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48)
바다새와 늑대 (147)화(148/347)
#147화
“자라지 않으면 아플 일도 없어. 하지만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라야만 해. 난 그러기로 결정했어.”
초월자는 바다를 넌지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네가 그랬지. 푸른 머리카락이 파도조차 크게 치지 않는 망망대해에서 유사(流砂)처럼 휘날렸다. 보랏빛 시선이 파란 실을 엮어내는 것처럼 물결을 천천히 바라보며 내리 감겼다.
먼저 떠나간 이가 유독 야속해지는 때는 필멸자고 초월자고를 가리지 않고 찾아들었다.
푸른 머리카락이 물결치며 목소리를 옮겼다. 하지만 그거 알아? 우리는 모두 멈춰버렸잖아.
속눈썹 사이로 자줏빛의 눈동자가 하늘을 훑었다. 네가 죽어 바다에 잠긴 이후로 우리는 톱니바퀴가 빠진 기구 같아. 전부 다 멈춰버렸어. 그래서 우리는 하릴없이 기다릴 뿐이야. 우리가 눈 감게 될 때를, 너와 함께 깊은 잠이 들게 될 때를.
그녀는 돌연 미약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래, 난 사실 너를 다시 만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거야.
“늘, 내가 원래의 너를 다시 볼 수 있기만을.”
* * *
극악무도한 해적단의 선장이란 자는 목이 잘려 죽었다고 했다. 그 목을 벤 것은 로트렐리였고, 자칫 그의 가슴에 박힐 뻔한 검은 백곡왕―바다새―이 붙잡아 막아섰다.
잘 알 수밖에 없다. 세운은 이미 몇 시간 전에 그 새의 발에 처치를 해두고 다른 환자들을 보던 참이었다. 내 참, 내가 살다 살다 수의사까지 해 보는구만. 세운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환자들의 사이에서 정신없이 움직이면서도 생각했다.
함저 구역의 소리관을 통해 울려 퍼지던 환호성을 잊지 못했다. 그것은 정말로 환호처럼 들리다가도, 미처 다 풀리지 못한 원한과 분노, 되돌려 받지 못할 것에 대한 슬픔의 고함 같기도 했다.
그것이 어딘가 낯익다는 감각이 들었다. 제국에 대항해 목청을 높이던 우리네 사람들이 그랬던가, 이것이 우리가 바라던 봄에 비슷하게 느껴져 그랬던가. 그러나 그 함성을 듣고 있던 함저 구역의 간부라는 양반은 바퀴 달린 의자에서 고개를 푹 수그리더니 말하는 게 아닌가.
‘그래, 허망하다, 허망해.’
커다란 전투가 지나갔다는 안도감보다도 먼저 세운에게 들이닥친 것은 수많은 환자였다. 미친 인간들이 얼마나 제 몸을 내던져가며 싸웠는지 성한 구석이 남은 사람이라곤 금발의 부선장 정도가 다였다.
그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하몬과 자신을 제외하고 죄다 드러누운 간부진들을 보며 착잡하게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그들이 이렇게 전투를 치를 것을 알기에 부선장인 자신이라도 정신을 챙기고 덜 다치려 한 것일지 모른다고 세운은 생각했다.
젊은 청년이 마음고생이 많구만……. 의원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내 얼굴을 어둡게 물들였다.
클루스도는 처치가 끝난 뒤 뒤늦게 전투에 뛰어든 해적단의 선장과 대화를 하러 갔다. 검은바다는 배가 많이 망가진 탓에 수리를 할 만한 섬까지 배를 몰고 갈 자신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니 일단 다른 해적단에게 도움을 구할 생각일 터였다.
또한 요한은 식사를 책임지고자 피가 흐르는 머리에 붕대만 두르고 주방으로 돌아갔으나, 검은바다의 가장 큰 문제는 다른 것이었다. 세운은 칸막이로 가려준 침상으로 다가갔다.
금발을 흐트러뜨린 아녀자가 후크를 빼둬 뭉뚝한 팔을 움켜쥐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디겔 코탕은 전투가 끝난 직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운은, 솔직히 말해, 헤더에게 가망이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디겔의 부상은 너무 컸고, 피를 너무 많이 쏟았으며, 회복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세운은 엉망진창으로 얼룩져 초췌해진 헤더의 얼굴을 볼 때면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사실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로트가 갖고 있던 진주를 사용한다면 아마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더 발생한다.
