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5)
바다새와 늑대 (14)화(15/347)
#14화
발카의 말대로 이른 새벽이 되자 검은바다는 산호섬에 닿았다. 닻을 내리며 기척을 살폈으나 이상하게도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한산한 분위기였다. 술에 떡이 된 대부분의 선원들을 대신해 갑판 위로 올라온 이들은 섬에 먼저 정박한 해적선을 보고 침음을 흘렸다.
멀리서 망원경으로 봤을 때도 심각해 보였던 해적선은 가까이서 보니 더욱 터무니없었다. 마스트는 나무젓가락을 꺾듯 부러져 있었고, 돛은 가까이서 보니 마치 순식간에 썩어버린 것처럼 자잘하게 구멍이 숭숭 뚫려있어 수선도 어려워 보였다.
섬 안의 기척은 여전히 조용했다.
“……지나치게 기척이 없어요. 모두 전멸했을 수도 있어요.”
우리와 마찬가지로, 제정신이라는 이유로 고요한 섬에 발을 디딜 인원 중 한 명이 된 우투그루가 디겔에게 말했다.
우투그루의 옆에는 거의 백금빛처럼 보일 정도로 옅은 갈색 머리의 남자가 함께 있었는데, 내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 키이엘로가 ‘쟤는 브레딕이야,’ 하고 알려주었다. 브레딕은 편안한 셔츠와 바지를 입고 어딘가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키이엘로는 브레딕을 가리키며 우투그루와 친하게 지내는 선원이라고 했다. 저 고지식한 놈이 친하게 지내는 선원도 있군……. 하긴, 가뜩이나 있는 부선장 둘이 모두 사교성이 꽝이라면 해적단에게는 절망스러운 일일 것이다.
어쨌든 우투그루의 친구라니 당연히 키이엘로와는 사이가 안 좋을 줄 알았지만 브레딕은 키이엘로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다. 키이엘로도 어색하게 받아주는 것을 보고 나는 은근하게 속닥였다.
“사이 안 좋은 건 아닌가 봐?”
“나도 몰라. 브레딕은 날 딱히 싫어하는 것 같진 않더라.”
흐음.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다시 생각건대, 참 콩가루였다. 우리가 대기하며 섬을 눈으로 살필 동안, 디겔과 클루스도는 심각하게 뭐라고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배의 일은 선장이 명령해야 하는 일이지. 나는 늘어져라 하품을 하며 굴러다니는 나무잔을 발로 팍팍 걷어찼다.
도멤은 으스스한 해적선의 모습을 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 나 이런 거 약한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는 도멤을 보면서 정말로 그가 검은바다에서 손에 꼽히는 전력은 맞는지 의심이 갔다. 합리적인 의심 아닌가? 꼴랑 조용한 섬을 보고 벌벌 떤다니…….
그때, 헤진 졸리 로저를 자세히 보던 클루스도가 결정을 내린 듯 우투그루에게 뭐라고 명령했다. 우투그루가 묵묵히 갑판 아래에서 무기들을 들고 왔다. 검과 창, 단검 등 없는 게 없었다.
도멤이 죽는 소리를 냈다.
“결국 순찰하는구나.”
“별수 없지. 혹시라도 자는 사이에 배로 숨어들어서 칼질이라도 할 사람이 남아있으면 안 되니까.”
키이엘로의 말에 도멤이 새파란 안색으로 질린 듯 쳐다보았다. 넌 그런 소릴 잘도 한다. 나는 둘은 뒤로하고 우투그루가 가져온 무기들을 어깨너머로 보았다. 제각각 자기 소유의 무기가 있는 선원들은 알아서 자기 무기를 꺼내왔지만 나 같은 경우는 구비된 무기들을 사용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내가 도검류를 살펴보고 있는데, 키이엘로가 자기 소유인 것 같은 검을 꺼내 온 뒤 그런 나를 보고 지나가듯 말했다.
“나중에 상점이 있는 섬에 정박하면 네 검부터 사야겠다.”
“그 전에 우홉피아주를 쳐부술 생각을 하자.”
내 단호한 말에 키이엘로는 머쓱한 듯 어깨를 들썩였다가 옆에서 이것저것 충고를 해줬다. ‘이건 이가 조금 나간 것 같아, 이건 손잡이가 너무 짧을 거야…….’ 전부 꽤 도움이 되는 말들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다간 고를 수 있는 게 없을 거라는 내 말에 키이엘로가 침울하게 동의했다.
