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80)
바다새와 늑대 (179)화(180/347)
#23화
“넌 헤더와 친한 것 아니었어?”
“전 언니 외에는 이 배의 어느 누구와도 친밀감을 느낀 적 없어요.”
랄티아의 매몰찬 말에 베제는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브레딕은 허허 공허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 도멤이나 키이엘로가 들으면 좀 어이없겠다…….
물론 그 둘이 지난 한 달 동안 로트렐리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랄티아에게 친절했던 것은 맞았다.
또한 랄티아도 그들에게는 나름 누그러진 태도를 취하기는 했다. 근데 언니 친구들이 나한테 친절해봤자, 나는 부담스러울 뿐이라고. 하여간 연장자들은 연소자의 심기를 헤아려 주질 않는다.
랄티아는 고개를 설설 저으며 생각을 흩어내고 베제를 가리켰다.
“일단 가장 최선의 전달책은 딱 하나예요. 이 배에 있다는 가장 어린애. 어리니까 제압되고 발각될 위험성이 크기도 하지만 반대로 얕보이기 때문에 의심을 피할 수 있죠.”
“프라세?”
“걔가 보고 싶어 죽겠다고 그쪽이 난리를 치면 한심해서라도 내려보내겠죠.”
“아니, 뭐라고?”
“그러면 잘 설득하고 구슬려서 헤더에게 연락이 한 번 닿게만 해도 돼요. 다음은 헤더 쪽에서 해줄 일이니까, 답이 돌아오기 전까진 머리 굴릴 일이 덜해질 거예요.”
“저기요?”
내 말 듣고 있어? 베제가 연신 어이없다는 어투로 트집을 잡았으나 랄티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회색 눈으로 그를 똑바로 돌아보며 말했다.
“자, 생난리, 생떼, 어리광을 부리세요!”
“뭐라는 거야!”
베제가 왁 성질을 부리자 브레딕이 물었다. 멍석 깔아줘? 그에 그들의 하는 짓을 구경하던 하몬이 덧붙였다. 손뼉 쳐주리? 클레인스가 주먹을 쥐어 보이며 외쳤다. 힘내요, 형!
만담하는 것 같은 꼴을 묵묵히 쳐다보던 네토르는 정말 끼어들기 싫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냥 함저 구역의 사람을 보내면 되잖아?”
“위험하잖아요! 분명히 이상하게 생각할 거라고요!”
“큰 소리로 이런 걸 떠드는 너희가 제일 위험한 것 같은데.”
하지만 그 말에는 랄티아가 반박했다. 며칠 간의 실험 결과 어지간한 소음은 위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왔어요.
또랑또랑한 말씨에 네토르는 ‘어, 그래 너 잘났다.’ 하고 드러누웠다. 그때 클레인스가 고개를 퍼뜩 들더니 말했다.
“누가 와요.”
그 소리에 다들 입을 다물고 숨을 죽였다. 아니나 다를까, 곧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다가오는 게 들렸다. 문이 열리기 전에 무어라 도란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랄티아는 클레인스에게 몸을 기울였다. 뭐라고 하는 건지 들려요?
“……누가 위에서 우리를 만나러 왔다고 하는데요. 만나러 온 쪽은 별말이 없네요.”
“흠…….”
어차피 그게 누구인지는 곧 알게 될 터였다. 랄티아는 마음을 편히 먹고 문가를 응시했다.
헤더가 내려온 것이라면 번거로움을 덜어 좋았고, 그게 아니더라도 굳이 우리를 보러 내려올 사람이라면 연락책으로 일시적으로나마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문이 느리게 열렸다. 베제가 가장 먼저 눈을 크게 떴다.
“프라세!”
“형!”
소년이 반색하며 베제에게 다가왔다. 그와 함께 내려온 것으로 보이는 선원이 그들을 보고 어깨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나는 간다. 너무 오래 있지 말고 올라와. 식사 시간에 요한한테 너 왔는지 확인할 거야.”
“네, 고마워요!”
선원은 손을 설설 젓고 문을 닫고 자리를 떴다. 브레딕이 당장에 프라세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온 거야?”
“좀……. 어리광을 피웠죠.”
