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67)
바다새와 늑대 (166)화(167/347)
#10화
핏빛이었네, 핏빛이었네
그날 불타오른 그 골목
그 음습한 구석 모퉁이
그곳을 살라 먹은 그 불꽃
무슨 색이었나 묻는다면
핏빛이었네, 핏빛이었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핏빛이었다네
* * *
건물 밖에서 어슴푸레 들려오는 노래가 거슬렸는지 로지안나는 창을 닫고 커튼마저 쳐 버렸다.
깨끗한 방에 키이엘로를 눕힌 마담이 사람을 불러―이때 달려온 사람도 창부 같았으므로, 우투그루는 한결 더 기분이 나빠 보였다― 그를 치료하게끔 했다. 나 역시도 그 사람이 머리의 피를 닦고 거즈를 붙여주었다.
도멤은 여전히 자신이 이런 거리에 들어왔음을 경황없어하다가 로지안나가 차를 타주자 그것을 마시며 뒤늦게 의자에 기대앉았다. 나와 우투그루에게도 로지안나가 차를 내려주었지만, 우리 둘은 그것에 손도 대지 않고 둥근 탁자의 가장자리에 밀어두었다.
우리는 어떤 말이든 꺼내기 힘들었다. 조용히 침묵에 잠긴 실내에서 깡마른 여자가 키이엘로를 치료하는 것을 잠시 지켜보던 마담은 이내 문을 닫고 나와 방밖에 각자 앉은 우리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인제 대화를 좀 해볼까. 이게 다 무슨 일이니? 너흰 누구고?”
그 말에 우리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로지안나가 대답했다.
“키이엘로의 아버지가 이끄는 해적단 동료예요. 그나저나 의외네요. 전 얘네가 육지에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아니지, 이제 항해할 이유가 사라져서 육지에서 산적으로 활동하기로 했니? 로지안나가 비꼬듯 말하자 우투그루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날카롭게 응수했다.
“너야말로 창부 짓거리하는 줄은 알았지만, 이곳저곳으로 다니는 줄은 몰랐군.”
“그래? 정말 몰랐을까 싶네. 항상 뭐든 안다는 듯 떠드는 건 너희들이 세계 최고 아닌가?”
로지안나 역시 지지 않고 맞받아치자, 공교롭게도 그들 사이에 앉아 있던 도멤은 차만 마셨음에도 체한 얼굴을 했다. 나는 그를 동정 섞인 눈길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검은바다에서 바다새를 노리고 있어. 그걸 미리 알고 도주하려다 계획이 틀어져서 내 동생은 검은바다에 잡히고 우린 붕 뜬 상태야.”
“오.”
로지안나는 내 정리에 짧게 내뱉고는 어깨를 으쓱이며 마담을 보았다. 그렇다네요. 마담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새라느니 뭐니 알지 못할 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담은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담은 로지안나가 쳐둔 커튼을 살짝 들춰 밖을 보다가 물었다.
“아까 경비병은 무슨 일이니? 그놈들이 여기까지 오는 일은 드물지만 한 번 오면 쥐 잡듯 잡고 다녀서 피곤한데 말야.”
“…….”
나는 어색한 시선으로 바닥을 훑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우투그루는 그들과 말을 섞기 싫다는 모습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으므로, 나와 도멤이 어설프게 변명했다. 그냥, 오해받을 일이 좀 있었어요.
마담은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키이엘로가 피투성이였던 것만 생각을 해봐도 어느 정도는 짐작한 모양이었다.
“얼굴이나 이름이 알려졌거나, 아니면 뭐 확실한 죄목 따위로 쫓기는 건 아니지?”
“네.”
“그러면 됐다.”
그녀는 피곤한 낯으로 약간 늘어진 뺨을 손톱에 까만 칠이 된 손으로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검은 눈동자 위로 내려앉은 흰 속눈썹이 지쳐 보였다. 마담이 말했다.
“나는 이곳 주인 마담 릴리다. 그냥 릴리든 마담이든 이모든 편하게 부르렴. 어휴, 저 아이는 왜 또 저렇게 다쳤는지…….”
“키이엘로와 어떤…… 사이인가요?”
