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76)
바다새와 늑대 (175)화(176/347)
#19화
다시 보니 지니아의 얼굴이 희게 질려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릴리는 희미하게 물었다.
“벨라우라그라면, 초월자 아냐?”
“너희는 그렇게 부르지. 하지만 이상해……. 아이는 그 땅에서 나고 자란 것도 아니고, 나도 에른이 아니었고, 나의 부모님 중에도 에른은 없었어. 애초에 에른은 그리 많지 않아서 제국과의 전투에서 모두 죽은 줄 알았는데…….”
릴리는 지니아의 손이 벌벌 떨리는 것을 보고 눈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혼란과 두려움이 스며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 릴리는 불현듯 지니아의 저런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릴리는 황급히 담뱃대 안의 연초를 털어내고 지니아와 마주 보았다.
“뭐가 문제야. 왜 그래?”
“아이가…… 아이가 나중에 제국에게 잡혀가면 어쩌지? 소서러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릴리는 말을 잃고 입을 벌렸다. 제국은 소서러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제국이 독식해야 할 마장석을 사용하는 존재들이라 그런 것인지, 혹은 다른 고매하신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제국은 소서러가 발견되면 그 근방의 이들을 모두 ‘청소’했다.
주변인들이 소서러에게 어떤 사이한 것을 받으며 살았는지 파악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그들은 제국에게도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핍박을 받았다.
원래도 적었던 소서러는 그렇게 과거에 사냥당한 역사가 있었다. 지금이야 제국에서도 소서러에게서 관심을 거뒀지만…….
지니아의 말대로 ‘에른’이라는 새로운 존재가 있음을 제국이 알아챈다면? 그들은 소서러에게 그랬던 것처럼 에른을 사냥할까?
릴리는 벼락처럼 어떤 깨달음이 찾아드는 것을 느꼈다. 지니아가 그동안 입을 다물었던 이유는 그런 것들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정말로 에른이라면,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수도 없이 고민했으리라. 릴리는 울컥 서러움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원치 않았던 창부 신세, 원치 않았던 아이, 원치 않았던 재능과 원치 않았던 두려움……. 모조리 그들로선 어쩔 수 없었고 원치 않았던 일들뿐이었다.
심지어 이런 골목에서 틀어박혀 어른이 되는 것조차 그들이 바라지 않았던 일이다. 릴리는 지니아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끌어안았다. 그러자 지니아는 그제야 고개를 숙이며 벅찬 숨을 토해냈다.
“난 아직도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이런 건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릴리는 눈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곳에는 창부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이곳에 창부가 있길 바라는 작자들만 있을 뿐이다.
그 탓에 자신들은 팔려 오고, 원치 않는 상황에 놓인 채 살아야만 했다. 숨을 쉬는 때마다 빚이 늘고, 손님을 받아도 빚이 늘어난다.
돈은 오로지 포주의 주머니로 들어가 그들의 배만을 채운다. 살찐 창부는 가치가 없다. 세월이 지나면 나아질까? 아니다. 늙은 창부 역시 가치가 없다.
이미 모든 것이 벅찼다. 그런데도 아이는 계속해서 커가고, 감당하지 못할 것을 지닌 채 몸집을 불려간다. 릴리는 지니아의 두려움을 알았다. 자신들의 가련함을 알았다.
지니아가 말했다.
“견뎌야 해.”
“지니아.”
“내가 포기하면 아이는 무슨 죄야. 감당해야지.”
릴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만에 릴리는 희미하게 입술을 열었다. 우리는 괜찮을 거야. 지니아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빠르게 속삭였다. 무엇이 닥쳐오더라도 옳은 것을 택하는 의지를 버리지 않으리. 그러더니 지니아는 눈을 퍼뜩 뜨고 말했다.
“그래, 아이가 무슨 죄가 있겠어. 다 어른들 탓이지.”
그 말에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지니아가 이어 낮게 다짐했다.
“우리는 저 애를 잘 키워낼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도 내가 아이를 낳고, 우리가 그 아이를 번듯하게 키워내는 당연한 일을 방해할 수 없게 할 거야. 평범한 사람들은 다들 해내는 그 일을 우리도 해낼 거라고.”
