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84)
바다새와 늑대 (183)화(184/347)
#27화
그것도 단순한 경비병이 아니라, 어쩌면 해군일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 로지안나가 내 손을 잡고 어디론가 휙 이끌었다.
구르듯이 길의 모퉁이를 돌자 동시에 총성이 울리며 탄환이 바닥을 작게 콱 쪼갰다. 미친놈들이, 그렇다고 당장에 총을 쏘냐!
로지안나와 나는 그들이 마저 쫓아오기 전에 발을 옮겼다. 사창가까지 곧장 가게 되면 분명 골목까지 들어올 것이다. 그럼 은신처가 사라진다. 허파를 뱉을 정도로 빠르게 뛰는 수밖에 없나?
지금이야 저들도 단둘이니 총을 피하는 것도 따돌리는 것도 우스웠지만 수가 늘어나면 골치 아픈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 자명했다.
그때 어디론가 날 데리고 뛰어가던 로지안나가 다시금 모퉁이를 돌더니 대뜸 한 건물의 문을 열고 나를 떠밀었다. 우당탕 바닥을 구르는 내 앞으로 다급하게 들어온 로지안나가 문을 닫았다.
나는 시야를 가린 후드를 손끝으로 살짝만 걷고 실내를 살폈다. 뭐지? 빈집에 들어온 건가? 그러다가 딱 마주친 웬 여자의 얼굴에 나는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로지안나, 날 어디로 데려온 거야!
이윽고, 밖으로 제국군의 발소리가 들렸다. 문에 등을 대고 여자에게 조용히 하라는 듯 입가에 손가락을 세운 로지안나는 나를 보고 눈짓했다. 나는 대충 구석에 숨으라는 뜻이겠거니, 하며 몸을 낮췄다. 그 순간이었다.
똑똑.
“계십니까?”
나와 로지안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때 여자가 로지안나를 밀어내더니 문을 슬쩍 열었다. 나는 그것을 막으려다 로지안나가 손짓하자 반사적으로 멈춰 섰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니, 잠깐……. 혹시라도 로지안나가 날 팔아버릴 심산이라면…….
그때 까만 모직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낮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실례합니다, 마담. 혹시 어떤 남자와 여자가 이리로 도망쳐오는 걸 보셨습니까?”
나는 상황도 잊고 일순 떨떠름해졌다. 로지안나가 남자로 오해받았을 리는 없고, 저들이 말하는 ‘남자’는 나를 가리키는 게 분명했다.
난 여자다, 이 멍청이들아. 그러는 사이에 제국군과 마주한 여자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누가 뛰어가는 소리를 듣긴 했습니다.”
“어느 쪽으로 뛰어갔는지는 들으셨습니까?”
“모르겠어요,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겠거니 했거든요. 길을 가로지른 건 확실해요.”
그 뒤로 무어라 두런거리던 군인들은 짤막하게 인사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다시 한참이 지나서야 로지안나는 긴장을 풀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에 여자는 희게 질린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로지 씨, 이게 무슨 난리예요?”
“감사해요, 원장님……. 십년감수했네.”
‘원장’? 나는 그제야 실내가 아이들의 장난감과 낙서가 담긴 액자들로 어수선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린아이들이 많이 지내는 곳 특유의 어질러진 분위기가 포근했다.
원장은 담요를 갖고 우리에게 다가와 건네줬다.
“초여름이라 해도 아직 밤엔 추워요. 이게 다 무슨 일이래……. 저 총잡이들이 왜 둘을 쫓아요?”
“검문받기 싫어서 버텼거든요.”
“그냥 받고 끝낼 것이지, 목숨 걸고 객기는 왜 부리시는……. 어머!”
원장이 로브의 후드를 벗는 나를 보고 소스라쳤다. 나는 그 반응에 주춤 손을 움츠렸다. 그러자 원장은 감탄인지 한탄인지 모를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잘생기셨네요…….”
“…….”
로지안나가 흐느끼며 엎어졌다. 나는 떠름한 표정을 하다가 문득 머리카락이 눈가까지 내려와 가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실내도 그리 밝은 편이 아니었으니 원장이 내 눈을 자세히 본 것은 아니었으리라.
