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85)
바다새와 늑대 (184)화(185/347)
#28화
나는 입을 다물고 로브 자락만 어색하게 매만졌다. 로지안나가 말했다.
내가 멀쩡한 삶을 살 수 있었던 모든 순간이 멀쩡하지 못했어. 로지안나는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웃었다.
“이게 얼마나 끔찍한지 몰라. 다른 사람들은 공부하고 일을 배울 시간에 나는 가난에 허덕이며 진창으로 빠져야 했다는 게…….”
나는 로지안나의 말에 아버지가 죽은 이후의 내 삶을 떠올렸다. 하지만 내 경험과 로지안나의 경험은 또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가난이 생각보다 훨씬 사람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파괴한다는 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 누리는 것들, 먹는 것, 입는 것……. 그런 모든 것이 벅차지는 순간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야 하는 순간과 맞닥뜨리게 된다.
로지안나가 말했다.
“아이를 낳고…… 이 고아원에 아이를 맡겼어. 애 아빠? 기대도 안 해. 대충 혼자 전전하면서 살다가 셀리팜을 만났고, 지금 하는 일을 내가 맡겠다고 한 뒤에는 릴리 이모랑 만나게 되었지.”
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물었던 것은 고아원과 어떻게 닿은 사이냐는 질문이었으니 이미 충분히 대답이 되었다. 더 말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로지안나는 흐리멍덩한 달빛을 응시하며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애 아빠를 다시 조우했어. 마담 릴리의 건물에서……. 사실 그때가 잘 기억이 안 나……. 정신을 차려보니까 온 방이 피투성이였어. 너무 화가 나서 그 자식을 죽여 버린 거야. 이모와 치우느라 고생했었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로 엉망이었거든. 그러다가 마침 와 있던 키이엘로와도 마주치고…….”
키이엘로의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로지안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알다시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난 걔가 ‘우홉피아주 산하 해적’인 검은바다인 줄 알았지. 그 탓에 릴리 이모랑 자주 싸웠어. 걔는 릴리 이모한테도 자기 얘길 잘 안 해서……. 릴리 이모도 그냥 해적질을 하고 있으려니, 싶었나 봐.”
릴리 이모도 분명 속 많이 썩었을 텐데 어떻게 그걸 참았나 몰라……. 로지안나의 말에 나는 마담 릴리가 내 생각보다 훨씬 키이엘로를 아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키이엘로는 왜 그런 마담에게 거리를 유지하는 거지?
나의 미약한 의아함 사이로 로지안나의 목소리가 흘렀다. 내가 열심히 걔 이야기를 물어 날랐으니까 이제는 좀 낫겠지. 로지안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과거를 훑는 듯 흐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셀리팜에도 자리가 잡히고, 나도 조금 여유가 생기니까 아이를 다시 데려오고 싶어서……. 그래서 이곳에 도착했었는데.”
턱을 괴던 손을 축 내리고 로지안나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막상 아이를 보니까 말이지……. 내가 아이를 데려간다고 해서 아이가 기뻐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에스델은 심지어 부모님에 대한 갈망도 그다지 없는 아이야. 아까도 말했듯이 난, 나는……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고.”
“그래서 네가 엄마라는 건 밝히지 않고 아이를 보러오는 거야?”
“놀아주는 건……. 그건 상관없으니까.”
그것까지 못 하면 나는 정말로 추한 사람이잖아……. 로지안나는 그렇게 말하더니 피식 김빠지게 웃고는 짚 더미에 몸을 눕혔다. 구겨졌던 과거처럼 바스러지는 짚의 소리가 조용한 창고 안을 울렸다. 나는 에스델이 정말로 부모를 바라지 않는 아이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린아이들은 어른의 울음이 닿지 않는 곳에서 어린 생각과 천진함으로 무장한 채 저들끼리의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그런 아이들의 치열한 삶은 자신의 앞에 도사린 불행을 뚜렷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이는 언젠가 어른이 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부재한 부모에게 어떤 감정을 품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것을 로지안나라고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어둑한 구석을 시선으로 훑었다.