그때 대뜸 내게 우투그루가 다가왔다. 키이엘로와 우투그루 사이에 끼일까 두려워 자리를 피하려는데, 우투그루가 키이엘로 쪽은 보지도 않은 채로 내게 검을 하나 내밀었다. 얼떨떨해하며 받은 것을 보는데, 상당히 좋은 검이었다. 검집은 어두운 빛을 띠고 있었고, 손잡이에는 세밀한 세공이 있었다.
내가 검을 살피고 우투그루를 흘끔 보자, 우투그루는 딱 잘라 말했다.
“브레딕 거다. 빌려주는 거니까 망가뜨리지 마.”
“음, 고맙긴 한데 그 브레딕이란 사람은 같이 안 가나?”
내가 떨떠름하게 묻자, 우투그루는 한숨을 한 번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다친 다리가 아직 낫지 않았다는 것 같았다. 어쩐지 어정쩡한 자세더라니. 브레딕은 그 말대로, 검 대신 활을 들고 난간에 기대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때 디겔 아저씨가 손뼉을 쳐서 백사장에 있던 선원들의 시선을 모았다.
“자! 선장님의 명령이다. 지금부터 저 해적선을 포함해 섬 전체를 살필 예정이다. 그리고 인원을 나눠 조를 만들었다.”
디겔은 차례대로 호명하기 시작했다. 하나둘 이름이 불리자 대답하며 서로를 찾아가는 와중에 가장 마지막, 해적선을 살피는 인원만 남을 때까지 호명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입을 슬쩍 벌렸고, 도멤은 벌써부터 위가 아프다는 듯 괴로운 얼굴이었으며, 키이엘로는 드물게 오만상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우투그루는 거의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 같은 얼굴이었다.
“가장 중요한 해적선 순찰, 알지? 실력 좋은 놈들로 골라 넣었다. 로트, 키이엘로, 도멤, 우투그루!”
“진짜냐…….”
“믿기지 않겠지만 현실이야.”
도멤이 괴로워하는 것에 대충 대꾸해준 나는 키이엘로와 우투그루 사이에 섰다. 진짜 끼기 싫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이 키만 훌쩍 큰 놈들이 싸우기 시작하면 그게 더 골치 아팠다. 전에 목격한 싸움을 떠올려보면, 순찰보다 이 둘이 싸우는 게 더 위험할 것이다.
우투그루와 키이엘로는 당연하지만, 아직도 얼굴에 멍 자국을 사이좋게 하나씩 달고 있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사이좋게 서로가 만들어준 자국이지. 다행히 내 옆에 도멤이 끼게 되면서 키이엘로와 우투그루는 극과 극으로 떨어졌다.
다녀오라고 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선원들이 제각기 흩어졌다. 텐과 발카를 데려갈까 했지만 남들 보기에 이상해 보일 것 같아 배에 머물게 한 뒤, 우리 넷도 천천히 배를 내려가 해적선 쪽으로 향했다.
나는 뚱하게 한숨을 쉬었다.
“별로 불퉁대고 싶은 건 아니지만, 난 신입에 아직 전투도 치러보지 못했는데 왜 너네랑 같이 끼게 된 걸까.”
“그러게…….”
키이엘로가 작게 동조했다. 그러자 불을 붙이지 않은 횃불을 들고 있던 우투그루가 말했다.
“네가 이 배에 탈 때 했던 짓을 생각하면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지.”
그 말에 키이엘로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너 뭔가 했었어?’하고 묻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별거 안 했는데. 우투그루는 딱히 내 긍정을 얻을 생각은 아니었는지, 말없이 해적선을 향해 걸을 뿐이었다. 우려와 달리 두 부선장은 서로를 상종도 하지 않고 걸어갔고, 아무 일 없이 당도한 해적선을 보고 우투그루가 난간 위로 밧줄을 던져 걸었다.
단단히 걸린 것을 확인하며 줄을 몇 번 당긴 우투그루가 먼저 간다고 짧게 말한 뒤 횃불을 이로 물고 능숙하게 줄을 타 올라갔다.