지니아의 목소리에는 낮은 분노와 슬픔이 깔려 있었지만, 그 위에는 선한 의지가 존재했다. 릴리는 그 안에서 아이에게 자신과 같은 삶이 반복되게 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열망을 읽었다.
언젠가 지니아가 말했듯 깊은 진심이 담긴 말은 반드시 누군가의 가슴에 남아 영원히 기억된다. 그리고 그것은 저절로 릴리의 가슴에도 남았다.
그날, 하늘이 별 하나 없이 그저 검푸르게 조각났던 이유는 그 안에서 반짝이는 것들이 누군가의 다짐에 유성우가 되어 전부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쏟아진 유성우는 릴리가 모아 주웠다. 그리고 릴리는 주워낸 별 조각을 가슴에 심었다.
너 같은 사람들이 고통받게 하고 싶지 않아. 나와 같은 사람을, 너와 같은 사람을 이곳에서 건져내고 싶어. 그것이 내 가슴에 영원히 기억되는 너의 파편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아마 나의 영원한 꿈이 되겠지.
* * *
시간은 별이 흐르듯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흘러간다. 릴리와 지니아는 그 뒤로도 자주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고, 그것을 때로 아이가 들으리란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세월을 놓아주었다.
눈앞이 막막하던 젊음을 지나 그들은 반복되는 경험에서 나름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냈다. 그리고 그 축적 사이에서도 그들은 때로 실수하고, 좌절하고, 고통받는 틈새가 있었다.
그 틈새에서 숨 쉬는 아이는 자신에게 오는 애정이 어쩌면 죄책감이 원인이 아닐까 여기게 된다.
그렇게 아이는 열두 살 소년이 되었다.
소년은 얌전했고, 다시는 이전처럼 불을 내보이는 일도 없었다. 드러나기 전까지는 존재하는 것도 몰랐던 불길이니 내보이지 않는 것은 쉬웠다.
그러나 대신 남들보다 강한 악력은 골치였다. 무의식에 힘을 주면 문손잡이가 고장 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소년은 나무를 깎는 일에 몰두해서 힘을 조절하는 법을 스스로 깨우쳤다.
그 과정에서 소년은 사람들과 멀어졌다. 제대로 된 관계라곤 지니아와 릴리뿐이었지만, 그마저도 소년은 그들이 동정이나 자책에서 비롯되어 자신을 돌본다고 생각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자신을 향한 애정이 어떻게 나오는 것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아이는 이상한 어른이 많은 사창가를 거니는 것도 꺼렸기 때문에 주로 방에 있었다. 그러나 방구석에서 멍하니 있는 짓에도 이골이 났다.
그렇다고 릴리나 지니아를 보채기엔 아이는 너무 조숙했다. 그들을 더 성가시게 만들었다가 그나마 있는 애정마저도 사라질까 싶은 불안감이 생존본능과 가깝게 붙어 소년을 몰아세웠다.
소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 것도 질리고, 조각을 깎을 나무도 동나는 때에는 사창가를 빠져나와 항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주로 저녁놀이 질 즈음이라 푸르던 바다는 빨갛게 타오르는 벌판처럼 달아오르고, 뱃사람들이 정박하고 간 어선들의 돛대는 뾰족하게 솟아오른 앙상한 나무 같았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어부의 노래, 온 세상을 씻어버릴 듯 들려오는 파도 소리…….
바람에 풀과 나무가 흔들리듯 들려오는 파도 소리는 땅의 소리를 모두 뒤덮을 정도로 거대했다.
소년은 붉게 물든 숲처럼 타오르는 해 질 녘의 그 뜨끈한 바다를 볼 때면 땅의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언젠가 저기 수평선 너머로 떠난다면 지니아도 릴리도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잊을 수 있을 것이다.
소년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옆을 보았다. 항구의 끄트머리, 해변이 끝나고 절벽이 시작되는 곳에는 깊고 어두운 숲이 있었다.
