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64)
바다새와 늑대 (163)화(164/347)
#7화
랄티아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하몬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마장석 기구에 무슨 문제가 일어나면 여기가 가장 먼저 터질 테니까 허튼수작하지 말란 소리다.”
“……여기가 터진다고요?”
“이제야 말할 기분이 드나? 그래, 여기가 가장 먼저 문제가 생기지. 내가 숨겨둔 돈이 원체 많았어야지. 마장석을 어마무시하게 갖고 있다, 이거야.”
하몬이 그렇게 말하며 턱짓했다. 두꺼운 이중 유리로 된 커다란 실린더 안에는 푸른색의 마장석이 가득 차 있었다. 몇 개의 실린더 안에 있는 마장석은 황동색의 관으로 연결되었는데, 그 기구는 선실의 천장까지 닿았고 반절 정도의 너비를 모두 차지했다.
거대한 기구의 유리 실린더를 부주의하게 탁탁 두드리며 하몬은 이마로 흘러내린 구불거리는 까만 머리칼 사이로 눈을 빛냈다.
“내가 마장(魔障)을 좀 공부해봐서 알지. 생성 연대를 알 수 없는 괴이쩍은 파란 돌조각이 만들어내는 기운은 하나만 있을 땐 별다른 점이 없지만, 집단으로 뭉치면 가끔 여러 성질을 띤다. 알고 있나?”
“……. 마장석마다 조합되는 방법에 따라 생성되는 에너지의 성질이 다르다는 것이 몇십 년 전쯤에 발견되었죠. 크기와는 관계가 없이 경도의 차이로 구별해서 조합할 수 있고…….”
“그래. 잘 아네. 그렇게 조합해서 현재까지 도출해낸 기운의 성질은 척력, 흡음력, 흡열 반응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마장석 기구는 척력의 경우 선박이나 기차 등의 에너지원으로, 흡열 반응은 냉매로 사용했고, 흡음력은 귀족들의 사무실 따위의 방음으로 쓰였다. 그중 척력은 가장 단단한 경도의 마장석들을 모아둬야 했다.
랄티아가 피스톨을 사용할 때 추출해 쓰던 힘도 척력이었다. 랄티아는 힐끔 하몬의 뒤로 보이는 커다란 기구를 보았다.
그가 말하는 것의 요지를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안정성이 보장되어야 하는 운반책에 쓰이는 힘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지만, 척력은 다른 것들보다도 다루기가 가장 까다로웠다.
간혹 실린더에 마장석의 분배가 맞아떨어지지 않으면 척력이 파이프를 따라 흐르지 않고 날뛰어 불꽃 하나 없이도 폭파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우홉피아주에 있었을 적, 랄티아는 마장석의 척력을 순간적으로 많이 짜내 일종의 급발진을 일으켜 포로들을 탈출시켰던 전적이 있었다. 하몬은 그런 랄티아의 생각을 읽은 듯 입을 열었다.
“소서러니까 다룰 수 있다고 생각 마라. 나는 출력을 달리할 때마다 일일이 파이프를 바꾸며 운행하고 있어. 알겠나? 내가 맞춘 파이프의 수용량을 넘어가면 곧장 펑! 터진다는 거야.”
랄티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그런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이 의아했을 뿐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하몬이 박식하다는 생각을 했다.
보통은 기구를 다룰 줄은 알아도 그 원리까지 해박하게 아는 경우는 드물었다. 랄티아는 하몬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단순히 반항하지 않게 하려고 흰소리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랄티아는 굳이 실험해보진 않았다.
소서러는 마장석의 배열과 관계없이, 단 하나의 마장석만으로도 기운을 추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든 함저 구역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마장석의 척력이 마지막에 필수적으로 따라와야 했다.
그 방법이 막혔으니 별수 없이 머리를 더 쥐어짜 봐야 했다. 그때 선실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클레인스가 떠밀려 들어왔다.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구르듯 넘어진 그의 뒤로 다른 이들도 비슷한 꼴로 굴러들어왔다.
랄티아는 깜짝 놀라 그들을 보았다. 브레딕과 베제, 네토르가 무어라 구시렁대며 고개를 들었다.
