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46)
바다새와 늑대 (145)화(146/347)
#145화
페데르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이내 분통에 찬 고함을 지르며 로트렐리를 돌아보았다. 로트렐리는 식은땀을 흘리는 와중에도 그를 노려보며 호전적으로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새하얗게 질린 안색과 다르게 눈만은 마치 높은 곳에서 피식자를 노려보는 매처럼 빛나고 있었다. 시퍼렇게 얼어붙은 바다를 보는 것 같았고, 태풍이 몰아치는 성난 파도를 보는 것 같았다.
이제야 결심이 선다. 언제나 그랬듯 로트렐리는 벽에 부딪히는 순간 누구보다도 강해졌다. 자신이 가진 것이 없어 잃을 것도 없는 신세라는 것을 새삼 자각할 때마다 그랬다. 여태까지의 삶이 상실과 박탈뿐이었기에.
그렇기에 로트렐리는 그 순간 무엇이든지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자신이 한낱 계집애라 불리든 바다새를 가진 여자로 불리든 더는 상관하지 않았다. 자신은 로트였고, 로트렐리였고, 무어라 불리든 자신의 본질은 불변이었다.
그녀의 본질은 새벽이고 바다였으며, 타오르는 동살을 서릿발처럼 얼어붙게 하는 분노였다.
여태 자신이 항해하던 바다는 한 번도 잔잔하고 평화로운 적이 없는, 벼락이 내리고 모래폭풍처럼 몰아치는 파도가 채찍질하는 쪽빛의 사막이었고.
그래서 로트렐리는 이빨처럼 휘어진 파도 위의 분노 그 자체였다.
“다시 말해주지. 나는 약하지 않아. 너처럼 질 낮은 낙원에서 살아온 놈 따위는 나를 막지 못해.”
로트렐리는 차갑게 말하며 검을 들었다. 굴지의 기사에게 배운 검술이다. 기사의 딸은 가진 거라곤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나, 지지 않는 긍지를 물려받았다. 끈질김, 투쟁심, 근성 따위의 수많은 가치를 물려받았다.
그것을 증명하듯, 시퍼렇게 타오르는 눈동자가 새벽을 밝히는 창공처럼 빛났다.
빛이 터오는 자리에 서 있을 가치가 없는 자를 향해 새벽의 신은 가차 없이 검을 휘두르는 법이다.
전투로 뒤집어쓴 먼지도, 찔리고 베인 상처에서 흐르는 피도, 이마를 적신 식은땀도, 뺨과 얼굴에 달라붙은 까만 머리칼도 그저 파랗게 빛나는 눈 보다 돋보이진 못했다. 그녀의 검이 선뜩한 궤적을 그리며 치켜 올라갔다.
“긍지 높은 지옥으로 처박아 주마.”
페데르가 분노해 달려들었다. 로트렐리는 순식간에 손을 돌려 페데르의 공격을 받아쳤다. 내내 시시덕거리며 여유를 부리던 태도는 증발하듯 날아간 상태의 페데르는 빠르게 몰아치며 로트렐리를 공격했다.
그러나 로트렐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망망대해에서 항로를 되찾은 뱃사람처럼 거침없이 나아갔다.
랄티아는 헤로이핀의 시체를 넘어 전투를 피해 몸을 숙였다. 갖고 있던 마장석에서 낼 수 있는 최대 출력을 소비했으니 이제는 정말 아무런 무기도 없는 셈이었다. 퍽 위태롭고 절망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랄티아는 어쩐지 가슴이 터질 것처럼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때서야 랄티아는 옅게 깨달았다. 자신은 로트렐리의 모습이 너무 그리웠다. 어두운 밤에 홀로 있는 별을 거울처럼 비추는 바다 같은 언니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여전히 로트렐리는 긍지 높고 올곧은 사람이며 위기에 휘청대고 파도칠지언정 결코 변하지 않는 바다 그대로였다. 그 무엇도 로트렐리의 본질을 바꿔놓지 못했다.
그것이 기이할 만큼 랄티아에게 기쁨과 환희를 불러왔다. 변치 않는 본질, 그리고 바다를 닮은 그녀…….
그때 랄티아를 향해 클레인스가 뛰어왔다. 주홍색 머리의 소년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랄티아를 보다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아, 아까 거, 다시 할 수 있어요?”
“마장석이 떨어져서 안 돼요.”
“여기 있어요.”
랄티아의 말에 클레인스가 급하게 주머니를 뒤적여 마장석 몇 조각을 꺼내 건넸다. 랄티아가 눈을 휘둥그레 뜨자 클레인스가 말했다.
“저, 함저 구역에서 일하거든요.”
랄티아는 클레인스를 잠시 응시했다. 능소화 같은 색깔의 머리칼 사이로 은색 눈동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랄티아는 그의 손에서 마장석을 건네받고 하나는 피스톨에 넣고 나머지는 여전히 걸치고 있는 도멤의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랄티아의 팔을 잡아 일으켜준 클레인스가 말했다.
“제가 엄호할 테니까 손 좀 보태주세요.”
