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54)
바다새와 늑대 (153)화(154/347)
#외전1-3화
소년은 자신을 키이엘로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아이는 자신의 말에 자신이 확신하지 못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디겔은 클루스도가 짙은 수치와 후회를 느끼고 있음을 알았지만, 부러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디겔은 당장 이 반란을 끝내고 헤더와 로라를 보러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클루스도의 세력은 그날 페데르를 급습했고, 결과적으로는 반쯤 승리했다. 페데르의 목을 따는 것은 실패했지만 결국 그들은 페데르의 우홉피아주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고 달아났다. 클루스도는 이를 갈았으나 이내 다른 선원들과 새로운 해적단의 이름을 정하고, 우홉피아주와 마주치지 말자며 학을 뗐다.
이미 우홉피아주에는 큰 피해를 입혔으니 앙갚음은 되었다. 클루스도는 이제 우홉피아주가 아니라 제 실수로 나타난 아들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때였다. 클루스도와 그의 아내 사이에는 이미 같은 나이의 아들이 있었다. 클루스도는 이 ‘밖에서 굴러온 돌’ 탓에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나 디겔은 그 모든 과정을 보진 못했다. 디겔은 그 전투에서 팔 한쪽을 잃었다. 다행히 쇼크가 오지 않았고, 지혈도 제때 해 목숨에 지장은 없었지만, 그는 정신을 차렸을 때 거북하고 기이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동료들의 눈을 잊지 못했다. 디겔은 섬마을로 향하며 한동안 눈물만 흘려댔다.
팔이 하나 모자란 반푼이가 되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하지만 가족과 다시 마주했을 때, 디겔의 걱정은 하잘것없다는 듯 버선발로 뛰어온 로라와 헤더는 그저 그가 살아있음에 안도했다. 세 가족은 디겔이 돌아온 그 날, 작은 집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 뒤 몇 달간은 평화로웠다. 디겔은 팔이 아물자 그 자리에 의수 대신 후크를 달았고, 헤더와 로라가 정원을 가꾸는 것을 구경하며 디겔도 원예를 배웠다. 다만 그가 더 식물에 손을 대려 할 때마다 로라는 디겔의 손을 찰싹 때리며 야단쳤다.
그동안 섬에서는 클루스도와 겔라 부인이 싸우는 소리, 뭣도 모르는 어린 소년들이 사생아를 보며 수군거리는 소리, 잡다한 불안과 앞날에 대한 갖가지 의견들로 시끄러웠지만, 적어도 그런 것들은 디겔과 로라의 정원 울타리를 넘지 못했다.
하지만 온화한 시간은 마치 봄처럼 빠르게 사라진다. 디겔은 출항을 준비한다는 클루스도의 말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굳이 다시 출항하려는 거야? 가족들과 오래 떨어져 있었던 사람들이 많잖아.”
“우홉피아주에 대한 소문이 바다를 떠돌고 있더군. 그 녀석들이 아직도 설치나 알아보기도 하고, 사실, 밖에 나가서 물건을 팔아오긴 해야 할 것 같아. 암만 섬에서 자급자족한다지만 물자는 많을수록 좋지.”
클루스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디겔은 우홉피아주 소리에 떨떠름한 티를 냈다. 그 녀석들 얘긴 꺼내지도 마. 요 몇 달 사이 로라가 우홉피아주에 있는 디겔을 얼마나 걱정했는지 새삼 알게 된 디겔은 우홉피아주가 마치 왕년에 엇나갔던 시절을 마주하는 것처럼 거북했다.
클루스도가 디겔을 돌아보며 말했다.
“출항한다면 자네도 갈 거지?”
“뭐? 나?”
“그래. 우리 섬에 자네만 한 항해사가 있나?”
“……. 난……. 우리 집사람하고 딸한테 말을 해봐야겠는데.”
디겔의 말에 클루스도는 싱겁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별다른 말을 덧붙이진 않은 채로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디겔은 문득 생각나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네 ‘아들들’은? 그러자 클루스도의 얼굴은 뚱한 표정에서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애들은 서로 잘 지내던데. 신기하긴 해, 싸울 줄 알았는데 나름 사이가 좋아 보이니. 문제는 안사람인데…….”
“그럴 줄 알았다.”
디겔이 한심해 못 견디겠다는 눈으로 클루스도를 보았다. 그는 디겔의 시선에 겸연쩍은 얼굴을 하다가 눈썹을 들썩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부간의 문제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던 디겔은 그저 클루스도에게 말했다.
“애들이나 잘 돌봐줘. 특히 키이엘로말야. 네가 신경을 안 쓰면 누가 신경을 써주겠냐?”
“우투그루가 잘하겠지.”
“이놈이 자기 할 일을 제 새끼한테 떠넘기네.”
혀를 쯧쯧 찬 디겔의 말을 뒤로하고 클루스도는 출항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늘어놓았다. 가족에게야 부족한 가장이겠지만 클루스도는 적어도 선장에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디겔은 그것을 유심히 주워들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자신도 딱히 가족 곁을 떠나 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클루스도 말마따나 제대로 된 항해사는 자신뿐이고, 어쩌면 로라나 헤더가 자신과 같이 배에 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홉피아주와는 상황이 달랐으니 말이다.