로지안나가 말했다.
“가끔은 나도, 지독하게 서러워지지만……. 그래도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진 일이야. 어쩌겠어. 이미 시간은 지나갔고, 돌이킬 수 없는데. 내가 해적질을 관두고 살 수도 없잖아.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여자가 홀몸으로 뭘 한다고? 릴리 이모에게 신세 지는 것도 한두 번이지.”
게다가 아이를 데려오게 되면, 더더욱……. 로지안나는 옅게 한숨을 쉬더니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입을 다물고 창고의 구석이나 뚫어지도록 쳐다보았다.
한참 뒤 로지안나가 작게 속삭였다.
“너한테 넋두리를 해 버렸네. 미안해.”
“됐어.”
이런 이야기 들어주는 것 정도야 아무 일도 아니었다. 다만 나는 다른 것을 생각했다. 누군가가 타인을 배반하지 않고, 내버리지 않고, 팔아치우지 않는 삶을.
그렇게 되었을 때 나나 로지안나, 그리고 그 밖에 다른 이들의 삶이 어떻게 변해있었을지 따위를.
하지만 땅은 고요하게 준동하고, 사람들은 유일하게 발붙일 수 있는 흙바닥을 서로 갖겠다며 투쟁한다. 그 안에서 가장 찾기 쉬운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불신과 불안뿐이었다.
나는 불현듯 로지안나에게 물었다.
“너도 바다로 나가고 싶어?”
내 물음에 짚에 파묻혀 고요하게 있던 로지안나가 나를 돌아보았다. 로지안나는 고민하는 것처럼 눈을 굴리며 입을 다물고 있다가 대답했다.
“그런 것 같아.”
우리에게 ‘땅 위에서는 너희도 한낱 무지렁이일 뿐’이라며 말하던 것은 어쩌면 로지안나 스스로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로지안나가 그랬듯 희미한 푸른빛으로 내려오는 사각형의 달빛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이상하지 않은가? 결국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곳은 땅인데 왜 우리는 바다로 도피하고 마는 걸까.
발 디딜 곳도 없이 나무배에 의지해 파랑에 휩쓸려야만 나아가는 바다와 인파에 부딪히며 살아가는 땅이 뭐가 다르다고.
나와 로지안나의 대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우리는 원장이 다시 올 때까지 각자 짚 더미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물건처럼 늘어져서 반지하의 창이 쪼개 들여보내는 월색만을 응시했다.
어두운 창고 안을 비추는 달빛이 마치 심해로 조각나 들어온 빛무리를 닮았다는 생각이 희미하게 들었다.
* * *
동살이 터오기 직전, 하늘이 푸른 새벽의 빛으로 밝아오는 때에야 원장이 겨우 문을 열고 우리를 불렀다.
짚에 파묻혀 선잠이 들었던 나와 로지안나는 금방 일어나 옷을 털고 원장을 따라나섰다. 그녀는 우리에게 빵과 물을 건네주며 말했다.
“보니까 제국군들도 소강상태인 것 같아요. 해가 뜨고 완전히 밝아지면 본격적으로 집마다 수색을 할지도 모를 일이에요.”
“숨겨줘서 고마워요.”
“뭘요. 내가 로지 씨한테 신세 진 게 얼마나 많은데 겨우 이런 거로.”
원장은 마담 릴리를 통해 자금을 받고 있다고 했다. 사창가와 고아원이라……. 나는 물을 마시며 의외의 조합에 눈썹을 들어 올렸지만,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둘은 서로 근황을 짧게 나누었다.
