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53)
바다새와 늑대 (152)화(153/347)
#외전1-2화
디겔은 아이를 보는 순간 푸른 잔디밭에 풀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로라가 놀라서 의자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디겔은 로라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아이를 안은 그녀를 안아 들었다.
수염이 듬성듬성 난 금발 사내가 펑펑 눈물을 흘리자 로라는 못났다며 깔깔 웃다가도 이내 그 얼굴에 무수히 키스했다. 아이는 여자아이였고, 그에 따라 이름은 ‘헤더’가 되었다.
헤더가 목을 가눌 수 있게 되고, 옹알이하고, 배밀이와 뒤집기를 하는 모든 순간을 디겔은 경이로운 일을 바라보듯 보았다. 물론 밤마다 울며 부모를 깨우는 능력은 정말로 경이롭긴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디겔은 모든 순간이 햇빛에 빛나는 물방울처럼 찬란하게 느껴졌다. 로라가 정원에서 아이를 안고 꽃잎으로 작은 뺨을 간질일 때 아이가 터트리는 방울꽃 같은 웃음, 시답잖은 일에 작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터뜨리는 울음, 생각보다 센 아이의 악력,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는 목소리…….
어느 날 로라가 말했다.
“난 사실 자기가 그 해적단에서 일하는 거 인제 그만둬도 되지 않나 싶어.”
“왜 그런 생각을 해? 페데르 녀석이 나쁜 놈은 아니잖아.”
“뭐, 그야― 해적질이 원래 위험한 일이기도 하잖아…….”
단잠에 든 헤더를 품에 안은 채 디겔의 품에 드러누워 있던 로라는 눈을 가물거렸다. 디겔은 로라의 머리칼을 쓸다가 아주 문득, 이것이 페데르의 귀에 들어가서 좋을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 가서 이런 말 하지 마. 알지?”
“알아.”
나도 그냥 하는 말이야. 로라가 웅얼웅얼 대꾸했다. 디겔은 그래, 하고 말하며 그 머리 위로 뺨을 문질렀다. 어쩐지 디겔의 마음은 여전히 술렁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디겔은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르고 지냈다.
아이가 걸음마를 하고 젖을 떼고, 기저귀를 떼고, 네 살이 되었을 때쯤, 언제까지 오지 않나 생각하던 우홉피아주에서 결국 먼저 소식을 보냈다. 배로 돌아오라는 이야기였다.
디겔은 도착한 전서를 뚱한 얼굴로 응시했다. 아니, 아이에게 엄마 아빠가 붙어있겠다는 게 그렇게 잘못된 일이란 말인가? 이놈들은 육아휴직 같은 거 안 줘?
“아빠 뭐 봐?”
“헤더, ‘뭐 봐요?’라고 해야지.”
“뭐 봐요.”
“편지야, 헤더. 아빠보고 배로 돌아오라네.”
헤더는 디겔의 품에서 ‘그게 뭐야,’하며 나무 블록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디겔도 딱 그 심정이었다. 이게 뭐란 말인가.
자신이 뱃일에 나서면 로라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지금이야 둘이 집안일이며 육아며 나눠 맡아 하고 있지만 디겔이 바다로 나가면 로라는 아이를 돌보랴, 집안을 챙기랴 힘들어질 것이 뻔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로라는 괜찮다며 기어코 디겔을 우홉피아주로 보냈다.
뒤늦게 생각해보건대, 그것은 로라가 특별히 너그러운 것이 아니었다. 아마 그녀는 디겔보다 모종의 분위기를 더 잘 느꼈던 것이리라.
디겔은 결국 다시 우홉피아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이상해진 배와 마주했다. 우홉피아주는, 그러니까……. 더 해적 같아져 있었다.
게다가 페데르는 이전의 멀끔했던 도련님이 아니라 웬 날건달처럼 변해있었다. 그는 더 이상 머리칼을 깔끔하게 묶지 않았다. 스칼렛이 가끔 잔소리하면 찔끔하며 의젓하게 굴었지만 그것도 한때였다.
“왜 멈춰 있어?”
“바트릭.”
얼마 전 아내가 임신한 바트릭은 디겔과 함께 귀환하라 호출된 선원이었다. 그가 피곤한 낯으로 디겔을 보자 디겔은 입을 달싹이다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이리 변했지?”
“무슨 소리야? 아, 하긴, 사 년 전에 비하면 좀 멋져지긴 했나.”
“멋져져?”
“배가 좀 근사해졌잖아.”
