약삭빠른 년, 네 동생이 죽는 것도 두렵지 않더냐!”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로트의 목소리가 깊은 심해에서 떠오른 빙하처럼 낮게 울렸다. 키이엘로는 몸을 짓누르는 피로와 찌르는 듯 지끈거리는 머리와 오른팔의 통증 사이로 그 목소리를 들었다. 마치 꺼져가던 잿더미에 바람을 불어넣은 것처럼 그는 늘어지던 몸에 다시금 힘을 주었다.
랄티아는 헤로이핀의 팔뚝에 붙들려 숨통이 틀어 막힌 와중에도 로트렐리를 바라보았다. 랄티아가 붙잡히고 유격대와 키이엘로가 열세에 처했음을 깨달은 우투그루가 검은바다에서 외치고 있었다.
우홉피아주로 넘어간다! 키이엘로는 그 소리를 멀거니 들으며 페데르와 헤로이핀의 뒤에서 해적들에게 포위된 유격대를 보았다. 그리고 도멤과 눈이 마주쳤다.
키이엘로는 일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마치 졸음이 몰려오던 와중 누군가 회초리로 자신을 후려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작은 불씨가 갑자기 집채만큼 커져 타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키이엘로는 예전에 자신이 했던 생각을 다시금 상기했다.
만약 어떤 상황에서, 정말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 상황을 피할 도멤이나 주어진 상황에 빠르게 적응하는 키이엘로와 달리, 로트렐리는 판을 뒤엎어 버릴 사람이었다.
그래서 도멤과 키이엘로는 그 순간 로트렐리가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로트렐리의 검을 밀쳐낸 페데르가 짐짓 태연하게, 그러나 사납게 그녀를 향해 내뱉었다.
“뭐가 웃기는 소리지? 네가 반항하면 네 동생은 죽는다! 잘 생각하고 선택하는 게 좋을 거야.”
“잘 선택하라고?”
로트의 눈이 파란 번개처럼 번뜩였다. 발카는 이번에도 로트의 말을 모두 따르지 않았다. 바다새는 드높은 하늘에서 맴돌며 피신해있었지만,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 로트렐리는 그것에 화가 나다가도 모든 것이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트렐리는 불현듯 자신이 다시 한번 선택의 기로에 섰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런들 어떻단 말인가? 저 망할 해적 선장이 말하는 선택이란 것에 진정으로 나만의 의지가 들어갈 수 있겠는가? 랄티아를 인질로 잡고, 나의 능력과 미래를 빼앗으려는 작자에게 내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달리 있겠는가?
그래서 로트렐리는 그 순간 무한한 자유와, 박탈감에서 오는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이 판은 무효야. 아주 뒤집어 버려야겠어.
그것이 설사 모든 것을 내던지는 것이더라도 말이다. 항상 삶을 수탈당하며 살아온 로트렐리는 섬에서 추방되는 순간부터 더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었다. 그녀 자신과 랄티아마저도 되찾아야 할 것이었지 손에 넣은 것이 아니었다.
진정한 의미로 로트렐리는 빈털터리였기에, 그래서 벼랑 끝까지 몰렸을 때 파도를 향해 뛰어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랄티아는 로트렐리의 빛나는 파란 눈을 보았다. 분노로 몰아치는 눈이 거대한 파도처럼 번뜩였다.
그 순간 키이엘로는 이를 악물고 해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희미한 불씨에 바람을 분 듯 그의 손아귀에서 다시금 불이 터져나왔다. 그러자 도멤도 자신들을 둘러싼 우홉피아주를 창대로 후려갈겼다.
페데르가 그들을 보며 이를 갈고는 우홉피아주로 넘어오는 검은바다의 해적들도 일별했다. 그 순간 로트렐리가 페데르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캉, 하고 검날이 막히자 그것을 쳐내거나 거리를 벌려낼 틈도 없이 로트는 다른 검으로 페데르를 내리쳤다. 페데르가 급하게 날을 피했지만, 완전히 회피하지 못하고 그의 얼굴에 죽 핏빛 실금이 생겨났다.