소년은 창피하다는 얼굴로 떨떠름하게 말했으나 베제는 그의 머리를 북북 박박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잘했다, 요 녀석! 프라세는 어색하게 웃다가 아, 하고 소리를 내더니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랄티아가 기민하게 그것을 알아채고 그에게 다가갔다.
“누가 우리에게 전하라고 한 건가요?”
“아, 네, 네. 근데, 저…… 말 놓으셔도…….”
“이리 줘봐요.”
랄티아는 소년의 말을 무참히 무시하고 손에서 종이를 뺏어 펼쳤다. 열네 살 애한테 너무하네! 베제가 극성맞은 부모처럼 외쳤지만 랄티아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편지에는 급하게 쓴 글씨가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빠르게 종이를 읽어내린 랄티아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들었다.
“헤더가 보낸 거예요.”
“뭐?”
브레딕이 놀라 되묻자 프라세가 대신 대꾸했다.
“헤더 누나는 지금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이 한정적이에요. 선장실 아니면 식당, 그리고 이전에 의사 일행이 쓰던 방 세 곳뿐이죠.”
“알만하군. 클루스도 녀석이 막은 거겠지.”
하몬의 말에 프라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이 마저 말을 이었다. 식당에서 헤더와 우연히 마주쳤는데, 헤더가 남들 몰래 소년에게 쪽지를 전해준 것이다.
피차 베제가 걱정되는 것도 마찬가지였던 소년은 청소년의 자존심을 버리고 어리광을 부려 기어코 함저 구역까지 왔다.
네토르가 그것을 모두 듣더니 낮게 꿍얼거렸다.
“로트 놈에게 고마워해야겠군. 저 꼬맹이가 아직 어리광을 피울 나이라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각인시킨 건 그놈이니까.”
그에 베제는 입을 벙긋거렸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사이에 편지의 글자를 모두 뜯어 살핀 랄티아는 침착하게 말했다.
“좋아요, 헤더의 말에 따르면 요한이란 간부도 지금 선내 분위기에 동조하진 않는 모양이에요. 아군이 늘었네요. 우리에게 몇 가지 선택지가 더 생긴 셈이죠.”
“여론전으로 갈 것인가 무력전으로 갈 것인가의 양자택일인가?”
브레딕의 말에 그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자, 하몬이 혀를 끌끌 찼다. 해적이란 기본적으로 무력으로만 권력 구조가 짜이지 않았다. 선원들의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선장이 독선적으로 군다면 선상 반란이 일어나 선장의 목이 잘리는 것이 허다했다.
그만큼 선장이란 ‘선원들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지휘를 잘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리고 하몬이 바라본 클루스도는 독선적인 면은 있었지만, 디겔과 바트릭이 그들 생전에 균형을 잡아주었고, 기본적으로 클루스도 자체도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는 눈이 뛰어난 자였다.
그러나 어쨌거나 결국 클루스도는 독선적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한 번 배반한대도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일 심보가 큰 사람이었다.
그러니 보통이었다면 부선장 둘이 탈선하고 디겔이 죽은 시점에서 분열은 예기되어 있었다. 하몬은 한기와 낮은 소음을 뿜어내는 마장석 기구를 응시하며 젊은이들에게 말했다.
“여론전은 하지 마라.”
“왜요? 요한도 우리 편이라고 하는데요.”
“상황이 여의치 않아. 모르겠느냐? 요한도 클루스도에 반대하고, 너희도 반대하고, 부선장 둘과 인망 있던 도멤과 디겔도 빠져나간 시점에서 왜 아직도 선원들이 그 녀석의 말을 듣는지?”
그 말에 랄티아가 미간을 좁혔다.
“그렇군요……. 그마저 없다면 이 해적선에 남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
하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브레딕은 입술을 깨물었다. 떠나거나 고향 섬으로 귀환한 선원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항해를 계속하길 바라고 있었다.
그들은 떠난 이들처럼 마땅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고향 섬으로 귀향하기에도 미련이 가시지 않은 작자들이었다.
결국 검은바다와 한배를 타고 평생 함께해야 할 사이가 된 마당에 단순히 옳은 행동과 바다새라는 이득을 두고 계산한다면 후자를 선택하는 선원이 많을 것이다. 게다가 검은바다의 고향 섬은 겔라 부인이 꽉 잡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쉽게 클루스도에게 반기를 들 수는 없다. 막말로 항해사가 죽었으니 그 자리를 대체할 존재도 필요했다.
