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52)
바다새와 늑대 (151)화(152/347)
#외전1-1화
동부 해안에서 백 년 동안
서부 해안에서 백 년 동안
오, 그래 오, 백 년 전에
나는 불량배 존을 알지
바다에선 멋지지만 육지에선 불량배야
충고 따윈 듣지 않는 존
나는 항해사가 우는 것을 들었지
늙은 항해사가 우는 것을 들었지
소년은 소녀를 따라 노래를 부르며 나무를 탔다. 여기서 나오는 ‘불량배 존’은 널 말하는 것 같아, 로라. 소년이 낄낄대며 말했다. 그러자 소녀는 그와 별반 다를 것 없이 낄낄 웃으며 말했다. 맞아, 난 불량배 존이지! 그러더니 소녀는 노래를 바꿔 불렀다.
하지만 그런들 존은 개의치 않아
그것 아는가?
나는 그대와 함께라면
그대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네
불량배 존, 그러니까 로라 조네스는 세상에 다시없을 말괄량이였다. 소꿉친구인 소년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항상 모여 장난칠 작당만 해댄다며 어른들은 두 꼬마를 볼 때마다 진저리를 쳤다. 그들이 보이면 또 무슨 꿍꿍이냐며 손사래를 치며 서둘러 내쫓았다.
그래서일까? 로라 조네스가 그 성정과 다르게 꽃과 나무를 좋아하고, 웃을 때마다 보이는 주근깨가 의외로 아름다우며, 즐겁게 나불거리는 목소리는 사실 들리는 것보다 더 진중하고, 장난기로 반짝이는 그 눈동자 안에는 어렴풋한 슬픔이 묻어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그런 것은 오로지 소년만이 알았다.
오로지 소년, 디겔 코탕만이 로라 조네스를 사랑했다.
* * *
디겔의 어렸을 적을 이야기하자면, 그다지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는 작은 섬마을의 평범한 소년으로 자라났고, 괴팍한 어머니와 적당히 근엄한 아버지 사이에서 자라났다. 이 금발 소년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린 때는 로라 조네스라는 소녀를 만난 순간이었다.
로라는 옹골찬 소녀였고, 자기주장이 강하고 장난기가 넘치는 여자애였다. 그 여자애는 자신의 아버지를 볼 때만 공포에 움츠러들었다.
디겔과 로라가 친해지게 된 이유는 별것 없었다. 어느 날 디겔이 거름을 내던지다가 실수로 로라의 아버지에게 똥물을 부어버린 것이다.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어른들에게 조심치 못했다며 혼쭐이 나야 했지만, 적어도 그 실수가 로라라는 아이의 가슴에 깊은 감명을 남긴 것은 분명했다.
디겔 역시 만만찮은 악동이었기 때문에, 로라와 디겔은 순식간에 친해졌다. 그리고 유명한 장난꾸러기 둘이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디겔의 부모는 그들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았고, 로라의 아버지는 그들이 결혼하기로 맘먹기 전의 어느 날 술을 먹다 발을 헛디뎌 실족사한 지 오래였다. 그들은 특별하게 행복하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특별하게 불행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어른이 되고 부부가 되었을 때, 섬엔 지독한 가뭄이 들었다. 흉년이 계속되어 먹을 것이 사라지자 사람들 사이의 여유도 메말라갔다. 결국 지독한 가난과 굶주림에 견디지 못한 디겔은 때마침 사람을 모으던 어느 해적단에 들어갔다. 해적단의 이름은 우홉피아주였다.
로라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이내 굳건한 성정답게 버텼고, 우홉피아주가 가진 땅에서 살았다. 로라는 주눅 든 것 같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섬의 마당발이 되어 이곳저곳 안 끼는 곳이 없었다. 로라에게 번듯한 집을 내줄 수 있었지만, 디겔은 일개 해적이 땅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습다고 생각했다.
거기엔 사연이 또 있었다. 우홉피아주의 선장인 페데르는 과거 드높은 귀족 집안의 자제였는데, 지금의 제국으로 합병되기 전 일어난 쿠데타로 직위도 재산도 모조리 잃고 해적질에 뛰어들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젊은 페데르는 총기 있고 진녹색의 머리칼을 깔끔히 뒤로 묶은 호방한 청년이었다.
젊을 때의 디겔은 그것이 그저 대단하게 느껴졌다. 어쨌든, 페데르는 그 때문인지 귀족들의 땅을 보면 눈이 뒤집히곤 했다. 그래서 그들은 뛰어난 무력으로 귀족들의 영지를 침범해 약탈하고, 쓸 것은 쓰고 남은 것은 대충 영지에 있던 영지민들에게 뿌렸다.