랄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클레인스는 다시 전투에 뛰어들어 주변의 해적들을 베었다. 우홉피아주의 갑판 위는 이미 난전이었다. 검은바다의 선원들이 우홉피아주로 뛰어들었고, 우홉피아주는 우세인 머릿수로 그들을 몰아붙였다.
그때, 검을 피해 뒷걸음질 치는 페데르의 옆구리를 로트렐리의 칼날이 하나 더 날아들어 할퀴었다.
빈틈이 가장 많이 느껴지는 이유는 몸을 사리기 위해 달아나기 때문이다. 저돌적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한 로트렐리의 공격을 피하는 쪽이 되자 페데르는 검의 흐름을 놓치고 있었다.
신음을 내뱉은 페데르가 검이 베고 지나간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뒤로 물러나자 키이엘로의 발이 날아들었다. 아슬아슬하게 고개를 틀어 피한 페데르는 오한이 드는 것을 느꼈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경종을 울렸다. 수십 년을 바다 위에서 보낸 해적은 직감이 매우 뛰어난 법이다.
헤로이핀이라는 거대한 전력이 죽었다. 그러나 검은바다의 최대 전력인 키이엘로는 지독하게 지쳤다고 해도 아직 싸울 수 있었다. 손끝에서 불씨를 피워내는 괴물은 이미 우홉피아주의 곳곳에 불을 피운 뒤였다. 만약 피하지 못하고 맞았다면 페데르의 두개골에 금이 갔을 것이다.
위기감을 느낀 페데르가 그들과 거리를 벌리며 목청을 높여 외쳤다.
“후퇴한다!”
“어딜!”
그사이 맹렬하게 거리를 좁힌 도멤이 창대를 바닥에 쾅 찍어 도약했다. 머리 위를 찍어 내리는 궤도에 급하게 회피한 페데르의 뒤를 로트렐리가 놓치지 않고 쫓았다.
‘후퇴’라는 명령이 내려오자 우홉피아주는 검은바다의 해적들을 밀쳐내고 배 밖으로 내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검은바다와 붙어있던 우홉피아주의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우홉피아주의 갑판 위로 올라온 검은바다의 해적들이 많은 판에 후퇴라니! 우투그루는 코웃음을 치며 해적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검은바다와 멀어지면 좋지 않았다. 검은바다에 있던 디겔이 소리쳤다. 함저 구역에 전해라! 그때였다.
쾅! 산하 해적과 우홉피아주도 검은바다도, 심지어 랄티아의 피스톨도 아닌 다른 포탄 소리였다.
포탄에 얻어맞은 우홉피아주의 전열함이 휘청이며 흔들리고 나무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포를 제대로 맞은 것이다. 키를 잡으라고 기로그에게 소리치면서 로트렐리를 피하던 페데르가 난데없는 상황에 어벙한 얼굴을 했다.
그러다가 포탄이 날아온 방향을 보고는 부들부들 떨며 격분해 소리쳤다.
“셀리팜!”
붉은 안개를 가르고 체리목의 갤리온이 나타났다. 선수에서 난간에 발을 올린 스칼렛이 선장모 아래로 새빨간 머리칼을 휘날리며 참전을 알렸다.
조소인지 유쾌함인지 모를 웃음을 얼굴에 건 스칼렛의 옆에서 땅딸막한 메르디가 짓궂은 얼굴로 코끝을 찡긋대고 있었고, 그 뒤로 셀리팜의 해적들이 무기를 꺼내든 채 서 있었다. 스칼렛의 카랑카랑하고 기백 있는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꼬라지를 보니 우리를 빼놓고 잘들 놀고 있었나 보군, 얼간이들!”
그러더니 셀리팜의 선장은 웃음기를 지우고 소리쳤다.
“전원, 돌격하라!”
셀리팜의 해적들이 포탄을 쏘며 밧줄을 날렸다. 스칼렛과 메르디, 로지안나를 비롯해 셀리팜은 거침없이 전열함 위로 올라탔다.
메르디가 도끼를 휘두르며 해적들을 쳐내는 순간 셀리팜에서 다시금 포탄이 쏘아져 전열함의 선측을 적중시켰다. 줄다리기처럼 팽팽하게 이어지기 시작하던 전세가 셀리팜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뒤집혔다.
계속해 이어진 전투로 지친 해적들 사이를 셀리팜은 쌩쌩하게 누비며 무기를 휘둘렀다. 셀리팜과 검은바다의 해적들에게 밀리는 우홉피아주를 보며 페데르가 격분해 고함을 질러댔다.
“이 망할 것들이!”
왁왁 성을 내는 페데르의 뒤로 로트렐리가 검을 찔러왔다. 서둘러 그것을 피한 페데르는 지독하게 성가시다는 듯 로트렐리를 보며 방향을 바꿨다. 그는 검은바다를 향해 내달렸다. 우투그루가 그것을 보고 외쳤다.
“페데르가 검은바다로 간다!”
“쫓아라!”