검붉은 바닥으로 페데르의 치렁치렁한 녹색 머리카락이 몇 줄기 후드득 떨어졌다. 페데르는 급하게 헤로이핀을 보았지만 랄티아를 붙잡고 있는 거구를 불러내 인질을 자유롭게 해줄 수는 없었다.
그때 우투그루를 비롯해 검은바다의 해적들이 우홉피아주로 올라와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검은바다에서는 디겔과 클루스도가 산하 해적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페데르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로트를 보고 이를 갈았다. 기껏 이들을 제압할 기회를 잡았는데 도루묵이 될지도 모른다. 다시금 둘이 맞부딪치며 칼날에서 소음이 일었다. 페데르가 음울하게 뜨인 눈으로 로트렐리를 응시했다.
“그래, 너 같은 계집들의 착각이 있지. 자기가 배에 탔다 하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페데르의 말에도 로트렐리는 다른 검날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페데르가 로트에게 발길질을 했다. 갈빗대를 얻어맞은 로트가 윽, 하며 갑판을 굴렀다. 쿨럭이며 토해내는 기침에 다시금 입가가 핏물로 젖어 들었다.
이제 인질도 되찾았으니 시간을 더 끌면 역으로 우홉피아주가 불리해진다. 빠르게 주변을 살핀 페데르가 야차처럼 짓씹었다.
“넌 바다새가 없었다면 아무 가치도 없는 년이야! 설치지 말고 항복해!”
“왜 죽이질 않고 내가 굴복하길 바라지? 내가 죽으면 바다새가 사라지기 때문인가?”
그 말에 메인마스트의 위에서 허공을 날던 발카가 움찔하며 로트렐리를 내려다보았다. 로트렐리는 이를 갈며 고개를 들었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시퍼런 눈이 빛났다.
로트렐리는 주먹을 꽉 쥐고는 휘청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페데르는 그녀가 일어나자마자 가소롭다는 듯이 다시 발로 걷어찼다. 헉, 하며 로트렐리가 다시 넘어지자 그가 큰 소리로 웃어댔다.
“버러지 같은 네 꼴 좀 봐라! 당장 항복해, 그러지 않으면 정말로 네 동생을…….”
“닥쳐!”
페데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트렐리는 거세게 외치며 주먹을 날렸다. 정통으로 먹힌 주먹에 페데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가 욕을 짓씹으며 발길질을 했으나 용케 피한 로트렐리가 빠른 몸놀림으로 옆에 떨어져 있던 검을 잡았다.
그 순간 그녀의 목을 다른 해적이 등 뒤에서 팔로 옥죄었다. 그 틈에 페데르가 한 번 더 로트렐리의 갈빗대를 걷어찼다. 고통에 움츠리는 순간 놓친 검이 바닥을 뒹굴었다.
도멤은 붙잡힌 로트를 보고 그녀를 부르며 날붙이를 휘둘렀다. 그러나 선내에서 포를 쏘던 이들까지 합세해 올라온 해적들 탓에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랄티아는 그런 자신의 언니를 보며 헤로이핀의 손아귀에서 발버둥 쳤다. 헤로이핀의 팔뚝을 이로 물기도 했으나 거구의 사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결국 랄티아는 피스톨을 손에 쥐고 헤로이핀을 노려보았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든 로트렐리는 신경도 쓰지 않고 해적을 떨쳐내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그런 로트를 보며 페데르는 혀를 찼다.
“이봐, 연약한 아가씨. 괜히 힘 빼지 말자고. 용기는 가상하지만 계속 그렇게 앙칼지게 굴면 죽을 때도 편히 죽지는 못해.”
“앙칼지다고? 연약한, 뭐?”
목이 졸리는 소리로 로트렐리가 야멸차게 비웃고는 페데르를 향해 침을 뱉었다. 들들 끓는 것 같은 파란 눈이 번뜩였다. 벼락이 내리꽂히는 바다 같은 눈동자가 눈앞의 적을 노려보았다.
“웃기지 마. 누가 누구보고 약하다고 하는 거야? 네가? 날 보고?”
