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51)
바다새와 늑대 (150)화(151/347)
#150화
로트렐리는 까닭 없이 일순 위화감을 느꼈다. 검날? 알지 못하는 위화감이 심기를 건들었다. 다들 바다의 마녀가 그를 찔렀다곤 했지만…… 루루미가 검을 썼을까?
「그래, 검……. 그러나 나는 그것도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이리되리라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 다만 나는 얄팍한 걱정과 후회와…….」
끝에서야 내가 그들을 진정 사랑했음을 느꼈다. 메흐의 말에 로트렐리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뭔……. 그녀의 황당하다는 얼굴에 미소지은 메흐는 말을 돌렸다.
「바다에 길 잃은 이가 많다. 이것 또한 그들의, 우리의 원죄다.」
그 목소리에 로트렐리는 유리의 바다에서 보았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묻고 싶은 마음과 굳이 들추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 양쪽에서 그녀를 팽팽하게 당겼다.
그러나 메흐는 그것 또한 꿰뚫어 보듯 입을 열었다.
「그러나 넌 걱정할 필요 없다. 머지 않아 모든 것은 해류를 타고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니.」
로트렐리는 메흐를 잠시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지, 초월자들이 저지른 일이면 초월자들이 알아서 해결할 것이다. ……아마도. 떨떠름한 얼굴로 메흐를 본 그녀는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어떻게 당신이 정말로 나타날 수 있었던 거죠?”
「내 힘을 가진 수많은 인간 중에서도 네가 나와 가까운 길을 걸었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결과적으로, 방금의 네 노래가 다른 이에게 있던 내 조각을 끌어당겨 바다를 타고 이리 모였다. 그나마 남아있던 순수한 일부분만 모였으니 그들에겐 상관없겠지만 너는 두 번 시도할 생각은 버리렴.」
메흐는 다정한 말투와는 다르게 엄하고 굳은 얼굴로 로트렐리에게 말했다.
「적어도 너는, 너를 이루는 힘을 밖으로 모조리 꺼내둔 것이니.」
그것은 곧 네 장기를 갑판에 늘어둔 것과 진배없지 않더냐? 그 말이 신호가 된 것처럼 메흐를 이루고 있던 거대한 물결들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고아하고 중성적인 얼굴이 허물어지며 물방울이 세차게 튀었다.
그가 말했다.
「내 친우들을 만나거든 더는 죽은 망령에 기대 어리석게 굴지 말라 이르거라.」
‘메흐’의 말이 끝나자 물결이 모조리 허물어지고 파도가 출렁였다. 어찌나 거대한 물살이었는지 커다란 피네스선인 검은바다와 셀리팜의 갤리온선이 크게 울렁일 정도였다.
먼 곳의 종이 울리는 것처럼 울려 퍼지던 기이한 숨결의 화음도 흐릿하게 사라졌다. 대신 적막과 파도 소리만이 찾아와 빈 틈바구니를 메웠다.
숨 막히는 광경에 압도되어있던 스칼렛이 헉, 하고 숨을 터뜨렸다.
“……그래, 진 구경은 확실히 했군…….”
로트렐리는 마치 거대한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은 기분에서 헤어 나와 눈을 깜빡였다. 뒤늦게 몸 안이 텅 비는 것 같던 감각이 서서히 사라지고 주머니에 물을 채워 넣는 것처럼 부푸는 기분이 들었다.
사란이 눈물을 흘리며 로트렐리를 보았다.
“미안해. 내가 꾀를 썼어……. 하지만 됐어, 정말로 그를 다시 만났으니. 이제 푸른 꿈의 정체도 알 것 같아. 그가 바라던 것도 알 것 같아.”
로트렐리는 왠지 모를 진한 탈력감에 입만 벙긋거렸다. 딱히 사란이 자신을 속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로 피곤했다. 물론 자신에게 사기를 치려던 인어가 괘씸하긴 했다만 타박할 기분도 나지 않았다.
사란은 눈물 젖은 뺨을 닦아내더니 로트렐리에게 ‘언제든 내가 필요하면 불러,’하고 말하더니 훌쩍 바다로 뛰어들어 사라졌다. 도멤은 어리벙벙한 얼굴로 로트에게 다가오다가 사란이 떠나간 방향을 보았다.