나는 별다른 뜻 없이 묻다가 자칫 이게 퍽 불순하게 들린다는 생각에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에 마담 릴리는 옆의 낡은 녹색 카우치에 몸을 파묻어 앉으며 말했다.
“지니아……. 그러니까 아이의 엄마와 같이 일했던 사이지. 저 애가 젖먹이일 때부터 봐왔어.”
그 말에 나와 도멤은 입을 딱 다물고 반사적으로 우투그루의 눈치를 보았다. 우리와 눈이 마주친 우투그루는 오히려 그것이 더 심기에 거슬렸는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나와 도멤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때 마담 릴리가 말했다.
“그 바다새 말인데, 일전에 신문 기사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구나.”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눈물의 바다에 있을 적 닿았던 신문을 말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나라고 말을 해도 되나 싶은 기분으로 마담을 바라보는데, 로지안나가 미간을 좁혔다.
“그건 그냥 지라시 아닐까요? 신문에 나온 사람과 이 녀석은 별개의 인물이겠죠. 우홉피아주가 쫓고 있다는 소릴 듣긴 했는데 이미 그 녀석들은 괴멸되었고, 무엇보다 이 녀석은 남자예요.”
“…….”
“…….”
나는 입을 다물었다. 도멤은 황망한 얼굴을 하다가 웃음을 참으려는 듯 벌벌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우투그루가 진저리를 치는 것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지라시가 바다새를 데리고 섬을 나갔다는 웬 못돼먹은 여자애에 대한 몇 달 전 신문 기사라면 이 녀석 얘기가 맞아. 이놈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거든.”
“오.”
로지안나는 눈을 둥글게 뜨며 나를 돌아보며 짧게 소릴 냈다. 그리고는 잠시 나를 향해 고개를 쭉 빼며 자세히 살피더니 짤막하게 말했다.
“감쪽같네.”
“대체 어디가?”
“으하학…….”
도멤이 참지 못하고 우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질린다는 기색으로 고개를 살살 저었다. 내 어깨 위에서 깃털을 정리하던 발카가 혀를 찼다.
『공작새처럼 성별이 두드러지는 종도 아니면서 그깟 암수가 뭐가 중요한데? 하여간 인간들이란.』
이해할 수 없다니까! 파란 새가 구시렁거리는 것을 뒤로하고 나는 눈을 굴렸다. 마담은 잠시 나와 발카를 보다가 빨간 입술을 오므렸다.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기색이던 마담 릴리는 이내 키이엘로를 치료하던 여자가 방에서 나오자 무어라 속닥이며 대화를 나눴다. 그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우투그루는 긴장한 얼굴로 깡마른 여자의 뒷모습을 거의 꿰뚫을 것처럼 노려보다가 마담에게 날카롭게 물었다.
“뭐라고 한 거지?”
“별거 아니다. 건물 문들 잘 잠갔는지 확인하고 애들 단속한 거야.”
“단속이요?”
“그래……. 네가 그 신문에 나온 여자애라면 단속을 해둬서 나쁠 건 없지.”
뜻밖의 말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우투그루는 마담 릴리의 말에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었는지 인상을 다시금 와락 찡그렸다. 도멤은 홀짝이던 차를 내려놓고 고개를 기울였다.
“단속이 왜 굳이 필요한가요?”
“너희들이 배 위에서만 지내다 보니 육지 사정에 어두운 것 같은데, 전설처럼 여겨지던 바다새의 목격담이 기사로 난 뒤로 육지는 한바탕 뒤집혔어. 학자들이며 해군, 해적 할 것 없이 신문사 문을 두들겼지……. 부잣집 귀족 나리들은 물론이고 말야. 그들이 전부 신문 기사가 났던 섬으로 몰려갔었지. 장관이었어.”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얼굴을 굳히고 마담을 바라보았다. 마담은 옆구리에 끼우고 있던 긴 담뱃대에 연초를 채워 넣고는 테이블 위의 램프에서 불을 붙였다.