세운은 디겔의 상태를 점검하고 헤더의 어깨를 두드린 뒤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 탓에 안 그래도 희게 질린 얼굴이 더더욱 시체 같은 빛이었다. 세운은 그 머리맡에 몸을 말고 누워있는 파란 새를 보았다. 상서로운 백곡왕은 발에 약초와 붕대를 둘둘 감은 채 주인의 머리맡에서 곯아떨어져 있었다.
세운은 한숨을 쉬며 로트의 침상 옆에 의자를 대고 앉았다.
“미치겠소이다. 뭔 놈의 해적한테 복수를 한답시고 다들 이렇게 난장인지…….”
로트와 디겔은 부상의 정도가 가장 심한 이들이었다. 하기야 그렇지, 더 심했던 해적들은 요단강을 건넜으니 말이다. 복수라는 감정이 이렇게 커다란 행동력으로 나타날 수 있는 걸까? 항상 반듯한 도포만을 걸치고 살아온 세운의 눈에 이러한 종류의 사람들은 마치 부나방 같았다.
그것 조금 수탈을 못 참고, 그것 조금 손해를 못 참고 덤벼들고 한 맺힌 피를 토하며 부르짖는 사람들을 의사 양반은 수없이 봐왔다.
“나는 모두가 부디 안전하길 바라는 것뿐이었네만……. 그네들은 당최 뭣에 등 떠밀려 그리 일어나는지.”
세운은 까맣게 드리운 속눈썹으로 허공을 바라보다가 로트의 상태를 살피곤 자리를 털었다. 잡생각이었다. 자신과 원이 고향 땅을 떠나왔다고 그들이 바뀌었을 리는 없으니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하려던 바를 이루는 편이 좋았다.
듣자 하니 이제는 염원하던 전투도 끝났으니 떠날 마음을 먹은 선원들을 위해 여러 섬에 정박하려 한다고 했다. 그 중엔 세운과 원이 내릴 땅도 있으리라.
마침 로트에게 다가오던 랄티아와 마주치자 세운은 고개를 까딱여 인사하고 걸음을 옮겼다. 랄티아는 의사라던 세운의 어두운 안색을 쓴 표정으로 일별하고 로트렐리에게 다가갔다. 로트렐리의 옆에 앉은 랄티아는 작게 속삭였다.
“디겔이라는 아저씨가 위독하대. 의사는 누구에게 집중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 같아. 뭘 고민하는 걸까? 치료할 방도가 있다면 둘 다 치료해주면 될 텐데.”
혹시나 하고 생각해봤는데. 랄티아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언니나 그 아저씨나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독하기 때문일까?”
랄티아는 입을 다물고 로트렐리를 내려다보았다. 눈을 감고 고요하게 잠든 것 같은 로트렐리는 랄티아에게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랄티아는 로트렐리와 그 머리맡의 발카를 보다가 미간을 좁혔다.
“언니까지 날 혼자 두고 가버리면 용서 안 할 거야.”
정말이야. 정말로……. 랄티아는 로트렐리의 옆에 팔을 얹고 그 위로 머리를 파묻었다. 디겔의 곁에 그의 딸이 있던 것을 보았었다. 헤더랬던가.
검은바다를 낯설어하는 랄티아에게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던 도멤과 클레인스가 알려준 사실이었다. 헤더에게는 미안했지만 랄티아는 로트렐리가 더 우선이었다. 디겔인가 뭔가 하는 아저씨가 죽는다면 그야 물론 안타깝기는 하겠지만 딱 그 정도였다.
하지만 언니가 죽는다면 말이 달라진다. 랄티아는 이미 어렴풋이 자신에게 남은 가족이란 로트렐리뿐임을 눈치채고 있었으므로, 언니마저 죽게 둘 수 없었다.
이건 일종의 쟁탈전이다. 랄티아는 헤더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세운의 패가 무엇이든 그것은 로트렐리를 살리기 위해 쓰여야 했다.
