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6)
바다새와 늑대 (15)화(16/347)
#15화
키이엘로가 횃불을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도멤과 우투그루가 있는 곳보다 아래에 있어서인지, 빛이 거의 안 들어왔다. 횃불의 불빛에만 의지해 걸음을 옮기는데, 앞에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주변을 살피느라 미처 그것을 보지 못한 키이엘로의 팔뚝을 붙잡아 그를 멈춰 세우고 그 인영을 응시했다.
그러나 곧 그 인영이 지나칠 정도로 움직임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조심히 다가갔다. 뭐지? 그림자만 사람 모양일 뿐 다른 물건인가? 어쩐지 미묘하게 코끝을 스치는 악취에 인상을 찌푸리고 가까이 다가가 횃불을 기울이자, 기둥에 묶인 사람이 보였다. 역시 사람이 맞잖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앞으로 갔다가 흠칫 놀랐다.
그것은 기둥에 묶인 채로 죽어있는 시체였다. 키이엘로도 숨을 살짝 들이켰다. 그러나 곧장 사체의 악취를 맡은 듯 인상을 찡그리며 코를 감싸 쥐었다. 시신의 앞쪽이 악취가 더 심하게 풍겨왔다. 나는 침착하게 그것을 살펴보았다. 코에 피 칠갑이 된 붉은 살덩이가 얹어져 있었고, 귀는 잘려 보이지 않았다. 약간 벌어진 입에는 피가 고여 있었다.
키이엘로가 천천히 시체를 보다가 뺨을 쥐어 피가 고인 입을 벌렸다. 피가 입술을 타고 한 줄기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그것을 보고 움찔 몸을 물렸다.
시체의 입안에는 혀가 없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시체의 코 위에 얹힌 살덩이가 본인에게서 잘린 혀인 것 같았다. 그때 키이엘로가 무언가 떠오른 것인지 피로 얼룩진 시체의 얼굴을 닦아냈다. 죽은 지 그렇게까지 오래되지 않은 듯 심하게 부패한 곳은 없었지만 그래도 시체였다.
꺼림칙한지 닦은 손가락을 몇 번 서로 문질러 털어낸 키이엘로는 시체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더니 느리게 신음을 뱉었다.
“정보원…….”
“뭐?”
“폭풍 때문에 항로가 바뀌어서 합류하지 못했다는 정보원 말이야. 이 사람이야.”
나는 키이엘로의 말에 입을 살짝 벌렸다. 갑자기 키이엘로는 시체를 묶고 있는 끈을 몇 개만 잘라내더니 앞으로 수그러진 시신의 목 뒤쪽 옷깃을 거칠게 내렸다. 그곳엔 인두로 지진 것 같은 흉터가 있었는데, 늑대의 목을 자르고 있는 문양을 그리고 있었다. 키이엘로가 숨을 몰아쉬었다.
“이 배…… 어쩌면 우홉피아주의…….”
“피해!”
나는 키이엘로의 말을 마저 듣기도 전에 소리치며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헉, 하며 키이엘로가 숨을 들이켜는 것과 동시에 키이엘로의 머리가 있던 쪽 기둥에 단도가 박혔다. 나와 키이엘로는 짧게 시선을 교환했다. 내가 브레딕의 검을 뽑아 드는 것과 동시에 키이엘로가 날아드는 단도를 검으로 막아 튕겨냈다.
잔당이 아직 배에 남아있었다.
나는 미간을 좁히고 단도가 날아오는 쪽을 보다가 시체가 묶인 기둥 뒤로 피했다. 키이엘로가 내 발치에 쭈그리고 앉아 횃불을 잡아드는데, 동시에 다시 단도가 박혀 들었다. 결국 손을 거둔 키이엘로는 인상을 찌푸리고 내 쪽으로 몸을 붙였다.
그래도 떨어져 있던 횃불을 아슬아슬하게 가져온 모양인지 눈이 다 부셨다. 나는 그의 손에서 횃불을 뺏어 들고 시야 밖으로 치운 다음 해적들이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곳을 보았다. 희미하게 빛이 나는 걸 보면 저쪽은 횃불이 아니라 램프를 쓴 모양이었다. 아마 램프의 위에 모포 따위를 덮어 빛을 줄였겠지.