도멤은 한숨을 쉬다가 키이엘로에게 말했다. 위로 올라가서도 우투그루랑 싸우지 마, 알았지? 키이엘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도멤이나 나나 키이엘로와 밧줄을 타고 거의 다 올라간 우투그루를 힐끔거렸지만 이내 관뒀다. 말도 했고, 해야 하는 일도 있으니 적어도 안 싸우려는 노력은 하겠지. 도멤이 두 번째로 올라가자, 나는 줄을 잡고 해적선에 올랐다.
선체엔 따개비가 붙어있었는데, 보통 배에 붙게 되는 것을 생각해도 지나치게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빽빽하게 들러붙은 따개비는 계속 보고 있기 징그러웠다. 애써 시선을 돌린 내가 다 올라오자 뒤이어 키이엘로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갑판 위를 살펴보며 애매한 얼굴을 했다.
“……아무것도 없네.”
“그러게. 그 흔한 상자나 포탄도 없어…….”
도멤이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키이엘로가 올라와 난간의 밧줄을 갈무리하고 도멤에게 건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사이 횃불에 불을 붙인 우투그루도 선미루의 선장실, 조타실에 들어갔다 나왔으나 얼굴이 아무것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파도치는 소리와 멀리 떨어진 검은바다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리만이 희미하게 해적선에 닿았다.
도멤이 갈기갈기 찢겨있는 돛을 보고 입꼬리를 비틀었다. 우리 여기 얼마나 더 봐야 해? 그 말에 우투그루가 갑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보며 대꾸했다.
“선내만 남았군.”
“얼마 안 남았다는 듯이 말하지 말아 줄래…….”
도멤의 볼멘소리를 뒤로 하고 우투그루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투그루의 손에 있는 횃불만이 어두운 갑판 아래를 희미하게 비췄다. 도멤이 얼른 우투그루 근처로 붙었다. 누가 봐도 겁을 집어먹은 모양새였다.
나는 천천히 걸어 갑판 아래로 내려갔고, 그런 내 뒤를 키이엘로가 따라왔다.
갑판 아래는 어두컴컴했다. 가끔 갑판에 뚫린 구멍이나 틈새로 달빛이 기어들어 왔지만, 그뿐이었다. 게다가 지나치게 기척이 없었다. 횃불을 더 가져올걸, 하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발밑이 쑥 꺼졌다.
“으악?!”
“로트!”
내가 비명을 지르자 키이엘로가 날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나 헛손질한 키이엘로의 발밑이 작게 부서지며 졸지에 키이엘로도 똑같이 떨어지고 말았다. 잠시 우당탕 구른 내가 욱신거리는 몸을 털며 일어나 위를 보자 우리 쪽을 살핀 우투그루는 한숨을 쉬었다.
층의 바닥에 구멍이 뚫려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떨어진 모양이었다. 젠장,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너라는 말이 있기야 하지만……. 키이엘로는 가장자리에 서 있었던 것 같았지만, 무게를 못 이긴 마룻바닥의 목재가 꺾여있는 것이 보였다.
횃불로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던 우투그루가 자신이 있는 층에서 불붙지 않은 횃불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 그것에 불을 붙여 우리에게 던져주었다.
키이엘로가 날렵하게 횃불을 받았다. 내심 바닥에 떨어지면 그때 주우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깜짝 놀랐다. 저거 안 뜨겁나?
그때 위에서 도멤이 우리에게 물었다.
“다친 곳은 없어?”
“응, 좀 굴렀을 뿐이야.”
“다행이다.”
도멤이 안심한 듯 길게 숨을 내쉬고는 허리춤에 엮어둔 밧줄을 풀어 내리며 말했다. 좀만 기다려, 줄 내려줄게…….
그러나 도멤의 행동을 우투그루가 막았다.
“됐어. 어차피 아래층도 살펴보긴 해야 하잖아. 이렇게 된 거 너희 둘은 거길 살펴. 나와 도멤은 이쪽 층을 살피지. 계단이 있을 테니 알아서 올라와.”
“음, 알았어.”
나는 아무 대꾸하지 않는 키이엘로를 대신해 고개를 끄덕이고 도멤에게 손을 흔들었다. 고생해라. 내 의미를 알아챈 도멤이 죽상을 했다가 우투그루가 자신을 보자 얼른 표정을 폈다. 나는 반사적으로 픽 웃었다가 키이엘로를 돌아보았다. 가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