들어가면 길을 잃는 숲, 그래서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는 숲. 그러나 이상하게도 소년은 그 숲이 그다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숲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그 안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마주 응시하는 것 같았다.
이리로 오라고. 너와 마주할 커다란 인연이 있노라고.
귓가로 메아리치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숲의 울렁임을 바라보던 소년은 그대로 고개를 돌리고 발을 떼었다. 골목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어느 날 소년은 방을 정리하다가 어릴 적에 갖고 놀던 늑대 인형을 발견했다. 항상 품에 안고 지내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러지 않았던 인형이었다.
그것을 보자 괜히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지니아가 역시 늑대 인형을 보고 웃었다.
“이거 릴리 이모가 사줬던 거지? 아직도 있었네.”
“네…….”
“이건 뭐야? ‘카이’? 누가 네 물건에 낙서한 거니?”
지니아는 헝겊 인형에 작게 써진 글자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소년은 지니아의 말에 헝겊 인형을 돌려 살펴보다가 난감한 얼굴을 했다.
릴리 이모가 이름이 없는 자신에게 즉석으로 만들어 줬던 이름을 누군가가 써둔 것 같았다.
소년이 쓴 것은 아니었으나 장난감을 돌려가며 노는 것은 흔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소년은 보통 자신의 물건에는 이름을 적는다는 것을 그때 깨우쳤었다.
소년은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릴리 이모가 제게 붙여준 이름이에요.”
“릴리가?”
지니아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소년은 괜히 어머니의 눈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니아는 말을 잇지 않고 소년을 바라보다가 단지 아이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에 고개를 꾸벅인 소년은 힐끔 지니아를 보았다. 그러자 지니아가 말했다.
“엄마가 네 이름을 너무 오래 안 주긴 했지. 내 욕심 때문에 네가 이름 없이 자랐구나.”
“…….”
소년은 멋쩍은 얼굴을 하더니 말했다. 굳이 안 지어주셔도 돼요. 물론 소년은 어머니가 애정 어린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러주면 좋겠다고는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지니아의 마음을 이해했다.
지니아는 소년에게 이름이 붙어 사창가에 존재가 남는 것을 꺼렸다. 이름이 붙고 그것이 불리며 살아왔다면 아마 지금쯤 소년은 ‘사창가의 아무개’로 정의되었을 것이다.
그 탓에 지니아는 ‘지니아’라는 자신의 예명이 아닌 진짜 이름조차 단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고, 소년도 그저 아가라고 불러왔다.
덜컥 배 속에 들어앉은 혹덩이 같은 아이에게는 과분할 정도의 친절임을 알았다. 그래서 소년은 항상 적은 것에도 만족할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의 말에 지니아는 옅게 웃다가 어느새 무럭무럭 자라난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말했다.
“아냐, 이렇게 하자. 엄마가 예쁜 이름을 생각해 볼게……. 그리고 릴리와 너에게만 알려줄 거야. 우리 셋이 있을 때만 불릴 수 있게. 어때?”
그 말에 소년은 파안하며 고개를 들었다. 정말요? 정말이야. 지니아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나중에 이곳에서 나가게 된다면 네가 다른 이들에게 너를 자랑스럽게 소개할 수 있도록…….”
소년은 지니아의 약속만으로도 마음이 부푸는 것을 느꼈다. 요즈음 릴리는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있었다. 창부의 일로는 어차피 돈이 남지 않는다.
그래서 자는 시간도 줄여가며 레이스를 짜고, 공단 자투리를 모아 퀼트를 만들어 팔곤 했다. 지니아 역시 릴리를 도와 같은 일을 하고는 있었지만, 부쩍 수척해진 지니아는 릴리의 일을 오래 돕지 못했다.
애초에 릴리도 지니아가 자신의 몸을 챙기지 않고 일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것을 보고 있자면 소년도 그간 만들었던 조각들을 몰래 팔아서 릴리의 쌈짓돈이 든 주머니에 부피를 보태곤 했다.
그녀의 가슴 속엔 씨앗처럼 박힌 유성우가 싹을 틔우고 있었다. 언젠가 이 골목에서 벗어나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여린 잎으로 마음을 간질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