“엄청난 일들이 지나간 기분이야.”
그렇게 말하며 바다에서 시선을 떼고 로트렐리에게 고개를 돌린 도멤은 눈을 부릅떴다.
“로트, 피!”
“어?”
로트렐리는 메마른 사막처럼 갈라진 목소리로 얼빠진 소리를 냈다가 코밑으로 뜨끈한 액체가 흐르는 것을 알아챘다. 손으로 급하게 훔치자 새빨간 피가 손바닥에 가득 묻어났다.
그제야 로트렐리에게 머리가 띵하고 울리는 감각이 찾아왔다. 누군가, 키이엘로만 한 악력이 머리를 쥐어짜는 것 같은 통증이었다. 로트는 놀라서 자신을 붙잡는 키이엘로와 도멤의 목소리가 물에 잠긴 것처럼 먹먹하게 들려온다고 생각했다. 곧 로트렐리의 귓가에서도 무언가 흘러내렸다.
도멤이 허둥지둥 로트렐리의 얼굴을 닦아내며 무어라 크게 외쳤다. 로트의 몸이 얄팍한 종잇장이 된 것처럼 그가 지르는 소리가 웅웅 진동이 되어 온몸을 울렸다.
부를 때 주의하는 게 좋을 거야……두 번 시도할 생각은 버리렴……그건 네 생명의 근원을 이룬 힘을 바깥으로 잠시 꺼낸다는 뜻이니까……곧 네 장기를 갑판에 늘어놓은 것과 진배없지 않더냐…….
루루미와 메흐의 목소리가 아릿하게 웅웅 울렸다. 아니, 이런 위험 부담이 있으면…… 말을 정확히 해줬어야지, 망할 초월자들아…….
그런데 그들이라고 이런 경우를 겪어본 적이나 있었을까? 어쩌면 초월자들이라도 별수가 없던 건지도 모른다. 로트렐리는 지독한 멀미를 하는 것처럼 휘청이다가 피를 뱉어내며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그로부터 하루가 더 지나서야 로트렐리는 다시 눈을 떴다. 그러나 로트렐리는 잠시 일어났다가 까무룩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 키이엘로와 도멤은 이것이 로트의 안에 있다던 바다의 주인을 끌어낸 부작용임을 알고 전전긍긍했다.
그 사이 검은바다는 무사히 셀리팜과의 계산을 끝냈고, 셀리팜은 로트렐리를 데려가고 싶어 했으나 의식을 잃은 로트에게 말도 붙이지 못하고 출항했다.
우홉피아주는 소탕되었으나 페데르가 죽자 꽁지 빠지게 도망친 잔당들은 있다고 들었다. 디겔을 찔렀던 기로그가 그들 중 하나였다. 당시 제국 쪽으로 도망쳤다는 것 같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로트렐리의 심정은 그저 ‘이제 그것에 대해선 그만 생각하고 싶다’였다.
반면 클루스도는 그들을 마저 쫓으며 살 것이라고 공표했다. 그러나 해적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한 선원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들은 섬에 정박할 때마다 배에서 내리곤 했다. 그러자 검은바다는 항로를 바꿔 배에서 내리고자 하는 선원들에게 원하는 섬까지 데려다주는 항해를 시작했다.
그리고 남은 인원으로 잔당을 쫓거나 유유자적 해적질을 하며 살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러나 해적 마을로 돌아가는 선원들보다 다른 섬에서 내리는 선원이 더 많았다.
그 사이사이마다 눈을 뜬 로트렐리는 디겔의 죽음을 뒤늦게 전해 듣기도 하고, 랄티아와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기도 하고, 키이엘로와 도멤에게 육지에 대한 조언을 듣기도 했다. 특히나 키이엘로는 생각보다 육지의 생활에 퍽 빠삭한 편이었다.