알량한 구원자 놀음이었으나 그것마저도 사람을 도취시키기엔 충분했다. 디겔은 섬으로 귀환할 때면 온갖 금붙이며 보석들을 로라에게 둘러주었고, 원하던 화단을 가꾸게 된 로라는 디겔의 목에 찬란한 장식품 대신 화환을 둘러주었다. 무엇보다도 멋진 목걸이였다.
황금기와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잔에서 술이 마르지 않고, 접시엔 고기가 가득한 나날들이었다. 디겔은 바다에 나가 있을 때마다 로라의 정원에서 나는 꽃내음을 그리워했다. 목에 다시금 화환을 두르게 될 날을 고대했다.
시간이 눈부시게 지나가는 동안 로라는 임신을 했고, 그 소식을 들은 디겔은 곧장 홀로 섬으로 귀환해 아내를 마치 강보에 싼 아기를 어르듯 지냈다. 여름이 무르익어 히스꽃이 만발할 때에 태어날 아이에게 젊은 부부는 남자아이라면 ‘하이더’, 여자아이라면 ‘헤더’라는 이름을 짓기로 했다.
“그거 알아, 디겔? 사실 내 정원에 심은 건 헤더야. 에리카랑 별다를 것 없이 취급되긴 하지만, 뭐…….”
“그럼 뭐가 달라?”
“다르지!”
로라는 마치 커다란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디겔에게 속삭였다. 이 애에겐 행운이 가득할 거야. 꽃말이 좋거든. 그래서 부러 칼루나 종류만 심었다고.
디겔은 꽃은 물론이고 식물은 손대는 족족 죽이는 끔찍한 손을 갖고 있었기에 정원에 손대는 것을 금지당했다. 대신 그는 항상 로라가 하는 말을 얌전히 듣고만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곱씹으며 말했다.
“좋아, 나중에 자기 이름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할 때마다 이 얘길 해줘야겠어.”
“아이는 이 이름을 좋아할 거야!”
디겔의 말에 로라가 황당하다는 듯 외치고는 깔깔 웃었다. 둥글게 부른 배는 마치 로라가 새로운 꽃나무를 심을 때마다 땅에 솟아올라 있던 부드러운 흙처럼 보였다. 임신한 몸으로 정원을 가꾸는 것을 힘겨워하는 로라를 위해 젊은 남편은 그녀의 감독하에 꽃과 나무들에 물을 주고 가지를 쳤다.
그러나 식물도 사람 손을 타는지 디겔이 많이 만지작거린 관목들은 어김없이 시들곤 했다. 디겔은 내심 그것에 꽁한 상태였다. 소파에 앉은 그는 아내를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우리 애도 당신을 닮아 꽃을 잘 키우려나?
로라는 대꾸했다. 와, 그러면 너무 좋겠다. 자기 손재주를 닮으면 안 되는데. 그에 디겔이 낄낄 웃었다.
“당신과 아이 둘 모두에게 쪼이지 않으려면 육지에 머무르는 지금이라도 열심히 배워야겠는걸.”
하지만 디겔이 원예를 배우는 일은 없었다. 페데르의 호출이 떨어진 것이다. 만삭의 로라를 두고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로라는 이웃이 자신을 도와줄 수 있다며 그를 안심시키고 섬을 떠나게 했다.
디겔은 내내 불퉁한 얼굴로 우홉피아주로 귀환했으나, 그는 우홉피아주의 모습을 보고 내심 깜짝 놀랐다. 적당히 검소했던 전열함의 광경은 온데간데없었다. 온통 휘황찬란하고, 선원들은 가득해진 배가 그에게는 마치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낯설었다.
돌아온 디겔을 클루스도가 반겼다.
“어서 와, 친구! 하하, 저 눈 좀 봐.”
“이게 다 뭔가? 내가 떠나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디겔이 경황없이 묻자 클루스도는 코끝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페데르가 웬 창부를 하나 끼고 살고 있어서 말야……. 그 녀석이 딱히 관리하지 않으니 제 욕심껏 주머니 채운 놈들이 생기기 시작한 거지. 뭐, 페데르도 지 애인에게 못난 꼴을 보이고 싶진 않은지 배를 꾸미는 데에 아주 열중하더라고.”
