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75)
바다새와 늑대 (174)화(175/347)
#18화
“넌 또 뭐야? 이놈 어미냐?”
“남의 일에 관심 꺼. 아가, 가자. 얼른!”
사내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인 릴리가 아이를 잡은 남자의 손을 탁 후려쳐서 떨어뜨린 뒤 제 뒤로 보냈다. 그러자 아까 전 아이를 보고 달려갔던 창부가 릴리에게서 소년의 손을 건네받고 아이를 치마폭에 감싸 숨겼다.
그대로 그 장소를 벗어나려고 하는 순간, 사내가 이번엔 릴리의 머리칼을 잡아챘다. 악, 하며 릴리가 휘청이자 사내가 고함을 질렀다.
“누구 맘대로 데려가? 이 골목에 들어찬 연놈들이 창녀뿐인 걸 누가 모르는데?”
“이거 놔!”
“릴리 이모!”
여자의 품에 안겨있던 소년이 화들짝 놀라 릴리를 부르자 창부는 서둘러 아이의 등을 떠밀었다. 아냐, 이모들 괜찮아, 빨리 가서 삼촌 불러와, 어서!
그러나 소년은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이는 자신이 이곳을 벗어나면 벌어질 일을 알고 있었다. 릴리와 대거리를 하던 사내가 기어코 나쁜 말을 내뱉고, 이들을 때릴 수도 있으며, 심하면 그들이 살해될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소년은 그런 일이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만 일어나고 있음을 알았을 뿐 실제로 제 어머니나 릴리에게 벌어지리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얇고 위태로운 창문의 바깥으로 보이는 날붙이는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아이가 도통 갈 생각을 하지 않자 속이 탄 여자가 안절부절못하는 가운데 릴리가 외쳤다.
“아가, 빨리 가! 가서 삼촌 불러와, 어서!”
“하지만…….”
“입 닥쳐! 누굴 불러오려고!”
릴리는 다급하게 사내를 돌아보았다. 이런 대낮에 사창가나 전전하는 한심한 놈이 제대로 된 인간일 리가 없었다. 어쩌면 범죄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그렇지, 어린애를 데려가려 해? 릴리는 분에 차서 제 머리칼을 잡은 사내의 팔을 때리다 말고 그의 배를 걷어찼다.
그러자 사내가 악 소리를 내며 휘청이다가 욕설을 지껄였다. 릴리는 서둘러 몸을 물린 뒤 아이를 안고 뛰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곧장 일어나 주먹을 휘둘렀다.
뒤에서 머리를 얻어맞은 릴리가 와당탕 넘어지자 소년은 창부를 뿌리치고 릴리에게 달려갔다. 사내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확 휘둘렀다.
등골이 서늘해진 릴리가 서둘러 옆으로 굴러 피하자 은하수 같은 하얀 머리카락이 사각, 뭉텅이로 잘려 나갔다.
칼이다!
피부로 싸늘하게 닿아오는 위기감을 느낀 릴리는 황급히 골목의 벽에 바싹 붙었다. 자신이 무력적 우위를 점했단 사실을 알아챈 사내가 희번덕 웃었다.
그 순간, 사내를 향해 소년이 달려들었다. 릴리는 기겁해서 벌떡 일어났다.
“아가!”
“이 망할…….”
골목의 그늘진 사이로 날붙이가 번쩍 빛을 반사했다. 사내의 손이 휘둘러지자 소년은 순식간에 제게 날아드는 칼날을 목도했다.
기이하게도, 소년은 그 순간 공포가 아닌 강렬한 분노를 느꼈다. 풀이 돋은 흙으로 덮어둔 땅 아래에서 치밀던 불이 갑작스레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비좁은 골목에 때아닌 석양이 들어찼다. 붉게 달아오른 불길이 치솟아 사내의 팔뚝을 거칠게 할퀴고 들러붙었다. 화염이었다.
거센 열기에 사내가 비명을 지르는 것과 함께 릴리 역시 눈을 커다랗게 뜨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을 감싸고 허공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마치 핏빛처럼 새빨갰다. 사내는 자신의 몸에 옮겨붙은 불을 끄기 위해 버둥거리며 무어라 소리를 질러댔다.