그러니 지금 클루스도의 말에 반대하지 않는 선원들의 여론은 옳은 것을 택하라는 종용으로 쉬이 뒤집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긴 그래, 이 배에 수년간 헌신해온 우투그루를 제압하라는 명령도 따른 이들이다.
브레딕은 속으로 이를 갈며 고개를 들고 랄티아를 보았다.
“그래, 여론전은 버린 셈 치고. 그래도 우리에게 아군이 더 생겼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 말은 맞아요. 하지만 이 요한이란 사람도 과연 다른 것을 다 무시하고 무조건 우리를 도우라는 말에 동의해줄지는 모르겠네요. 아군보다는 중립…… 그러니까,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눈감아줄 사람이 생겼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어요.”
랄티아는 헤더의 쪽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헤더가 선장실을 오갈 수 있는 만큼 클루스도 선장의 계획을 예측할 수 있다는 점과 우리의 전서구 역할을 해줄 인력이 충당되었다는 거예요. 둘이 접선할 수 있는 식당은 요한의 구역이니 딱 적당해요.”
그 말에 베제가 프라세를 돌아보았다. 프라세는 눈을 깜빡이다가 자신을 가리키고 말했다. 제가 전서구예요? 랄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인스가 대화를 듣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프라세가 계속 오가면 의심을 사지 않을까요.”
“그건 간단하잖아.”
네토르가 끼어들었다. 그는 헝클어진 보라색 머리칼을 대충 쓸어넘기며 프라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베제가 보고 싶다고 어리광을 피우면서 베제 저놈 마음이 클루스도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식으로 연막을 깔면 되지.”
“뭣……. 이번에도 나야?”
“그럼 여기서 프라세를 물고 빨고 예뻐할 작자가 어디 있어?”
네토르의 말에 베제는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시큰둥한 낯으로 프라세를 돌아본 네토르가 말을 이었다.
“넌 그냥 올라가서도 베제 형이 보고 싶다, 베제 형도 날 보니 마음이 흔들리는 것 같더라, 하면서 적당히 떠들고 다녀. 그럼 알아서들 말 부풀려서 지껄이겠지.”
“그 정도야 가능하죠.”
프라세는 의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베제는 끙, 소리를 내면서도 별다른 수가 없다는 것을 납득했다. 헤더에게 보낼 답신을 쓰기 위해 클레인스에게 잉크와 펜을 받아 글씨를 적던 랄티아가 말했다.
“여론전이 불가능하니 결론은 무력전뿐이네요. 하지만 하몬도 우리를 눈감아 줄 테니 선내를 탈출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아요. 그 이후가 문제…….”
“내가 언제 눈감아 준댔나?”
하몬의 목소리가 랄티아의 말을 뚝 잘라내고 들어왔다. 랄티아는 사각이며 글씨를 쓰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휠체어에 앉은 하몬을 보았다. 랄티아는 바닥에, 하몬은 휠체어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랄티아는 그를 올려다봐야 했다.
랄티아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일전에 결국 클루스도에게 반대한다고 밝힌 것으로 결론 나지 않았나요?”
“유감스럽지만, 그렇다고 나를 네 녀석들의 탈출 일행에 끼워 넣는 건 곤란하군.”
하몬이 귀족적인 어투로 말했다.
“난 너희가 이 함저 구역을 나가는 것엔 상관하지 않지만, 마장석 기구를 망가뜨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그래, 앞서 언급한 요한과 같은 중립 분자라고 봐도 좋지. 하지만 난 너희를 도와주지도, 열렬하게 눈감아주지도 않을 거야.”
하몬은 고개를 기울이며 랄티아를 관조했다. 랄티아의 멈춘 손에 쥐어진 펜에서 잉크가 뚝뚝 떨어져 종이를 물들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느냐? 애초에 나는 어느 것도 확답하지 않았건만.”
내 입장에 대한 해석은 언제나 오로지 타자의 몫이었지. 그렇게 말하는 하몬은 마치 영주 성의 옥좌에 앉아 사람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입을 다문 이들 사이로 마장석의 푸른 빛만이 서슬 퍼렇게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