몇 차례에 걸친 상의 끝에, 디겔은 결국 출항 일자에 맞춰 다시금 바다에 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출항을 며칠 앞두고, 당연히 로라나 헤더도 함께 가리라 생각하고 클루스도에게 이야기하던 디겔은 단호한 거절과 마주쳤다.
“무슨 소리야? 네 딸과 아내가 같이 간다고?”
“그래, 뭐 우리가 해적질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괜찮지 않나? 헤더는 특히 큰 도시에 가고 싶어 하더라고.”
“이봐, 디겔……. 우홉피아주에 있었을 때를 잊었어?”
디겔은 클루스도의 난감한 어투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클루스도는 날렵한 턱에 듬성듬성 나기 시작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셀리팜 녀석들이 멀쩡했던 우홉피아주에 올라서 벌인 짓거리를 알잖아. 그 괘씸한 것들 탓에 페데르도 이상하게 변하고 말야.”
“뭐…… 지금 그 여자들이랑 내 가족이 같다고 보는 거야?”
디겔이 얼굴을 굳히자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클루스도가 재빨리 말했다.
“아니, 물론 그건 아니지. 하지만 내 말은…… 사람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자네 가족들이 배에 오르면 다른 여자들도 오르겠다고 할 텐데, 그 안에 셀리팜처럼 변할 사람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겠나?”
“웃기는 논리야, 클루스도. 그렇게 말할 거라면 우리도 언젠가 우홉피아주처럼 될 거라고 말하지 그래?”
“디겔.”
클루스도는 그 말에 대놓고 불쾌한 티를 냈다. 디겔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가 디겔은 주변의 인물들 역시 클루스도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분위기인 것을 깨닫고 눈을 꾹 감았다. 괜히 고집을 부렸다가 가족에게 눈초리가 향해서는 안 됐다. 디겔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디겔은 반쯤은 포기한 마음으로, 반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러한 결정을 로라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달리 로라는 태연했다. 마치 이미 그렇게 될 줄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녀는 오히려 시무룩한 디겔의 등을 팡팡 때리며 호탕하게 말했다.
“됐어, 내 남자는 바다에서 해적질하시고, 나는 땅에서 산적질을 하면 그만이야. 난 굳이 바다에 나가지 않아도 좋아. 난 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알고 있으니까.”
로라의 말에 디겔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열여덟 먹은 헤더는 잔뜩 기대하다가 엎어진 뱃놀이가 원망스러운 것 같았다. 착잡하기는 디겔도 마찬가지였다. 로라는 자신이 땅에서 더 할 일이 많다고 말했지만, 디겔은 로라가 자신과 함께한다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신이 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을수록 밖에서도 할 일은 많을 텐데.”
“꽤 귀여운 말을 하네, 여보.”
하지만 달라, 난 그다지 모험을 즐기지 않는다고. 로라는 그렇게 말하며 디겔의 뺨에 입을 맞췄다. 디겔은 그 말이 의외라고 생각했다.
로라는 어느 상황에서든 물러서지 않는 멋진 사람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의 학대에 뒤덮여있을 때도, 디겔과 로라가 젊을 적 흉년에 허덕일 때도, 디겔이 뱃일을 나간 시간 동안 홀로 아이를 키울 때도 말이다.
그러나 로라는 그런 디겔의 표정을 읽고 말했다.
“여보, 생각보다 많은 일이 이미 내 심력을 갉아먹었어. 난 힘껏 버티며 살 뿐이지 모험하면서 산 사람은 아냐. 이제는 겁쟁이에, 잃을 게 많은 사람이지.”
“내가…… 미안해.”
“뭘 또 미안해해? 내가 죽은 사람이 된 것도 아니고. 걱정 마, 여보. 이제 날 움직이는 건, 내 사랑하는 당신과 우리 딸이야.”
사랑하는 당신과 함께라면 난 다시금 어디든 갈 수 있는 사람이 돼……. 로라는 그렇게 속삭이며 꽃다발을 흔드는 것 같은 소리로 웃었다. 디겔은 로라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디겔은 결국 출항 직전까지 뾰로통한 헤더를 달래다가 뱃길에 올랐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디겔은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검은바다라는 이름을 내걸고 시작한 첫 항해에서 우홉피아주에게 습격을 받은 것이다.
철없이 배에 숨어들었던 마을의 소년들이 있음을 알아챈 어른들이 그들을 지키기 위해 분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홉피아주에 의해 몇 사람이 죽었고, 많은 이들이 부상을 입었다. 그때 단연코 돋보인 것은 키이엘로였다.
소년들을 따라 숨어들었던 것인지 배 안에서 나타난 키이엘로는 항상 데리고 다니던 커다란 늑대 위에 올라타 우홉피아주를 해치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키이엘로의 늑대가 소년들을 지키는 손을 덜어준 덕분에 우홉피아주에게 크게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디겔은 어린 놈들 중 저런 녀석이 하나라도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소년들에게 무지막지하게 화가 났다. 비단 디겔뿐만은 아니었으리라. 어른들은 소년들을 호되게 혼냈다. 그리고 우홉피아주에 대한 기이한 배신감과 복수심에 불타올랐다.