황망한 얼굴로 불길을 바라보던 소년과 릴리의 눈이 마주치자, 나타났던 때처럼 불길 역시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다만 사내에게 붙은 불만은 미처 꺼지지 않아서 남자는 바닥에 몸을 부딪치며 악을 쓰고 있었다. 릴리는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소년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창부를 데리고 그 골목을 벗어났다.
뒤에서 사내의 비명이 귀곡성처럼 울려 퍼졌다.
절로 등골이 섬찟해지는 소리에 릴리는 입술을 꾹 물었다. 죽을까? 불에 타서? ……죽어 마땅한 새끼니까 아무렴 상관없다.
숨을 헐떡이며 내달린 릴리는 함께 있던 작부에게 몇 번이고 이번 일을 입 다물기를 약속받은 뒤 거칠게 지니아의 방으로 들어갔다.
기운 없이 누워있던 지니아는 난데없이 들이닥친 릴리를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릴리? 너 머리가 왜 그래?”
“너……. 너 숨기지 말고 말해. 너 혹시 소서러야? 마녀야?”
“뭐? 무슨 소리야.”
지니아의 어리둥절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릴리는 극도로 긴장한 채 달려온 탓에 숨을 허덕이다가 뒤늦게 안고 있던 아이를 내려주었다. 그러나 그 즉시 릴리는 깜짝 놀라 소년의 이마며 뺨과 목덜미를 허둥지둥 매만졌다.
아이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그에 지니아 역시 놀라서 다가와 소년을 눕히고 이불을 덮었다.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는 소년의 이마를 쓰다듬은 지니아가 사납게 물었다.
“아가가 왜 이래? …너, 머리카락이…….”
“골목에서……. 골목에서 일이 있었는데.”
릴리의 하얀 머리카락은 비스듬한 각도로 잘려 있었다. 릴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침착하려 애쓰며 말했다.
“아이가…… 불을 썼어.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갑자기 불을 만들어냈다고.”
그 말에 지니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부족한 설명이었는데도 무슨 상황인지 모두 알아차린 사람 같았다. 릴리는 지니아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뭔가 알고 있지?”
“……일단 아이부터 챙긴 뒤에 말하자.”
지니아는 비척비척 나가 수건에 물을 적셔왔다. 릴리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지니아도 딱히 릴리와 대화를 하고 싶은 건 아닌 듯 보였다.
아이는 금방 열이 내렸다. 그에 안도하는 릴리와 달리, 지니아의 얼굴은 계속 심각했다. 얼마간 멀쩡할 때 골목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던 아이는 다시 열이 올랐고, 그 뒤 사흘을 내리 앓았다.
튼튼하고 건강해서 감기도 잘 안 걸리던 아이가 사흘을 내내 열이 끓자 다른 창부들이 다 걱정할 정도였다. 그리고 릴리는 아이가 다시금 정신을 차릴 때까지 자신에게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는 지니아가 원망스러웠다.
자신은 지니아와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리고 소년을 제 자식을 키우듯 키운 게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지니아는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릴리는 화가 나는 건지 실망스러운 건지 분별할 수 없는 마음이 까맣게 타는 것 같았다.
이윽고 아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때, 릴리는 인제 와서 이야기해주겠다는 말을 듣더라도 무시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릴리는 막상 지니아가 입을 열자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미안해, 릴리. 난 계속 고민을 했어. 네가 나를 야만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말을 전하고 싶었거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릴리는 아연한 얼굴로 아이를 무릎에 앉혀 끌어안은 지니아를 바라보았다. 지니아는 릴리와 눈을 마주했다가 죽을 먹는 아이의 입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아가, 네가 앓은 이유는 불 때문이야. 먼 옛날……. 위대한 정령 아래 살던 우리에겐 그녀의 축복이 있었지.”
혼날 줄 알았는지 움츠러들었던 소년은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다 먹은 죽그릇을 밀어두고 지니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는 으레 지니아가 해주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릴리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지니아를 쳐다봤다. 지니아가 제국에 의해 거주지가 옮겨졌다가 사창가로 팔려 오게 되었다는 사실은 릴리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릴리는 한 번도 지니아의 고향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런 것들은 그리워 해봐야 하등 쓸모가 없었으니 입 밖에 내는 일이 없는 게 당연했다.