하! 그녀가 히스테릭하게 들릴 정도로 크게 외치자 로트렐리의 목을 조르던 해적이 그 등을 무릎으로 짓누르고는 바닥에 꿇렸다. 짓눌리는 압박에 다시금 피가 흘러나오는 고통을 느낀 로트의 얼굴이 시시각각 하얗게 질려갔다.
그러나 그녀의 기세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압력이 그녀에게는 원동력이 되는 것처럼, 오히려 익숙했던 압력이었던 것처럼 눈은 새파랗고 형형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강해.”
짧게 내뱉은 로트렐리가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내 모든 삶이 좌절이었고 또 도전이었다.”
“헛소리……. 네 넋두리 들어줄 시간은 없어. 바다새를 데려와!”
“잘 들어! 네 놈의 썩어 빠진 귀가 마지막으로 듣게 될 가장 떳떳한 외침이 될 거니까!”
로트렐리의 목소리가 갈라져 갔다. 입을 다물게 하려는 듯 뒤에서 해적이 계속해 그녀의 목을 팔로 조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페데르를 정확하게 쏘아보았다.
로트렐리의 눈이 섬광이 번뜩이는 푸른 번개처럼 빛났다.
“나는 나를 부정하는 모든 것들에 맞서왔어. 결심한 후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왔고, 누가 나를 진창에 박아도 다시 일어나 싸워왔어! 그런데 너 따위가 나를 약하다고 말해?”
“배려를 해줘도 한사코 의미 없는 짓을 하는군. 비참하게 찢겨 죽고 싶은 게 아니면 닥쳐라!”
페데르가 고함을 쳤다. 그는 슬슬 평정과 교양을 가장할 여유도 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로트렐리는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의미 없는 건 너야. 그러니 바다새도 널 택하지 않은 거야! 바다새가 있기에 가치 있는 게 아니라 그만한 가치가 있었기에 바다새가 온 거야! 그런데 네게 바다새를 넘기라고? 헛소리!”
“바다새만 떼어내면 넌 창굴에 던져버릴 줄 알아라.”
“그딴 걸 협박이라고 하는 거냐? 던져봐, 내가 다시 나와서 네 모가지 하나 못 자를까!”
진심으로 우습다는 듯 크게 웃으며 말하자 페데르가 더는 화를 참지 못하고 검을 잡아들었다. 그 순간 로트렐리가 제 목을 조르고 있던 해적의 팔을 물어뜯었다. 살점이 거의 뜯어질 정도로 물린 해적이 꽥 비명을 지르며 후다닥 팔을 떼어냈다.
바로 그때 페데르가 로트렐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캉! 불씨가 튀는 것과 함께 쇠가 맞닿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뒤에서 제압하던 해적의 허리춤에서 검을 꺼내든 로트렐리는 커다랗게 뜨인 페데르의 눈을 보며 먹이를 낚아챈 날짐승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덜 뽑힌 검을 뽑아내며 페데르를 쳐낸 그녀가 검을 휘둘러 뒤의 해적을 베어 넘겼다. 로트렐리의 이마에서는 이미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결국 페데르가 고함을 지르려 입을 열었다.
“헤로이핀! 당장 그 계집을―”
쾅! 찰나에 살점이 비산했다. 포탄을 쏘는 소리와 닮았지만, 그보다 날카로운 파열음이었다. 번개처럼 번뜩이는 흰빛이 헤로이핀의 머리를 꿰뚫고 터뜨렸다.
머리가 사라진 커다란 몸체가 비틀거리더니 이내 뒤로 넘어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우홉피아주의 갑판이 울렸다.
죽음 같은 정적이 우홉피아주 해적들을 뒤덮었다. 페데르는 자신이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랄티아를 바라보았다. 흰빛을 뿜어냈던 피스톨을 움켜쥔 소녀가 눈물이 잔뜩 맺힌 회색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랄티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피스톨의 총열 뒷부분을 딸깍 열어 푸르스름한 빛의 돌조각을 갑판 위로 내던졌다.
마장석이었다.
“이, 이게 무슨……, 헤로이핀이…….”
말을 더듬거리는 페데르에게로 신랄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왜 그렇게 놀라시나.”
로트렐리였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페데르를 보며 유쾌하다는 듯 웃었다.
“소서러는 처음 보나 보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