하몬이 혀를 쯧쯧 차다가 그들을 떠민 선원을 향해 대거리를 했다.
“안 그래도 좁아터지는데 뭔 놈들을 이렇게 처넣어?”
“선장님의 명령이에요.”
“또 인질 잡혀서 마장석 잘못 굴리면 어쩌려고?”
“그에 관해 선장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자네를 믿는다’고……. 선원은 그렇게 말하더니 하몬에게 대강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미련 없이 문을 닫고 떠났다. 하몬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랄티아는 힐끔 그를 바라보았으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다. 침착하게 마음을 굳힌 랄티아는 홀로 생각했다.
다시 혼자서 버텨야 하겠지만, 그렇게 암울하기만 하지도 않았다. 랄티아는 스스로 되뇌었다. 그러니까 다 괜찮다. 할 수 있어.
몇 번 다짐한 랄티아는 굴러들어온 사내들을 향해 다가가 가장 먼저 클레인스를 살폈다. 셔츠 자락이 피에 옅게 젖어있었으나 얼굴은 퍽 태연해 보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의 상태가 나아 보이지는 않았다.
“다들 괜찮아요?”
“아……. 개아프네. 좀 살살 하지…….”
저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비척비척 일어나 앉던 중 베제가 툴툴거렸다. 그는 콧대로 흘러내린 안경을 쓱 올리다가 랄티아를 보고는 착잡한 얼굴을 했다.
랄티아는 그의 표정에 연연하지 않고 물었다.
“왜 이곳으로 온 거예요?”
“자숙의 기간…… 뭐 그런 거?”
“클레인스는 그냥 제집 온 기분이겠는데.”
베제가 눈썹을 올리며 애매하게 말하자 브레딕은 벽에 기대앉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클레인스는 딱히 그렇지도 않다며 작게 속삭이듯 웅얼거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랄티아와 눈이 마주친 클레인스는 면구스러운 듯 낯을 수그렸다. 홍당무 같은 머리칼 사이로 그의 눈이 가려졌다. 그런 주홍 머리를 보며 하몬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알만하군. 죽이자니 아깝고 벌하지 않자니 괘씸하고. 같은 배를 타던 사이인데 완전히 내치자니 매정하고. 허, 참나. 봐줄 테니까 어서 맘 바꾸고 다시 잘 지내자, 그런 거지.”
“같이 지낸 짬밥이 긴 사람은 역시 통찰력이 남다르시네요.”
“에라이 염병할 놈아, 누구 복장에 불 지르냐?”
브레딕이 하몬에게 비꼬듯 감탄하자 하몬은 성질 나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랄티아는 하몬을 잠시간 유심히 보았다가 이내 그들에게 물었다.
“헤더는요?”
“디겔 아저씨 딸이시잖냐.”
베제가 날카롭게 응수하더니 한숨을 쉬며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인질로 잡은 것도 미안하고 자기 친우 딸이니 험하게 대하고 싶지도 않은 거지. 그래서 걔는 처벌도 안 받았고 딱히 자숙도 없어.”
“그나마 다행인 거야. 걔도 채찍 맞는다고 기분이 나아져? 그냥 아픈 사람만 늘어나는 거지.”
브레딕은 차분하게 말하더니 랄티아를 보았다. 랄티아는 클레인스의 부탁으로 마장석 기구 옆의 상자를 뒤지며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헤더…….
랄티아에게 헤더는 언니와 친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다였다. 왜 헤더를 인질로 삼았지? 어쩌면 헤더를 인질로 삼는다면 랄티아가 꼼짝 못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물론 랄티아는 디겔과 로트가 똑같이 쓰러졌을 때도 그랬듯, 헤더가 인질로 잡히든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헤더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상자 속에서 고약과 깨끗한 붕대를 찾아낸 랄티아는 그것들을 들고 상처투성이인 사람들을 향해 무릎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브레딕이 말했다.
“일이 틀어져서 미안하네. 결과적으로 나는 너랑 로트가 우투그루와 탈출하길 바랐는데.”
“…….”
