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73)
바다새와 늑대 (172)화(173/347)
#16화
릴리가 등을 떠밀자 아이는 머뭇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떠들며 뛰어다니던 아이들은 처음 보는 소년의 등장에 조용해졌다가 이내 그를 함께 끼우고 놀기 시작했다.
예쁘장한 소년의 생김새는 아이들의 경계심을 효과적으로 허물어주었다. 릴리는 작은 공터의 구석에 기대서서 아이들이 뛰노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릴리는 기운 없이 자고 있다는 지니아를 생각했다가 옅게 수심에 차 한숨을 내쉬었다. 고아원도 없는 마당에 좋은 입양처가 생겨 다행이라고 여겼건만 그마저도 따라주지 않았다.
하마터면 아이가 쓰레기에게 팔려 갈 뻔했으니 지칠 만도 했다. 늦지 않게 되찾아 올 수 있었으니 다행이었다. 릴리는 그 집에 입양 보낸 자신의 아이가 사흘 만에 멍투성이로 쓰레기더미에서 발견된 것을 잊지 않았다.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고 바닥을 보며 우두커니 상심에 잠겨있던 릴리는 왁자지껄 웃던 소리가 이전보다 하나둘 줄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서로 술래잡기나 하고 놀던 아이들의 수가 줄어있었다. 의아한 얼굴로 주변을 바라본 릴리는 아이의 부모들이 저마다 제 자식의 손을 잡고 자리를 뜨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남은 아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놀이를 이어갔지만 릴리는 자신을 흘기는 시선을 기민하게 파악하고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릴리는 카디건을 당겨 여미며 남은 아이들과 흙장난을 하던 소년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다가온 릴리에게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소년에게 릴리는 입을 달싹이다가 희미하게 말했다.
“……아가, 미안, 그만 가야겠다.”
그러자 아이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지나치게 포기가 빠른 모습이었다.
그새 친해진 것인지, 벌써 가냐며 안타까워하는 꼬마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한 소년은 릴리의 손을 잡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릴리는 잿더미 사이의 불씨처럼 반짝이는 눈동자와 마주치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갑작스레 마주친 석양처럼 터무니없는 아름다움이 도리어 릴리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아이의 손을 잡고 걸음을 끄는 릴리에게 소년은 발그레한 뺨을 올려 웃으며 물었다.
“내일 또 와도 돼요?”
“응……. 물론이지. 내일도 이모가 데리고 와줄게.”
릴리는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머리를 굴리며 살이 드러나지 않는 옷이 있던가 고민했다. 그러나 포주들에게 밑진 빚을 갚느라 먹는 빵 한 조각마저 아껴야 하는 판에, 옷이 몇 벌씩 옷장을 채우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래, 다른 여자들에게 수소문을 해봐야겠다. 한낮이었음에도 빛이 제대로 들지 않는 골목으로 들어서며 릴리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의 까만 머리칼과 눈동자는 제 어미처럼 빛을 받을 때면 석양처럼 붉은색으로 반짝였다. 그러나 아이의 집은 어둡고 음습한 골목 안이었다. 그림자에 삼켜지는 소년의 모습이 그때만은 유난히 릴리의 눈에 선명하게 밟혔다.
* * *
릴리의 배웅을 받은 소년은 방으로 들어가자 지니아가 일어나 있는 것을 보았다.
소년은 우물쭈물 그녀를 보다가 지니아가 팔을 벌리자 얼른 그 품으로 들어가 앉았다. 지니아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겨 주며 물었다.
“어딜 다녀왔어?”
“릴리 이모가 놀이터에 데려다줬어요.”
“놀이터?”
“네.”
아이들과 무엇을 하고 놀았다며 늘어놓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던 지니아는 고개를 주억이며 맞장구를 쳐줬다. 지니아는 아이가 이 땅의 사람이 사는 방식으로 자라나는 것이 탐탁잖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니아는 적어도 아이가 옳고 행복한 이로 자라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자고 홀로 다짐했다. 그때 소년이 말했다.
“저는 몰랐는데, 저 밖에 숲이 있대요.”
“숲?”
“네. 엄청 울창해서 동물들이 많대요. 그런데 들어가면 못 나온다고 조심하랬어요.”
아이의 말에 지니아는 창가를 바라보았다. 깊숙하고 좁은 골목에서는 숲은커녕 나뭇가지 한 자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이에게 그녀가 물었다.
“왜 못 나온대?”
“모르겠어요. 들어가면 길을 잃어버린대요.”