도멤과 키이엘로는 로트렐리가 섬에 정착할 때 필요할 쌈짓돈까지 마련하려 들었다. 물론 대화를 길게 이어가지 못하고 금방 다시 까무룩 잠들고는 했지만, 때때로 로트는 자신이 깨어있을 때 섬에 정박한 상태라면 항상 랄티아에게 묻곤 했다.
이 섬은 어때? 로트렐리는 랄티아가 바란다면 금방이라도 배에서 내리는 선원들과 내릴 생각이었으나, 랄티아는 아직 망설이고 있다며 말을 아꼈다.
로트렐리도 랄티아가 망설이는 이유를 알았다. 미지의 생활로 완전히 뛰어들기엔 아직 두려운 것이다. 로트렐리가 맥을 못 추리니 그것을 핑계로 최대한 시일을 미루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그리고 로트렐리 역시 랄티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기분이었기 때문에 그런 동생을 배려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쏜살 같은 시간이었다. 로트렐리는 이제 정말로 깔끔하게 기운을 차렸고, 도멤도 부상이 다 나았다며 좋아했다. 로트렐리는 곧 정박을 준비 중인 섬에 내릴 계획을 세웠다.
얼마 없는 짐을 꾸리는 동안 아쉬움을 느낀 요한과 브레딕이 찾아왔고, 베제는 프라세를 데리고 와 로트렐리에게 제대로 사과했다.
헤더는 디겔의 죽음을 아직 완전히 받아들이진 못한 얼굴이었으나 미미하게 웃으며 로트렐리를 끌어안아 주었다. 로트렐리는 랄티아에게 디겔과 자신 사이에 있었던 모종의 일을 전해 들은 뒤라 어색하게 굴었지만, 헤더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헤더와 대화를 나눈 뒤엔 네토르가 찾아왔다. 네토르는 한참 동안 재수 없는 눈으로 로트렐리를 바라보았지만 이내 혀를 차며 말했다.
“연구 대상이 사라진다니 아쉽긴 하네.”
“이게 처돌았나.”
로트렐리와 네토르는 어김없이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다. 그 뒤로 찾아온 클레인스는 하몬이 랄티아에 대해 전해 듣고 준 것이라며 작은 마장석들을 몇 개 챙겨주었다. ‘하몬이 로트 누나에게 고맙다고 전해달래요.’ 클레인스의 말에 로트렐리는 랄티아를 지켜줘서 고맙다며 클레인스에게 말했다.
문안이라도 되는 듯 줄줄이 이어지던 인사도 끝나자 도멤과 키이엘로도 슬슬 로트렐리와 헤어진다는 것을 실감했는지 싱숭생숭한 얼굴을 했다. 로트렐리도 곧 훌쩍 떠나게 될 사람들이 으레 느끼는 허전감을 느꼈다. 마음이 영 어정쩡했다.
정박까지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로트렐리는 그 둘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랄티아는 텐에 대한 것을 전해 듣고 신기하다는 듯 늑대를 관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세운하고 원도 배에서 내려서 없어. 덕분에 브레딕이 오랜만에 고생하고 있지.”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이 원래는 의원 역할을 도맡았다고 했지…….”
맞아. 맞장구를 치던 도멤이 씩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진짜 배에서 내리면 낚시꾼이 될 거야? ‘낚시로 백만장자가 된 로트렐리 아피나’. 어때? 완전 멋진 것 같아.”
“헛소리도 그 정도면 재주다.”
로트렐리의 일갈에도 굴하지 않은 도멤은 낄낄 웃었다. 키이엘로는 연신 로트렐리에게 사람 조심, 사기 조심, 경비병 조심, 어쩌고저쩌고하며 떠들고 있었다.
그에 로트렐리는 ‘경비병은 대체 왜 조심해야 하는데?’하고 생각했으나 아무렴 키이엘로가 더 도시 생활에 도가 튼 것은 사실이었으니 유의 깊게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정말 끝이 보였다. 반년 조금 부족한 기간, 그동안 일도 많고 탈도 많았던 여정이 마무리되는 것이다. 차가운 분노에서 눈을 떴던 항해가 따스한 때가 되어 마무리되고 있었다. 곧 여름이 다가오는 때였다.