지니아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그 축복을 통해, 세상은 모두가 이어져 있음과 내딛는 걸음마다 밟히는 흙 한 줌에도 감사해야 함을 배웠단다.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지. 그러나 정령은 아주 오래 살고 강력했기 때문에, 단지 그녀의 영향 아래 있다는 이유만으로 큰 힘을 갖고 태어나는 이들이 있었어.”
릴리는 지니아가 정말 자신의 고향을 말하는 것인지 동화를 말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그러나 그런 의문을 해소해주지 않은 채로 지니아는 소년의 둥그런 머리를 매만졌다.
“우리는 그들을 ‘에른’이라고 불렀다. 에른은 거대한 힘을 갖고 있었고, 또한 불을 자유자재로 피워낼 수 있었어. 하지만 그들이 누군가를 지배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의 그런 힘은 오로지 다른 이들과 나누기 위해 쓰였지. 그들은 추운 겨울날의 한기를 가시게 하고, 무거운 것을 옮기는 이의 짐을 덜어주는 데에만 그러한 힘을 사용했어.”
제국이 우리가 살던 땅을 파헤치기 전까지……. 지니아의 눈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제국이 우리를 찾아오고, 거대한 자연을 훼손하고 우리 사람들을 강탈해갔다. 그것에 분노한 에른은 그들의 불과 힘으로 제국을 막아섰지만, 푸른 돌로 무장하고 온갖 질병을 갖고 온 그들에게 우리는 결국 패배했단다. 그럼 에른은 어떻게 되었을 것 같니?”
“모르겠어요.”
아이의 대답에 지니아가 말했다.
“내부의 불길이 기어코 그들을 살라 먹었고, 통제하지 못하는 힘은 그들의 몸을 고통에 밀어 넣었지. 두려워하고, 고통받고, 분노하다 다른 이들을 해쳤으니 그 대가를 받은 거야.”
소년이 미약하게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저도 항상 아파야 해요?”
“네가 아팠던 이유도 그것과 맥락을 같이 한단다. 너는 두렵거나 화가 나서 불을 피워냈지, 그렇지?”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니아는 아이의 머리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다른 말로 바꾸자면,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넌 불을 사용했다고 아플 필요도 없단다. 그러니 엄마와 약속하자. 앞으로 불을 꺼내지 말자고.”
“…….”
소년은 잠시간 지니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지니아는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옅게 한숨을 쉬었다. 아직 지쳤으니까, 마저 자렴. 지니아는 상냥하게 말하고 낮게 흥얼거렸다.
여기 아이를 잠자리에 눕히네…….
이 아이가 생명을 주는 어머니 대지를 알게 되기를…….
금방 잠든 아이를 뒤로하고 릴리는 얼굴을 마른 손으로 쓸어내렸다. 지독하게 담배가 당겼다. 릴리는 노래가 끝난 뒤에도 아이를 도닥이는 지니아를 노려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나랑 얘기 좀 해.”
아이를 두고 방 밖으로 나온 지니아는 릴리가 담뱃대를 꺼내 불을 붙일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녁의 검푸른 바람이 그들의 폐를 가르고 선득하게 들어왔다.
릴리는 그것을 치워내듯 연기를 한가득 빨아들였다가 내뱉으며 날카롭게 물었다.
“그래서 그 ‘에른’은 뭐야. 소서러인 거야?”
“아냐. 너희가 말하는 소서러는 그 푸른 돌을 다루는 사람이잖아. 에른은 그저 정령의 축복을 받아서 불을 다루고 힘이 강한 사람일 뿐이야.”
영 동화 같은 말에 릴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과민한 사람처럼 담배를 끼운 손가락을 잘게 흔들다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러니까 그 정령이란 게 뭔데? 그 정령이 소서러일 수도 있잖아?”
릴리의 물음에 지니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위대한 벨라우라그는 그 푸른 돌을 경멸했으니까.”
“벨…….”
‘벨라우라그고 자시고,’하며 퉁명스럽게 말하려던 릴리의 입이 중간에 일자로 다물렸다.
‘벨라우라그’? 릴리는 눈을 크게 뜨고 지니아를 돌아보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