내가 횃불을 근처에 있던 양동이에 처박아 불을 꺼버리자, 키이엘로가 놀라서 나를 보았다. 나는 뭐라고 하려는 그의 입을 틀어막고 기둥에 숨어 잔당이 있는 곳을 보았다. 확실히 이쪽이 어두워지니 역으로 저들이 있는 곳이 잘 보였다.
해적들도 우리 쪽이 보이지 않자 당황했는지, 천천히 접근하는 것이 보였다. 키이엘로가 그제야 내 의도를 알아채고 입을 다물자 나는 그의 입에서 손을 뗐다. 나는 주변을 살펴 나무판자를 조용히 들고 남은 손으로는 검을 꽉 쥐고 있었다. 키이엘로는 그런 나를 보더니 눈을 굴려 주변의 물건을 살폈다.
해적 중 한 명이 어느 정도 가까이 왔을 때, 나는 그의 머리를 향해 판자를 던졌다. 퍽, 하고 부딪히는 소리와 악 소리가 들리자 나는 앞으로 쏜살같이 튀어나가 검을 휘둘렀다. 어깨를 찌르고 옆구리 쪽으로 몸을 빼면서 등을 한 번 더 찌르자 옆에 있던 해적이 공격해왔다.
그 순간 키이엘로가 던진 물체가 빡 소리를 내며 해적의 머리를 맞췄다. 심상치 않은 소리에 움찔하고 보자 더 공격할 필요 없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해적이 보였다. 설마 머리가 깨졌나……?
나는 슬슬 키이엘로의 힘을 겁내는 도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키이엘로는 검을 막을 때만 검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손이나 발로 치면 해적들이 후드득 떨어져 나갔다. 그럴 거면 그냥 방패를 쓰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지만 내게 달려드는 해적으로 인해 더 이어나가진 않았다. 나는 몸을 뒤로 물리며 해적의 검 아래로 날을 밀어 넣었다.
쌩, 하는 쇠끼리 부딪는 소리가 나며 검을 쳐내는 순간 해적의 옆구리를 발로 후려쳤다. 수그러지는 해적의 손에서 검을 빼앗아 들고 브레딕의 검으로 해적의 등을 찍는데, 옆에서 다른 검이 날아들었다. 나는 서둘러 손아귀에서 브레딕의 검을 내던지고 주운 검의 날을 잡은 뒤 칼을 막고 순식간에 먼저 찔러 들어갔다.
그 뒤 찔렀던 해적에게서 검을 뽑아 날아든 단도를 쳐냈다. 잔당의 수가 많아서 난전이었다. 순간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에 재빨리 옆으로 몸을 피하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메이스가 바닥에 꽂혔다.
나는 메이스를 잡은 손을 밟고 목을 찔렀다. 얼굴에 피가 팍 튀는 것에 속이 돌연 울렁거렸지만 당장 게워내는 것은 참을 수 있었다. 젠장, 무기를 챙기긴 했어도 이렇게 본격적으로 전투를 할 줄은 몰랐는데! 순간 뒤에서 누군가 내 옆구리를 노리고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소릴 지르며 팔을 비틀어 검을 막았으나 옆구리가 얕게 베였다. 나는 남은 손으로 해적의 어깨를 찔렀다. 로트! 키이엘로가 날 부르며 내가 찌른 해적의 뒷덜미를 퍽 손날로 내리찍었다. 목뼈가 부러졌는지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망할, 키이엘로 놈 내 근방 3미터 이내 접근금지야. 헛생각하는 틈에 키이엘로가 다가와 물었다.
“괜찮아?”
“살짝 베인 거야.”
나는 옆구리를 살피다가 문득 방금 찌른 해적이 마지막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다행히 옆구리는 허리띠 위로 베었던 것인지 피가 조금 나왔지만 그뿐이었다. 다만 허리띠에 가로로 상처가 난 것은 조금 유감이었다. 나는 허리띠를 풀어 옆구리 쪽을 살폈다. 셔츠도 상처 난 곳의 모양을 따라 찢어져 있었다.
그래도 배에 구멍은 안 뚫렸군. 나는 한숨을 쉬고 셔츠를 갈무리해 간단히 지혈하고 다시 허리띠를 차는 동안, 키이엘로는 담요에 덮여있던 램프를 찾아 들었다.