우리를 숨겨 준 것을 보면 사실 봤어도 크게 상관이 있진 않으리라 생각되지만. 그나저나 머리카락이 많이 길었군……. 나는 까맣게 시야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올렸다.
하기야 반년 동안 따로 손 보지 않았으니 원래도 조금 덥수룩하던 머리가 길어진 것은 당연했다. 나중에 자르든 묶든 해야지.
작게 안도한 나는 아예 오열할 기세인 로지안나의 옆구리를 손으로 찌르고 몸을 일으켰다.
“여기가 어디야?”
“아는 고아원. 이쪽은 이곳 원장님이셔.”
고아원? 로지안나가 고아원을 알 일이 있나? 날씨는 선선했으나 폐가 터질 듯 뛰고 긴장했던 탓인지 손이 차가웠다. 나는 창백하게 질린 손을 마주 잡으며 시답잖은 생각을 밀어두고 웅얼거렸다.
“돌아가야 하는데.”
“여기서 좀 있다가 가자. 제국군 놈들은 그냥 경비병보다 지독해. 아마 오늘 하루 종일 뒤지겠지.”
“여기도 안전하진 못할 거 아냐.”
“고아원을 뒤지면 쓰나.”
로지안나는 그렇게 말하더니 벌떡 일어나 원장을 보며 웃었다. 도와주실 거죠? 그에 원장은 에효, 하며 한숨을 쉬다가도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에게 손짓했다.
그때 방문을 열고 한 아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원장님, 누구예요?”
“어머.”
여덟아홉 정도 먹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금색 머리카락과 둥글고 또렷한 갈색 눈이 귀여운 아이였다. 그렇게 부산스럽거나 소음이 큰 것도 아니었는데도 용케 듣고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아니면 잠을 못 이루고 있었든지.
원장은 서둘러 아이에게 다가가 앞에 몸을 낮춰 앉고는 들어가서 자라며 아이를 달랬다. 아이는 나를 낯설어하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로지안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로지 씨다!”
“에스델.”
로지안나는 어색하게 아이를 불렀다가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불량하기까지 한 평소의 태도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깨워서 미안해요. 우리가 조금 바쁜데, 시간도 늦었으니 다시 잠자리로 돌아가는 게 어때요?”
“그냥 갈 거예요?”
“아직 안 정했어요. 머물게 되면 에스델한테 제일 먼저 알려줄게요.”
에스델은 로지안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꼭이에요. 하며 몇 번이고 확신을 받아낸 뒤에야 방으로 쏙 들어갔다. 아이가 들어가 닫은 문을 바라보는 로지안나의 눈길이 더없이 따뜻했다. 원장은 난감한 얼굴로 로지안나를 보았다.
“애가 깨어있는 줄은 몰랐네요.”
“괜찮아요,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좋지 뭘.”
그러더니 로지안나는 원장의 뒤를 따르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별다른 말 없이 로지안나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사실 오래 걸릴 것 같다고 해서 지금 당장 사창가의 일행에게 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원장은 반지하의 방문을 보여주었다. 문 앞엔 온갖 짐 더미가 쌓여있어 로지안나와 내가 도와 치워야 했다. 우리가 방으로 들어가자 원장은 재차 꾸벅이며 미안해하더니 문을 닫았다.
우리야말로 미안해할 입장인데 굉장히 주객 전도된 느낌이군……. 그러나 동시에 나는 원장이 나간 문가를 노려보았다. 밖에서 수고스럽게 짐 더미로 다시 문을 막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밖의 다른 기척이 있진 않은지 살피던 나는 로지안나에게 물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응, 걱정 안 해도 돼. 셀리팜과 릴리 이모와도 아는 사이라서.”
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시선을 거뒀다. 그 정도면 로지안나의 말마따나 믿어도 좋을 것이다. 새삼 나는 우리의 수중에 제대로 된 무기가 없다는 것을 상기했다. 일정을 짜서 섬을 뜨기 전에 무기도 사야겠군.