지니아는 내심 들뜨던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가기엔 위험한 곳인가? 그렇다면 아이에게 가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아이가 숲을 가야 할까.
자신이 살던 방식이 아니라 이 땅에서 섞여 살며 행복하다면 그만 아닐까. 지니아는 아이를 보다가 이내 소년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런 것은 아이가 크는 것을 보며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땅의 것들이 탐욕스럽고 추악하다고는 하나 지니아는 언젠가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간다면 아이가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자라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아이가 말했다.
“내일 릴리 이모가 또 데려다준대요.”
“그렇구나. 재미있었어?”
아이는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것으로 되었다. 지니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에게 글을 알려주고, 끼니를 때우며 하루를 보낸 지니아는 다음날 정오쯤 방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깨어났다.
머리맡에 빵이 놓여있는 것을 보아 아이는 이미 나간 것 같았다. 지니아는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다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릴리가 지니아를 보고 눈썹을 휘었다.
“아기는?”
“잠시 나간 것 같은데…….”
“그래? 들어가도 될까?”
지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비켜줬다. 낮은 탁자 앞에 아무렇게나 앉은 릴리는 지니아의 침대 머리맡의 빵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무슨 동전을 여기에 두니?”
“동전?”
지니아는 빵이 담긴 접시 아래에 모인 동전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포주들이 주는 거 아냐?”
“무슨 소리야. 언제 그놈들이 우리한테 동전 한 닢이나 줬나?”
“항상 있던데…….”
그 말에 릴리는 미간을 좁혔다. 이 자식들이, 나한테는 안 줘? 이거 한 번 바가지 긁으러 가야겠네. 허세 섞인 목소리에 지니아는 미미하게 웃었다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릴리의 말마따나 포주들은 동전 하나조차 남아나는 꼴을 못 봤다. 그런데도 얼마 전부터 계속 동전들이 있기에 그놈들이 일말의 정나미가 있었나 싶은 참이었다.
지니아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가 있으니까 주는 건가?”
“그럴만한 놈들이었으면 사창가 포주 노릇을 하고 있겠어?”
릴리의 날카로운 말에 지니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땅도 사람도 사고파는 작자들이라도 그네들 사이의 인정머리라는 게 있을 법해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릴리의 반응을 보면 딱히 그런 것은 또 아닌 듯했다.
지니아는 대충 빵을 씹어 먹고 방을 나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잎이 시들어 앙상한 가지밖에 남지 않은 수목 화단 앞에 앉은 아이는 흙장난을 하는지 무언가 뒤지고 있었다. 문가에 기대 아이를 보면 지니아는 릴리에게 눈짓하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뭐 하니?”
“엄마!”
아이는 지니아의 목소리에 활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귀여운 얼굴이 밝게 웃는 모습에 지니아는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아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지니아에게 뛰어왔다. 그러자 지니아의 뒤를 따라 방에서 나온 릴리가 웃으며 아이에게 말했다.
“혼자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니? 이모랑 놀이터 가기로 했잖아.”
“알아요, 안 잊었어요.”
아이가 지니아의 다리를 끌어안으며 릴리를 보았다. 지니아는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릴리를 돌아보았다.
“놀이터는 괜찮아?”
“위험하진 않아. 애들 노는 곳이라 다른 애들 부모들이 지켜보고 있기도 하고…….”
릴리의 말에 지니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내가 같이 갈까? 그에 릴리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서라. 몸도 안 좋은 게 어딜 나가? 내가 데리고 다닐게.”
“그렇지만…….”
지니아가 말끝을 흐리자 아이가 얼른 말했다. 릴리 이모랑 다녀올게요! 그 말에 지니아는 어깨를 늘어뜨리다가 아이의 앞에 쭈그려 앉아 소년의 뺨을 문질러주었다.
“이모랑 다녀올 거야? 그래도 돼?”
“네.”
아이의 말에 지니아는 흐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릴리에게 부탁한다며 웅얼거리는 지니아를 걱정하지 말라는 듯 주먹으로 약하게 툭 친 릴리는 소년의 손을 마주 잡고 걸음을 옮겼다.
지니아는 보통 사람들이 잘 겪지 않는 풍토병을 자주 앓았다. 그래도 나름 잘 버티는가 싶던 지니아는 출산 이후 점차 몸이 안 좋아지고 있었다.
릴리는 얇지만 몸을 모두 가리는 카디건을 걸치고 아이를 보며 웃었다.
“이모랑 나오니까 좋지?”