“여기에만 잔당이 있을 리가 없지. 위에도 있을 거야.”
“최악의 경우 화약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겠어.”
내 말에 키이엘로가 인상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조금 치켜들고 코를 찡긋거렸다. 글쎄, 적어도 이쪽엔 없는 것 같긴 하다만……. 나는 조금 질린 눈으로 그를 보았다. 설마 냄새 맡은 거야? 내 말에 키이엘로가 민망하게 뒷목을 문질렀다.
“화약이나 불씨 냄새는 잘 맡는 편이라. 아무튼, 있더라도 많지는 않을 거야.”
특이한 능력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가 소서러 같은 특수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물론 그런 사람은 세상 모두를 살펴도 한 손에 꼽는다고들 하지만……. 원래 그런 사람들이 주변을 뒤지면 한둘쯤은 나오지 않던가.
나는 램프의 기름을 확인했다가 브레딕의 검을 주워 검집에 넣고 대신 쓰러진 해적의 검을 하나 더 들어 올렸다.
키이엘로가 눈썹을 들썩였다.
“검을 몇 개씩 쓸 일이 있어?”
“아니. 그런 거 가능할 리가 없잖아. 브레딕의 검 대신 이걸 쓰려고. 그리고 난 역시 검이 두 개 있는 편이 편한 것 같아.”
괜히 쓰다가 망가지면 우투그루한테 싫은 소리나 잔뜩 듣게 될 게 뻔했다. 내 말에 키이엘로는 램프의 뚜껑을 닫고 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런 것 같더라……. 누구한테 배운 것 같던데.”
키이엘로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자 그걸 보고 불쾌해한다고 여긴 것인지, 키이엘로는 얼른 덧붙였다.
“물자 조달을 하면서 가끔 본 육지의 기사들 검술이 그랬던 것 같아서. 책에서 나온 동작처럼 각이 잡혀있는데 속도가 빨라서 적이 따라잡지 못하는 것 같더라.”
나는 그의 말에 약간의 절망을 맛봤다. 그 말은 즉, 내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는 사람과 만난다면 내 실력은 형편없어진다는 것이었다. 나는 암울해진 기분으로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위로 올라가서 도멤과 합류하자.
내 얼굴빛이 흑색이었는지 키이엘로는 안절부절못하며 내 눈치를 살폈지만, 정확히 왜 내가 암울해졌는지는 알아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굳이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얼굴을 펴고 걸음을 옮겼다. 걷다 보니 금방 계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쇠가 부닥치는 소리가 들리자 나와 키이엘로는 한숨을 쉬고 검을 들었다. 그래, 이쪽에만 있었을 리가 없지. 우투그루와 도멤도 전투 중인 모양이었다. 이쯤 되자 이들이 굳이 기척을 숨기고 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들은 검은바다의 배를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 쪽에서 정박하기 전 이 배를 발견했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우릴 봤겠지.
게다가 아까 키이엘로가 알아챈 무언가에 의하면 이들은 아마 우홉피아주와 연관이 있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 단순히 배뿐만이 아니라 우리 쪽의 선원들을 모두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거 만약 모두가 대책 없이 술판을 벌였었다면 지금쯤 죄다 뒤져있었겠군. 키이엘로의 말에 따르면 화약은 많지는 않은 것 같고, 왜인지는 몰라도 배가 난파될 정도의 일이 있었던 모양이니 잠복하고 있던 거겠지.
하지만 이들을 정리한다 해도, ‘이들이 무엇에 당했는가’가 문제였다. 나는 내심 속으로 되뇌었다. 바다 괴물만 아니어라, 바다 괴물만 아니어라…….
계단을 최대한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올라간 나와 키이엘로는 우투그루와 도멤을 둘러싼 해적들을 보고 숨을 살짝 들이켰다. 아래층에 있던 해적보다 훨씬 수가 많았다.
“도멤! 조심!”
도멤의 뒤에서 칼을 내리치는 해적을 보고 키이엘로가 소리치고, 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던졌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대치하던 해적의 쇄골 쪽에 검이 박혀 밀려난 것을 본 도멤이 눈을 크게 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