로트렐리는 시원섭섭한 기분으로 그들을 보았다가 랄티아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결국 해냈다. 자신은 랄티아도 지켜냈고, 우홉피아주에 복수도 했다.
섬은……. 사실 로트렐리는 섬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저절로 테드가 떠올랐다. 로트렐리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테드 놈은 어떻게 됐어?”
“걔? 그냥 적당히 어디 섬에서 내렸어. 생각보다 조용히 나갔지.”
예상외로 조용한 퇴장이었다. 로트렐리는 ‘그래?’하고 중얼거리고 뒤의 벽에 등을 기댔다. 파도가 부딪는 소리와 두런거리는 말소리, 배가 끼익 기우는 소리가 마치 삼중주처럼 들려왔다. 로트렐리는 힘든 일도 많았던 이번 항해가 나중에도 두고두고 떠오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헤쳐 나오는 내내 힘들었다는 생각뿐이었으나 모두 지나간 뒤에 되새겨보자니 꽤 즐거운 일도, 황당한 일도 많았던 것 같다. 로트렐리는 얼어붙어 가는 바다처럼 날카롭던 마음이 순풍이 부는 맑은 날의 바다처럼 잔잔해져 있음을 깨달았다.
이제 다시 그 바다에서 새로운 항로를 찾아야 하는 때지만, 아마 잘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키이엘로가 로트렐리에게 무언가 내밀었다. 키이엘로와 처음 마주쳤던 날 보았던 배 모형이었다. 유리병을 반갑게 받아든 로트렐리는 이내 의아한 낯으로 키이엘로를 보았다.
“이건 왜?”
“뭐라도 줘야지 싶어서. 나중에 집이라도 얻으면 어디 한 구석에 장식해둬.”
“나야 고맙지. 근데 이거…… 너의 흑역사 아니었나?”
로트렐리가 까만 배 모형을 살펴보며 한 말에 키이엘로는 뺨을 붉히긴 했으나 겸연쩍은 얼굴로도 퍽 침착하게 말했다.
“그래도 잘 만들긴 했잖아.”
“그건 그래.”
“이런 것도 만들었었어, 키이엘로?”
도멤이 감탄하며 로트렐리의 손에 든 병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웃으며 말했다.
“나 이거 알아, 모형 배를 타고 좋은 인연이 들어온다는 그거지?”
“맞아.”
“의외로 어렸을 땐 친구가 고팠구나, 키이엘로.”
도멤의 말에 키이엘로는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도멤은 ‘아님 말고…….’하며 딴청을 부렸지만 그들의 말에 로트렐리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모형 배를 바라보았다. 그런 속설도 있는 거였군. 꾸려둔 짐 안에 넣으며 로트렐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틀린 속설도 아닌 것 같긴 하네.”
그 말에 키이엘로는 이내 가볍게 웃으며 긍정했고, 도멤 역시 밝은 낯을 했다. 검은바다를 타고 셋이 만났으니 어느 정도 효험이 있다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로트렐리는 다시금 미약한 아쉬움이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육지로 가게 된다면 자주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자명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키이엘로는 괴물 같던 회복력은 어디에 바꿔먹었는지 부상에 차도가 더딘 상태였다. 다들 몸뚱이 멀쩡해진 뒤 걱정 없이 헤어지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남았으나 별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돌연 회포를 푸는 그들의 사이로 우투그루가 들이닥쳤다. 깜짝 놀란 도멤이 우투그루를 돌아보았다.
우투그루는 침착한 얼굴이었으나, 갑자기 들이닥친 그의 피부 아래 서린 긴장을 못 읽어낸 이들은 없었다. 키이엘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야?”
의외로 이번에도 로트에게 인사를 하러 온 것뿐이었나? 의아함에 도멤과 키이엘로가 시선을 나누는 때, 파리하게 굳은 얼굴의 우투그루가 로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너, 언제든지 말하라고 약속했었지.”
마치 누가 들을까 겁나서 속삭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직감이 셋을 꿰뚫고 지나갔다. 로트렐리의 푸른 눈을 마주하며 우투그루는 짧게 내뱉었다.
“도와줘.”
1부. 바다와 새벽의 눈 (완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