클루스도는 그렇게 말하며 탐탁잖은 얼굴을 해 보이더니 이내 디겔에게 씩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로라는 어때? 그 말 한마디에 디겔은 무어라 하려던 말을 모두 잊고 애처가다운 얼굴을 했다. 그걸 보고 클루스도가 질린 낯으로 고개를 설설 저었다.
클루스도 역시 얼마 전 결혼을 하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평범하고 미지근한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디겔은 그런 친구를 볼 때마다 ‘아내가 주는 사랑을 모르는 불쌍한 녀석’하며 너스레를 떨곤 했지만, 실상은 조금 난감하고 어색하게 친구의 내외를 보고는 했다.
그렇다고 무어라 언질하기엔 클루스도가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서 디겔은 그냥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으리, 하며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는 나란히 항해 중이던 자매선에서 웬 여자들이 우르르 나오자 인상을 찡그렸다.
“저기는 웬 여자들이야? 배에 창부를 들인 거야?”
“말조심해, 난리 난다.”
클루스도는 진저리를 치며 디겔이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페데르의 애인이란 여자가 데려온 것들이야. 아예 자매선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더군……. 페데르는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했지. 그래, 망할! ‘시간이 필요하다’! 거절한 게 아니라는 거야!”
호기로운 부선장은 말이 되냐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디겔은 클루스도가 넌더리를 내는 것을 보다가도 여자들이 자매선의 갑판에서 저들끼리 모여 깔깔 웃는 것을 보자 저절로 로라를 떠올렸다. 이럴 줄 알았다면 로라도 데려와 함께 있었을 텐데…….
그때 페데르가 빨간 머리칼의 아름다운 여자를 옆구리에 끼고 선장실을 나왔다. 초록색의 머리칼을 평소답지 않게 풀어헤친 그는 디겔을 발견하고 호쾌하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디겔! 네가 없는 동안 항해가 고달팠다고!”
“징그러운 소릴.”
난 네가 불러서 내 아내와의 천국 같은 시간을 뒤로하고 와야 했다고. 디겔이 툴툴거렸다. 페데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비죽이더니 눈을 굴렸다.
“아내가 바람날까 무서운 거냐? 참나. 너도 맞바람을 펴!”
“헛소리 마, 로라는 지금 임신 중이야. 만삭이라고! 몇 달 후엔 아이가 태어난단 말야!”
“오, 그래?”
페데르는 몰랐다는 얼굴로 난감한 기색을 보이더니 손을 내저었다.
“됐어, 네가 없다고 애를 못 낳는 것도 아니고.”
“네가 결혼을 안 해서 모르는 거다.”
디겔은 완강하게 그를 비난했다. 페데르는 그러든지 말든지, 제 옆의 여자를 끌어안고 턱짓했다. 그러자 디겔은 그제야 여자를 자세히 보았다.
키도 덩치도 큰 여자는 짙은 눈썹과 새빨간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디겔에게 고갯짓해 인사했다. 별다른 말이나 특별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으나 그녀에게서는 위풍당당한 기세가 풍겨와 마치 대장부 같았다.
“스칼렛이다. 지금은 내 애인이지.”
페데르는 영준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다소 방만한 어투로 말했다. 디겔은 잠시 시선을 헤매며 그녀를 보다가 페데르에게 물었다.
“대체 어디서 만난 거야?”
“너 오기 전에 털었던 귀족 집안에서. 하녀로 일하던 것 같던데? 예쁘다고 눈독 들이지 마라, 맞바람 상대는 다른 여자를 알아봐.”
글쎄다, 내 생각엔 그 귀족을 죽일 암살자였다가 네가 대신 죽여주니 태세 전환한 것 같은데. 그리고 다음 타겟은 네가 되겠지. 디겔은 꿍얼꿍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다가 대화를 끊었다.
어쨌거나 다시금 뱃일은 시작되었다. 우홉피아주에서는 이전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비록 가끔 여자들과 선원들 사이에 마찰이 있었고, 불미스러운 일도 종종 일어났으며, 페데르와 스칼렛이 싸울 때면 배가 살얼음판이 되고, 디겔은 항상 로라를 그리워하고 클루스도는 배의 분위기를 흐리는 여자들의 존재를 고까워했지만, 딱 그 정도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디겔은 헤더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디겔은 당장에 섬으로 돌아갔다. 페데르와 클루스도는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다고 했으나 디겔은 완강했다. 그는 소식이 닿는 즉시 섬으로 갔고, 정원의 앞에서 로라의 품에 안긴, 자기 팔뚝보다 작은 갓난아기를 보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