디겔은 딱히 그것만을 말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내 입을 다물었다. 지내다 보면 다시금 뱃일에도 빠삭해지고 익숙해질 것이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실제로 디겔은 어떤 점이 변했는지는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페데르는 더 이상 부유한 계층만을 약탈하지 않는다. 약탈한 물건을 육지의 가난한 이와 나누지도 않는다. 자매선은 이제 정말로 여자들의 차지가 되었고, 클루스도는 그것에 불만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페데르의 심기를 긁고 있었다.
페데르는 내심 디겔을 아내 치마폭에 싸여 사는 얼간이라고 본다. 스칼렛은 페데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돈과 몸을 보고 원하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디겔은 로라가 왜 자신을 굳이 다시 돌려보냈는지 깨달았다. 이 이상 더 로라의 곁에 있었다면 디겔은 이들과 어울리기 힘들어졌을 것이다. 그 소외를 미리 읽은 로라가 디겔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디겔은 생각했다. 뜻이 너무 달라져 버린 녀석들과 굳이 함께해야 할까? 그 순간 디겔의 머리에 이제 네 살배기가 된 헤더가 스쳤다. 만약 자신이 이곳을 벗어나 다른 삶을 산다면 우리 헤더 먹을 것, 입을 것은 어떻게 번단 말인가? 로라의 정원은 어쩐단 말인가? 디겔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이 가장 믿는 클루스도를 떠보기로 했다.
“페데르 말인데, 요즘 너무 방종하지 않아?”
“뭐?”
클루스도가 뜻밖의 말을 들은 것처럼 디겔을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눈썹을 휙 치켜올리며 기생오라비 같은 낯을 찡그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차 싶었던 디겔이 말을 얼버무리려 했으나, 이미 그 의중을 알아챈 클루스도는 까만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에효, 하고 한숨을 쉬더니 손을 내저었다.
“이번만 봐준다. 그리고 네 말대로 예전보다 건달처럼 구는 건 맞지. 그래도 그런 말 마.”
페데르 녀석이 그렇게 나쁜 녀석도 아니잖아, 안 그래? 클루스도의 말에 디겔은 무어라 하지 못하고 고개만 대강 끄덕였다. 클루스도는 혀를 차며 말했다. 난 그 녀석보다 스칼렛 그 여자가 더 짜증 나.
이내 줄줄이 이어지는 커플의 만행에 대한 뒷담에 디겔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디겔은 결국 시간만 허비하며 뱃일을 했다. 그러나 나름 순탄하던 우홉피아주에서 한 가지 금이 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페데르가 클루스도를 매춘부와 밤을 보내도록 부추긴 것이다.
항해하다가 육지에 정박한 그들은 식량과 물자를 보충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제국령이 되어버린 섬에 졸리로저를 내건 배가 대놓고 정박하고 있었으나, 제국의 경비병들은 황금 몇 푼에 그들을 못 본 척해주었다.
덕분에 공포에 떠는 것은 섬의 사람들뿐이었다. 디겔은 그들에게 일일이 우린 해치지 않아요, 하며 지껄이고 다니는 것보다 입 다물고 할 일만 끝내고 가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 시장 광장의 골목에 사창가가 있다는 것을 페데르가 알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클루스도는 불과 며칠 전, 바트릭의 아내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에 그를 데리고 섬을 다녀왔었다. 스칼렛이 자매선을 갖고 따로 여행을 간 나날 중이었다. 페데르는 자신을 쪼는 클루스도가 없는 보름가량이 설탕처럼 달게 느껴졌었는지, 혹은 스칼렛이 없어 날이 섰던 것인지 유독 돌아온 그를 못 견뎌 했다.
페데르는 사창가를 소재 삼아 클루스도의 자존심을 건들며 여성 편력이 없는 그를 ‘겁쟁이’, ‘소심한 놈’ 따위로 멸시했다. 디겔은 설마 저런 말로 그의 친우가 사창가에 들어갈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반쯤 사실이었다.
클루스도 역시 페데르가 자신의 의견을 묵살하는 것에 잔뜩 곤두선 상태였다. 까짓거 그런 곳쯤이야 한 번 가줄 수 있겠지만 그는 페데르의 뜻에 따르지 않기 위해 부러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클루스도가 도통 뜻대로 움직이려 하지 않자 페데르가 아예 독을 품게 된 게 발단이었다.
나중에야 들은 것이지만, 페데르는 클루스도를 보다 직접적으로 압박했다. 사내 구실 못하는 놈, 머저리로 부르다가 점차 그 모욕의 정도가 심해졌다. 종국엔 덜떨어진 선원들의 옆구리를 찔러 ‘이런 클루스도가 부선장 자리에 앉은 게 잘한 일인가’하는 소리를 뽑아냈다.