“네.”
“대답이 시원찮은데?”
“진짜예요.”
아이는 릴리에게 웃으며 옆구리에 끼우고 있던 헝겊 인형을 들어 보였다. 혓바닥을 비죽 내민 늑대 인형이 달랑달랑 흔들렸다. 릴리는 아하하 웃으며 아이를 안아 들고 놀이터로 향했다.
놀이터라고 해봐야 공터에서 아이들이 공을 차거나 소꿉놀이를 하는 정도였지만, 소년은 자신 또래의 아이들과 뛰어놀 필요가 있었다.
놀이터에 도착한 뒤 아이의 등을 떠밀어 놓고, 릴리는 길목에 기대섰다. 아이들의 부모들이 모인 곳에 가까이 가지 않은 채 소년을 바라보던 릴리는 다시금 자신에게 꽂혀 드는 시선을 직감했다.
부러 아무렇지 않은 시늉을 하며 릴리는 아이만을 바라보았다. 그때 아이들의 틈에 앉은 소년에게 한 여자아이가 물었다.
“있지, 넌 이름이 뭐야?”
“응?”
소년은 눈을 깜빡이다가 시선을 빗겨 내렸다. 나는 아만다인데, 너는? 아이가 재차 묻자, 소년은 머뭇거리며 인형을 주물럭거렸다. 릴리는 그런 소년을 보고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지니아는 아이에게 아직 이름을 주지 않았다. 사창가의 사람들에게나 불릴 이름이란 점에서 거부감을 느꼈고, 좋은 이름을 주고 싶은 탓에 고민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이가 아이로 불릴 수 있는 사창가라면야 이름이 있든 없든 상관없겠지만……. 릴리는 우물쭈물하는 소년을 보고 한 걸음 내밀어 가까이 걸어갔다.
“카이.”
릴리의 목소리에 소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릴리를 보고 있었다.
“카이, 아만다한테 이름 알려줘야지.”
“아…….”
소년은 눈을 깜빡이다가 옆의 아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 이름은 카이래. 이상한 어투였으나 어린아이들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렇구나, 하며 맞장구치는 천진난만한 목소리들 사이로 소년이 혼란스럽고 부끄러운 얼굴로 릴리를 바라보았다.
릴리는 아이에게 미약하게 웃어주고는 다시 뒤로 물러나 건물 외벽에 기댔다. 멋대로 이름 붙여 부른 걸 들키면 지니아에게 혼나겠는걸…….
릴리는 이것을 적당히 돌아가는 길에 소년과 자신의 비밀로 만들자 생각했다.
그렇게 며칠간 아이를 꾸준히 놀이터에 데리고 나가자 소년은 확실히 이전보다 즐거워 보였다. 내심 아이를 걱정스럽게 보던 지니아도 새삼스러운 걱정을 덜어냈다. 머리맡에 빵과 함께 동전이 놓이지 않게 된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
그러나 이변도 성큼 다가왔다. 여느 때처럼 아이를 데리고 꼬마들 틈에 등 떠민 릴리는 다른 어른들이 저를 쳐다보든 말든 외벽에 기댄 채 따사로운 햇볕에 옅게 졸린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 순간 아이들이 모인 자리가 소란스러워졌다. 릴리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보인 광경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 뛰어갔다.
아이가 제 또래 남자애를 때리고 있었다! 꼬맹이들이 왁왁 소리를 지르며 둘을 말리는 와중에 어른들도 놀라 달려와 아이들을 떼어놓았다.
릴리 역시 소년을 끌어안고 다급하게 살폈다.
“왜 그래? 왜 싸우고 있는 거야?”
릴리가 당황해 빠르게 물었지만, 소년은 아직도 분에 차서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얻어맞은 아이가 제 어머니에게 달려가 그들을 가리키며 무어라 하는 것이 보이자, 릴리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제 치맛자락 뒤로 소년을 숨겼다.
소년과 싸운 아이에게 어떻게 된 것인지 자세히 묻고 싶었던 릴리는 주변을 살폈다가 입을 다물었다. 공터에 있던 이들이 모두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릴리는 소년을 끌어안고 주춤 물러섰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날 선 시선에 굳어있던 릴리는 저도 모르게 아이를 데리고 골목으로 향했다.
몇 걸음 물러나던 발이 점차 빨라졌다. 그리고 곧이어 릴리는 소년을 안아 들고 굽이굽이 이어지는 골목을 내달리고 있었다. 좁고 길게 이어지는 길이 마치 미궁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