그때 오른쪽 아래팔에 석고 붕대를 감은 키이엘로가 칸막이의 옆으로 들어오다가, 랄티아가 있는 것을 보고 어정쩡하게 멈춰 섰다. 옆엔 커다란 늑대가 함께 있었다. 그의 기척에 고개를 든 랄티아는 겸연쩍어하는 키이엘로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까딱였다.
모종의 허락이 떨어지자 키이엘로가 그제야 누워있는 로트렐리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키이엘로의 눈이 로트렐리를 보고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잠시 후 도멤이 불쑥 들어와 랄티아에게 아는 척을 했다.
그러더니 키이엘로를 발견하고는 물었다.
“키이엘로! 일어났구나. 열은 좀 어때?”
“난 이제 괜찮아.”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키이엘로는 열이 올라 뻗어있었다. 로트렐리와 디겔 수준으로 위급하다고 판단했을 정도니 말 다 한 셈이었다. 급하게 팔을 고정시키고 해열제를 처방한 세운은 중상자가 더 나오는 것인가 하고 조마조마하며 걱정했다.
그러나 원체 빠른 회복력 덕인지 뭔지, 현재 그는 고정되어있는 팔과 피로해 보이는 얼굴만 제외하면 거의 멀쩡해 보였다. 도멤 역시 숨소리가 거칠어서 걱정되었으나 다행히 큰 내상이 생겼던 것은 아니었다. 대신 늑골에 골절이 있었으나 경미한 수준이라 고정한 채 조심히 생활하면 금방 나을 정도라고 했다.
나란히 깨진 머리에 거즈를 매달고 있는 키이엘로와 도멤은 서로를 보고 한탄인지 미소인지 모를 표정을 지었다. 키이엘로는 텐이 턱 하고 제 다리에 고개를 얹자 미미하게 웃으며 늑대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도멤은 뱀이 들어있는 주머니가 그 난리였던 전투가 지난 후에도 잠잠하자 슬쩍 열어보았다. 뱀은 자신했던 대로 튼튼한 모양인지 그곳에 가만히 있었다. 키이엘로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로트렐리를 보았다.
“로트가 걱정인데. 너무 무리했어.”
“사실 우리 다 무리했지……. 어우, 숨쉴 때마다 뼈가 쑤셔. 디겔 아저씨도 위독하시더라.”
키이엘로는 도멤을 보고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걱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미묘하게 가뿐한 태도였다.
“예전만큼 걱정하는 것 같지 않네.”
“그게……. 모르겠어. 직감인가? 물론 로트가 걱정이 되지만, 뭐랄까……. 무사할 것 같아.”
“그래?”
키이엘로는 도멤을 보았다가 가볍게 긍정했다.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었다면 다행이었다. 랄티아는 키이엘로와 도멤의 대화를 아닌 척 엿듣다가 느리게 말을 꺼냈다.
“의사분은 치료할 방법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시던데요.”
“그래? 그런 것치고는 근심이 많아 보이던데.”
도멤의 말에 랄티아는 로트렐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일까요. 굳이 살린다면 둘 중 한 사람만 살려야 하는 방법이 있는 걸까요?”
그 말에 키이엘로와 도멤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러다가 이내 키이엘로가 눈을 크게 뜨며 랄티아를 바라보았다. 랄티아는 그가 자신이 바라는 답을 찾아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다의 마녀가 준 진주…….”
바다의 마녀? 랄티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도멤이 키이엘로와 비슷하게 경악한 얼굴을 하자 초점을 바꿨다. 그들에게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도멤은 랄티아를 보며 안타까움인지 거리낌인지 모를 얼굴을 하며 말했다.
“바다의 마녀가 준 일종의 만병통치약 같은 작용을 하는 진주가 있어. 하지만, 하지만 그건 로트의 거야. 디겔에게는 너무 안타깝지만……. 세운도 모르는 건 아닐 텐데.”
도멤은 그렇게 말하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곧이어 그의 얼굴이 기묘하게 비틀렸다. 자신이 말한 바를 뒤늦게 의미를 이해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키이엘로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으나 랄티아는 아무렴 안도했다. 제 언니는 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말대로 걸리는 점은 있었다.
세운은 뭘 망설인단 말인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