별생각 없이 배에서 잠을 청하던 디겔은 페데르가 와하하 웃으며 들어오는 것에 깜짝 놀라 해먹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페데르가 외쳤다.
“멍청한 새끼, 가란다고 진짜 가네! 야, 디겔! 클루스도 녀석이 깨끗한 척 고상한 척을 다 하더니 사창가에 들어간 건 알고나 있냐?”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뭐가 말이 안 돼! 그 녀석도 꼴에 사내놈이었다 그거지. 아― 다시 봤다, 클루스도!”
페데르가 혼자 낄낄 웃으며 선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디겔은 어안이 벙벙해져 그의 뒤를 따라올 클루스도를 기다렸다. 그러나 클루스도는 오지 않았다. 그 얼간이는 기어코 사창가에서 밤을 보내고 새벽이 되어서야 기어들어 왔다.
얼간이답게 얼을 내뺀 채 들어온 클루스도는 디겔의 황당한 표정과 대면하자 이내 얼굴을 분노로 물들였다. 그는 수치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디겔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너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닌 거야?”
“닥쳐, 디겔. 닥치라고.”
페데르 그놈이 당장 들어가지 않으면 사창가에 불을 지르겠다고……. 클루스도는 무어라 웅얼거리다가 이내 손에 얼굴을 파묻고 쓸어내렸다. 디겔은 뭐라고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클루스도도 페데르도 얼간이들 같았다.
서녘이 터오는 때가 되어서야 고개를 든 클루스도가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개자식, 두고 보자.”
그가 우홉피아주를 향해 반역을 도모하기 시작한 날이었다.
시간은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다. 페데르가 눈치채지 못 하게 은밀하게 이어진 모의도 점점 세를 불려 나갔다. 거의 십여 년이 지나는 동안 준비한 역모였다.
생각 외로 우홉피아주에게 앙심을 품은 이들이 많았다. 작게 물장구쳤다 생각한 일들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그들에게 덮쳐드는 것이다. 디겔은 이유야 어찌 됐든 우홉피아주에서는 발을 빼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우홉피아주는 점점 담대하고 거침없이 사람들을 약탈했고, 처음의 모습과 달라진 것을 체감한 이들을 모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심지어는 우홉피아주에게 앙심을 품은 이들을 섭외하기도 했다.
우홉피아주에 대한 보복으로 섬을 습격했다는 전보가 날아들었을 때엔 모두가 심장이 철렁했다. 심지어 바트릭은 아내를 잃고 자녀만이 섬에 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디겔 역시 로라와 헤더가 다치게 될까 두려웠다.
불안이 극에 달한 그들은 우홉피아주 밖에 세력을 만들어 전서를 주고받으며 따로 머물 섬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곳으로 가족들을 페데르 모르게 이주시키고, 때를 기다렸다. 역모의 날이 점차 다가오는 어느 날, 우홉피아주가 섬으로 귀환했다.
이주하지 않았던 척 자리를 지켜야 할 선원들의 가족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페데르는 가볍게 의아함을 나타냈을 뿐 그다지 연연하지 않았다.
그는 사창가 사건 이후로 자신이 클루스도의 기를 완전히 꺾었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클루스도가 나름 고분고분하게 군 탓이기도 했다.
게다가 셀리팜이라는 이름을 갖고 여행이란 명목의 또 다른 해적질을 하고 있던 스칼렛은 그에게 근사한 세력처럼 느껴졌으니 사소한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반역에 동참한 이들이 탄 배는 이미 섬의 반대편에 정박했을 터였다. 클루스도는 다음날을 반역의 날로 결정했다. 디겔 역시 로라와 헤더가 안전하게 피했음을 알고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작은 커터가 파란과 함께 우홉피아주의 섬에 도착했다. 웬 열세 살짜리 어린 소년이 커다란 검은 늑대와 함께 그들을 찾아와서는, 어린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아름답고 수려한 얼굴로 말한 것이다.
“제 아버지를 찾아왔는데요.”
소년은 여길 어떻게 왔느냐 따져 묻는 어른들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늑대를 쳐다보았다. 마치 ‘이렇게 하면 되겠지?’하고 혼자 묻듯이. 디겔은 소년을 보고 누군가에게 맞은 듯 얼이 빠져있다가 가까스로 클루스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년의 모습은 누가 봐도 클루스도의 아들이었다.
이미 수많은 선원이 클루스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 처음 보는 자신의 아버지와 눈을 마주친 소년은 어색하고 껄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클루스도는 넋이 나간 것 같다가, 충격에 빠진 것 같다가, 자책하는 것 같다가, 이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분개했다.
“계획을 바꾼다.”
클루스도가 분노에 차 말했다. 오늘.
“오늘 페데르의 목을 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