흰 연기가 빨간 입술 사이로 한 차례 흘러나온 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섬이 지금 무슨 꼴인지 아니? 처음에야 귀족이고 뭐고 몰려가니 ‘옳다구나, 돈줄이다’ 하고 좋아했지. 관광지가 되면 섬 경제가 얼마나 살아나는지 알잖아? 그런데 그 섬은 딱히 관광자원이 훌륭한 것도 아닌데 심지어 준비도 안 되어있어서……. 바다새가 없다는 걸 알고 나니 귀한 분들의 흥미는 금방 떨어지고, 그 뒤를 해적이나 보물 사냥꾼 같은 무뢰배들로 이어지니 섬 하나 쑥대밭 되는 건 금방이었지.”
“……그럼 지금은…….”
“망했어, 쫄딱. 그것도 몇 주 전 신문에서 후일담으로 짤막하게 나온 걸 본 게 다라서 자세히는 모른다. 왜, 이거 너에게 불행한 일이었을까? 그렇다면 미안하구나.”
나는 마담의 말에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내게 불행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딴 섬 죄다 망해버리라고 염한 것이 나였다.
그러나 막상 망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기분이 미묘했다. 그곳에는 우리 가족이 살던 집도 있었을 텐데, 그곳은 어떻게 됐을까…….
하지만 딱 그 정도의 관심이었다. 망해 버린 섬사람들을 생각하며 깔깔대기엔 내 상황도 그리 녹록지 않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생각했던 것만큼 속이 후련하지도, 그렇다고 기분이 더럽지도 않았다. 그냥 더 알고 싶지도 않다는 것에 가까웠다. 그때 마담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바다새가 존재한다는 게 알려진 뒤로 파란색의 새란 새는 모조리 의심받기 시작했어. 오죽하면 귀족 어느 가문에서는 바다새를 구경하게 해주면 거금을 주겠다며 광고를 했단다. 그래서 제집에서 키우던 파란 앵무새까지 들고 가는 풍경이 퍽 웃겼는데…….”
마담 릴리는 낮게 웃으며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나는 약간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마담 릴리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왜, 어느 가문인지 알려줄까? 금덩이라도 받아오게.”
“아뇨.”
“그래, 잘 생각했다. 귀족 댁으로 파란 새를 데리고 간 사람이 들어가는 꼴은 보였어도 나오는 꼴은 못 봤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거든…….”
아직도 웃음기를 떨쳐내지 못하던 도멤의 입이 일자로 죽 펴지는 것과 함께 우투그루의 표정 역시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는 미약하게 몰려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발카가 긴장하며 내 목덜미로 머리를 부비며 파고들었다. 로지안나는 퍽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셀리팜이 얼마나 교양 있었는지 알겠지? 그 말에 우투그루는 들으란 듯 코웃음을 쳤으나 로지안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서 입단속 하라고 한 거다. 뭐, 우리 애들은 내 말을 잘 들어. 아이와 관련한 일이면 더더욱 잘 지켜주지.”
“계속 키이엘로를 아이라고 부르시네요.”
“…….”
도멤이 싹싹하게 말을 붙였으나 마담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담배를 몇 모금 뻐끔거리다가 도멤의 얼굴이 약간 어색하게 변할 때가 되어서야 대꾸했다.
“그 애는 지니아가 죽을 때까지 이름이 없었어. 그래서 아이라고 부르는 게 습관이 되었지. 사실 그 애도 내가 키이엘로라는 이름보다 그렇게 불러주는 걸 더 기꺼워하기도 했다.”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마담 릴리의 말이 마치 날카로운 송곳처럼 불쑥 겨눠진 기분이었다. 도멤 역시 당황한 얼굴로 더듬더듬 물었다.
“그럼 키이엘로라는 이름은…….”
“지니아가 지어준 건 맞을 거야. 아니, 아니지……. 이런 이야기는 함부로 하면 안 되지. 내가 늙더니 말만 길어지는구나.”
마담은 서둘러 말을 끊어냈다. 그녀는 얼마 피우지 않은 담배를 테이블 위의 화분에 대충 털어내더니 허리를 묶은 리본에 담뱃대를 끼워 넣었다.
우리에게 쉴 자리를 마련해주겠다며 일어나려는 마담에게 우투그루가 신랄하게 입을 열었다.
“작부 짓 하는 게 뭐가 그리 자랑스러워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