제국군이 썼던 것과 같은 화승총을 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이내 그런 것을 아무에게나 팔지 않을뿐더러 가격이 부담스러울 것이란 사실에 도달하자 나는 생각하길 그만뒀다. 너무 혼자 고민하는 습관이 든 것 같단 말이지.
대가리 좋고 체력도 좋은 놈은 셋이나 더 있으니 굳이 내 기력부터 소모할 필요는 없지. 나는 짚단이 쌓인 곳에 대충 앉아 비스듬히 누웠다. 로지안나 역시 옆의 짚단에 앉아서 한숨을 쉬고 있었다.
로지안나가 퉁명스럽게 토로했다.
“심심하게 몇 시간은 죽치고 있어야겠네. 하필 제국군일 건 뭐야.”
“그래도 판단은 잘했어. 만약에 들켰다면 도망가기 여의찮았겠지.”
마땅한 무기를 가진 상태는 아니었지만, 대체로 창이나 검을 들고 다니는 경비병과 총을 들고 있는 제국군을 비교하자면 전자가 상대하기는 쉬웠다. 일단 창과 검은 사거리를 벗어나기만 하면 도주하는 것은 간단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총의 경우엔 가까이에서 도망친다면 뒤에서 쏜 총알에 맞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것을 따지자면 앞뒤 안 따지고 도망친 것이 차라리 나았다. 일찍이 총의 사거리에서 벗어난 채로 피하면 그 뒤엔 재장전하는 틈에 더 멀리 도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단 별다른 말이 없으면 오늘 밤은 여기서 보내는 거로 생각해야겠군.”
“이 고아원은 어떻게 알게 된 거야?”
특별히 불쑥 의심이 솟아나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로지안나가 내 말에 입을 다물며 사뭇 딱딱하게 경직된 얼굴을 하자 나는 눈썹을 추켜 올리며 물었다.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어?”
“……그건 아냐.”
로지안나는 자신이 대답하지 않으면 내가 그들을 못 믿을 것이라는 걸 깨달은 듯 퍼뜩 고개를 들고 나를 돌아보았다.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 보자, 로지안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내…… 아이를 이곳에 맡기면서 알게 된 거야.”
천만뜻밖의 이야기였다. 나는 상상을 훨씬 상회하는 이야기가 나오자 당황해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내 반응에 로지안나는 짧게 웃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문득 앞서 본 에스델을 떠올렸다. 내 표정에서 대강의 생각을 알아챘는지 로지안나는 나직하게 말했다.
“에스델이 내 딸이야.”
“뭐…… 아니, 잠시만……. 너 몇 살이야?”
“스물일곱. 에스델은 아홉 살이지. 별것도 아닌 이야기야. 어렸을 때 하인으로 팔려 갔고, 덜컥 아이를 가져서 낳았는데 키울 수는 없고…….”
로지안나의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단조로운 어투와 달리 나는 멍청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가까이 있지 않을 것 같던 이야기가 코앞에서 오가자 당혹스러운 감상이 더 컸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다시 멍하니 벌리기를 반복하다가 물었다.
“왜…….”
그러나 나는 금방 도로 입을 다물었다. ‘왜’라니? 뭘 물어보려고? 왜 아이를 가졌냐고? 왜 애를 낳았냐고? 왜 애를 손수 안 키우고 고아원에 보냈냐고?
전부 지나치게 선을 넘는 질문들이었다. 나는 애써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입을 열었다.
“아이는 네가 엄마인 줄 모르는 것 같던데…….”
“알아서 뭐 해? 생각해봐. 해적질이나 하는 사람, 남자들 이부자리에 들어가 정보나 빼 오는 더러운 여자, 어릴 때 애나 밴 뒤에 갖다 버린 냉혹한 사람……. 누가 그런 작자를 엄마로 두고 싶어 하겠어? 내가 그 애를 데려와 봐야 나랑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고 가난이나 대물려 주지, 훌륭하게 키울 수나 있겠어?”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로지안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어두운 창고에서 음울하게 빛났다.
“내가 엄마라는 걸 알리지 않은 이유는 딱 하나야. 알아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로지안나는 그렇게 말하더니 흐릿하게 넘어오는 반지하 창의 달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