랄티아는 클레인스의 손에 고약을 건네주며 브레딕을 보았다. ‘탈출’이라……. 물론 랄티아와 로트에게는 그것이 ‘탈출’이겠지만, 우투그루는 왜? 베제와 클레인스 역시 의아한 얼굴로 브레딕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한편 네토르는 그들이 그러든 말든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지친 것인지 모퉁이에 등을 기댄 뒤로 세운 무릎에 팔을 댄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거의 자는 것 같았다.
랄티아는 싸늘한 인상의 금발 부선장을 떠올렸다가 물었다.
“우투그루라는 분은 왜요?”
“그런 게 있어…….”
“클루스도 놈 때문이지.”
브레딕이 말을 얼버무리는데, 하몬이 대뜸 끼어들었다. 하몬은 휠체어에 팔을 대고 턱을 괸 채 새파란 젊은이들을 관망하고 있었다. 하몬의 말에 랄티아의 회색 시선이 그를 향하자, 하몬은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제 선원들에게도 엄하고 강경한 놈이다. 독선적으로 굴 때면 바트릭이나 디겔 같은 녀석들이 옆에서 제동을 걸어줘야 하는 놈이었는데 그것들이 죄다 뒤졌으니 앞으로의 꼴도 알만하지.”
“하지만 부선장들은 그의 아들이라고 들었는데요.”
랄티아가 그에게 대꾸하자 하몬은 잠시 입을 다물고 눈썹을 약간 올리며 그녀를 응시했다. 랄티아가 좀 전보다 대수롭지 않게 말을 섞으려 드는 것이 의외인 것 같았다. 그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입술만 달싹이며 대답했다.
“물론 가족에게 충실한 작자도 있겠지만 세상엔 그 반대도 많다.”
그런데 네가 몇 살이지? 하몬이 몸을 수그리며 생뚱맞게 묻자 랄티아는 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내 열여덟이요, 하고 짧게 말하자 하몬은 흠, 하고 소리를 내고는 휠체어의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클레인스 녀석과 동갑이구만.”
“제가 저번에 말해주지 않았었나요?”
“모른다, 이놈아. 난 위쪽 놈들에 대한 걸 굳이 기억하지 않아.”
클레인스의 중얼거림에 하몬이 투덜거렸다. 위쪽이라면 함저 구역보다 위에서 지내는 이를 말하는 것이리라.
으레 그러했는지 클레인스는 하몬의 야박한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더니 셔츠를 벗었다. 브레딕과 베제가 기겁하며 랄티아의 눈을 가렸다.
“야! 넌 창피함도 없어? 여자애도 있는데!”
“아……. 가려야 하는 거였나요? 어두워서 잘 안 보일 줄 알았어요. 그치만 바지는 안 벗었는데.”
“됐어요, 저 남동생들도 있었던 사람이라서.”
우리 집 남자애들은 목욕하다 벌거벗고 뛰쳐나오는 일도 종종 있었죠……. 소형견처럼 온갖 곳에 물을 뿌리며 집 안을 돌아다닌 남동생들을 잡아다 다시 욕탕에 처넣는 건 로트렐리와 랄티아의 일이었다.
랄티아는 추억을 상기하는 건지 화난 건지 분간 안 되는 목소리로 읊으며 제 눈을 가린 브레딕과 베제의 손을 치워냈다.
그거랑 이거랑 같냐며 무어라 따지던 베제는 정말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클레인스에게 ‘약 바르는 거 도와줄까요?’하고 묻는 랄티아를 보고 조용히 다시 벽에 기대앉았다.
“요즘 애들은 무섭다니까. 우리 프라세는 저렇게 크면 안 되는데.”
“어차피 여기서 당분간 동고동락해야 하는데 고작 웃통 벗는 거로 남사스럽게 굴면 그게 더 불편하지 않을까요? 치료는 해야 할 거 아니에요.”
“그건 그렇지.”
브레딕은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랄티아는 클레인스의 흉하게 갈라진 등에 고약을 발라주다가 고개를 돌려 하몬을 보았다. 하몬이 눈썹을 치켜올리자 랄티아는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그래서, 만약 또 탈출을 감행한다고 하면 이번에도 도와줄 건가요?”
그 말에 브레딕과 베제가 당황한 얼굴로 랄티아와 하몬을 번갈아 보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