셀리팜의 해적들이 가담해 우렁차게 외쳐댔다. 검은바다의 갑판으로 간 페데르의 앞을 클루스도와 디겔이 막아섰다. 산하 해적들이 페데르를 향해 자기들에게 오라며 소리치고 있었다.
마스트 위에서 베제의 쇠뇌가 당겨져 그들을 겨눴다. 브레딕이 검은바다에서 우투그루를 불렀다. 포탄 장전 완료! 그에 우투그루가 소리쳤다.
“발사해!”
굉음이 울리며 전열함이 휘청였다. 집중적으로 포격을 받은 우홉피아주의 배가 콰르륵 소리를 내며 나뭇조각을 뱉어냈다. 그에 비틀거리던 랄티아는 검은바다로 건너가려는 로트렐리를 다급하게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로트렐리는 빠르게 배를 넘어가 달려갔다. 거리가 있던 랄티아는 난전 속을 내달려 제 언니에게 뛰어갔다. 언니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안색도 안 좋았다!
식은땀을 비처럼 흘리면서도 칼을 다루는 모습에 랄티아는 속이 까맣게 타는 기분이었다. 저러다 로트렐리가 과다출혈로 죽기라도 한다면 어쩐단 말인가?
하지만 랄티아의 달리기 실력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갑판을 주욱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검은바다로 넘어가는 판자에 도달하기도 전에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몸을 수그리고 있었다. 그때 클레인스가 랄티아의 옆으로 따라붙어 말했다.
“로트 누나가 걱정인 거죠?”
랄티아는 말할 새도 없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클레인스 역시 어깨에 맞은 화살 탓에 안색이 창백했지만, 그는 랄티아의 말에 곧바로 그녀를 제 어깨에 짐짝처럼 얹었다.
화살을 맞았던 어깨로 올린 탓에 인상을 찡그렸지만 클레인스는 금방 그것을 참아내고 검은바다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랄티아가 놀라서 말했다.
“어깨, 어깨는 어쩌고요?”
“어차피 부상인데 어쩌겠어요. 멀쩡한 쪽을 쓰자니 위험 부담이 더 커서요.”
클레인스가 태연자약하게 말을 하는 동안 그들은 검은바다로 건너왔다. 랄티아는 자신에겐 그렇게 멀게 느껴진 거리를 순식간에 도착하자 어안이 벙벙했다. 언니 말대로 운동을 해둘 걸 그랬어…….
검은바다는 난장판이었다. 도망가는 우홉피아주와 그들을 이끌려는 산하 해적, 그리고 공격하는 검은바다와 셀리팜의 해적들로 혼전이었다. 게다가 전열함에서 우투그루가 검은바다로 귀환할 것을 명령하자 까만 배의 위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때 클레인스의 옆으로 해적이 덤벼들었다. 그것을 알아챈 클레인스가 몸을 돌리려 하는 순간 탕, 하는 소리가 울렸다. 랄티아의 피스톨이었다. 하얀빛에 가슴을 관통당한 해적이 풀썩 쓰러지자 랄티아가 말했다.
“뒤쪽은 제가 막아볼게요, 언니에게 가주세요!”
“알았어요, 그런데 그거 소리 좀 어떻게 못 하나요?”
클레인스가 먹먹한 귀를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뜻 없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것을 듣지 못한 랄티아는 눈을 굴려 자신들을 공격해오는 해적을 쏘는 동시에 로트렐리를 찾아 까만 배의 이곳저곳을 살펴댔다. 그때 디겔의 고함이 울렸다.
“클루스도!”
부상을 입었던 클루스도가 페데르의 검을 쳐내지 못하고 밀려 넘어진 것이다.
페데르가 그를 찌르려 하자 디겔의 후크가 그의 칼을 막았다. 그러나 곧장 칼날을 튼 페데르의 칼날이 클루스도를 향해 쇄도했다. 그 순간 끈질기게 그들의 뒤를 쫓아온 스칼렛의 칼이 페데르의 팔뚝을 깊게 베어내고 지나갔다.
페데르가 클루스도를 베지 못하고 훌쩍 물러나는 자리에 키이엘로의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페데르는 욕설을 내지르며 거의 구르듯 키이엘로를 피하고는 소리쳤다.
“해충 같은 새끼들!”
“자기소개 한 번,”
기가 막히게 하시네! 도멤이 매섭게 외치며 창대를 휘둘렀다. 스칼렛이 그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방해되니 비켜! 그러나 키이엘로나 도멤이나 로트렐리조차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그에 스칼렛은 혀를 차며 페데르를 보았다. 궁지에 몰린 페데르는 스칼렛을 보고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치켜떴다.
“이 빌어먹을 여편네가 기어코 내 인생을 망치는구나!”
“뚫린 입이라고 지껄이다 피 보는 건 여러 번 겪지 않았냐?”
스칼렛이 흉흉하게 으르렁거렸다. 와인처럼 새빨간 머리카락의 선장은 페데르를 향해 칼을 치켜들었다.
“네 가랑이를 찢어놓을 날만 기다렸다, 개자식아! 덤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