끝난 인연인 셈치고 각자 살길 살아가면 되는 것을 못 참고 기어코 우리를 공격한단 말인가? 급하게 회항한 배에서 어른들은 분노로 치를 떨었고, 클루스도는 그들을 모아 회의를 열었다.
그러자 의견은 반반으로 갈렸다. 화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녀석들을 쫓으며 살 수는 없다는 사람과 괘씸하니 쫓아가서 본때를 보여주자는 사람으로 편이 갈리자, 클루스도는 고민에 빠졌다.
디겔은 전자였다. 디겔이라고 우홉피아주에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로라와 헤더였다. 즉, 평온한 삶이었다. 투쟁으로 가득한 삶이 아니라.
“키이엘로 녀석이 나름 잘 싸우던데.”
“그 늑대가 잘 싸운 거지. 어린놈들이 겁도 없이 어딜 끼어든 건지…….”
사실 우홉피아주가 습격하지 않았다면 소년들이 숨어들었어도 그냥 별난 사건으로 치부하고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뱃일이란 것은 굳이 해적질이 아니더라도 평화롭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디겔은 소년들이 뭣도 모르고 겉멋만 든 채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배에 올라탄 것임을 알았다. 어른 입장에야 사고를 친 것이 맞다만, 그렇다고 그 아이들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디겔은 문득 의아했다. 키이엘로는 마을에서 겉도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새 소년들과 친해진 것인가? 그때 클루스도가 말했다.
“키이엘로를 배에 태워 뱃일을 가르칠까?”
“뭐?”
디겔은 놀라서 클루스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우투그루도 아직 배에 못 타게 하는 클루스도였고, 키이엘로나 우투그루나 둘 다 어린 애들이었다. 디겔은 헛웃음을 치며 눈썹을 찡그리고 클루스도를 보았다.
“농담이지? 키이엘로는 아직 열세 살이야.”
“알아. 하지만 한 사람 몫은 하는 것 같던데…….”
“클루스도. 그 늑대가 동물치고 영특해서 키이엘로가 안전했던 거지. 키이엘로는 아직 어린 애라고! 그 애가 설사 잘 싸운다고 해도 배에 태우기엔 일러!”
클루스도는 디겔이 격하게 반대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신도 그 점이 걸리긴 했던 모양이었다. 다행히 그 뒤 배는 무사히 섬으로 닿았다. 디겔은 우홉피아주의 습격으로 죽은 이들의 장례를 도우면서도 로라와 헤더가 배에 타지 않아 이들처럼 죽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유가족 앞에서야 할 수 없는 말이지만 마음은 그랬다. 그 이후로 디겔은 우홉피아주가 언제 자신들의 배나 섬을 덮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때때로 사로잡혔다. 잃은 가족의 장례를 치르며 펑펑 울고 오열하는 이들을 자주 보아서일지도 모른다.
디겔은 집 아래의 땅을 파기 시작했다. 로라가 아끼는 정원 한 편이 흉하게 파헤쳐졌지만, 로라도 디겔을 막진 않았다. 헤더만이 때때로 퉁명스럽게 왜 땅을 헤집느냐며 툴툴거렸다.
“그곳엔 나랑 엄마가 아네모네를 심기로 했단 말야. 왜 땅을 다 엎어놓는 거야?”
“헤더, 좀만 참아줘라. 지하를 만들 거야.”
“지하?”
헤더가 당황스러운 낯을 했다. 지하를 왜 만들어?
“만약에 우홉피아주가 이 섬까지 알아내 쳐들어올 때를 대비해야지.”
“우홉피아주? 그 아저씨들이랑은 끝난 거 아니었어?”
“한 번 우리를 습격했으니 언제 또 습격할지는 모르는 일 아니더냐.”
헤더는 디겔의 말에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더는 디겔이 약간의 편집증적인 면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로라도 말리지 않고 오히려 동의한다는 것처럼 지켜보고 있으니 그러려니 했다.
디겔은 기어코 섬에 머무르는 얼마간 조악한 지하실을 완성해냈고, 집의 마룻바닥에 붙은 문을 이용해 비상시에 꼭 들어가 피하라며 신신당부했다.
로라는 그런 디겔의 말에 헤더의 어깨에 팔을 둘러 딸을 끌어안은 채 말했다.
“나나 헤더 걱정 말고 여보나 좀 걱정해. 우리 둘이 당신 바다에 나가 있을 때마다 얼마나 심란한지 알아?”
“알지, 물론……. 그래도 걱정 말아, 내가 바닷바람 쐰 것만 몇십 년째인데.”
“그럼 우리도 걱정하지 마. 우리도 육지에서 산 지 몇십 년째니까.”
“엄마 말이 맞아. 아빠는 너무 걱정이 태산이야.”
디겔은 가볍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로라나 헤더나 둘 다 똑 부러진 사람들이었고, 대피소도 만들었으니 그들이 화를 입을 일은 없을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