마담 릴리는 창부들의 처우개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니 로지안나와 같은 미혼모나 키이엘로 같은 부류의 아이들을 가만히 못 보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있을 거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암만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는 사창가라고 하지만 마담 릴리의 자본력이 그렇게까지 굉장할 리가 없었다. 하나의 고아원에게 자금을 전달할 정도라니, 말도 안 되지.
그만한 자본이 있다면 마담 릴리는 굳이 그 골목에서 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창부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걸림돌이라면 다른 섬에 가서 신생 귀족인 듯 살며 사람을 도울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말하자면 그만한 자본이 있어도 굳이 핏빛 골목의 사창가를 유지할 이유가 있다는 뜻인데…….
나는 속으로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물을 마저 비웠다. 모르겠다, 내가 랄티아도 아니고. 몇 가지 단서로 뭘 얼마나 캐낼 수 있겠어.
그리고 마담 릴리의 일은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마담의 건물로 복귀하는 것과 이 섬을 떠나 검은바다의 실마리를 잡는 것이었다.
로지안나가 빵을 다 먹자 나는 당장에 로브를 두르고 기대고 있던 찬장에서 몸을 떼며 말했다.
“서두르자.”
“그래…….”
그때 원장이 우리를 붙잡았다. 그러더니 로지안나에게 모자를 건넸다. 혹시 모르니 인상착의를 조금이라도 바꾸라는 것이었다.
로지안나는 모자를 고맙게 받아들었으나, 원장이 건넨 빵모자는 치마에 숄을 두른 로지안나의 차림새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 탓에 더 의심을 살 것 같았다. 그러자 로지안나는 대뜸 내가 두른 로브를 벗겨 빼앗고는 내게 모자를 던져줬다.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로지안나를 한 번 쳐다본 나는 이내 별다른 불평 없이 모자를 푹 눌러썼다. 고아원의 뒷문으로 나서며 로지안나는 원장의 손을 잡고 힐끗 웃었다.
“고마워요, 마리. 나중에 다시 올게요.”
“에스델이 그냥 갔다고 서운해하겠어요.”
“잘 달래줘요.”
그럼 이만……. 로지안나는 가뿐하게 인사를 하고는 나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돌이 깔린 길바닥은 걸음마다 타박타박 소리가 울려서 우리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푸르게 터오는 어스름한 새벽이었으나 일찍이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집에서 나오거나 문 앞을 비질하는 것이 보였다.
로지안나와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걸어가며 골목으로 쑥 들어갔다. 우리는 별다른 문제 없이 순탄하게 마담의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건물 안에 들어선 나는 모자를 벗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로지안나 역시 긴장 탓에 지쳤는지 어깨를 늘어뜨리며 내 등을 탁탁 두드렸다.
“됐다, 돌아왔으니까 마저 쉬자. 내가 넌 특별히 오늘 잡일에서 빼줄게.”
“그놈의 잡일은 언제까지 시킬 참이야?”
“너희 떠나는 날까지도 시킬 건데?”
나는 황당하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다가 이내 피로감에 눈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그리고 로지안나와 헤어져 방으로 올라온 나는 문을 열자마자 우두커니 침대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을 보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뭐야? 너희 왜 안 자고 있어?”
“로트…….”
도멤이 나를 보고는 비척비척 일어났다. 그러더니 내 어깨를 턱 잡고 을렀다.
“왜 안 자냐고? 왜 안 자냐고? 밤중에 나가더니 안 들어오는 데다 광장에서 총성까지 들리는데 왜 안 자냐고?”
“아하…….”
나는 심히 유감스러워진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를 대충 밀어내고 방으로 들어간 나는 발카와 눈이 마주치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국군한테 쫓기긴 했는데, 다행히 로지안나가 아는 고아원에 들어가서 피했어. 걱정시켜서 미안해.”
“어휴……. 무사했으니까 다행이야. 심장이 막 쪼그라들었다니까.”
도멤이 풀썩 제 침대로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인상을 무시무시하게 구기고 있던 우투그루는 말없이 이불을 덮고 누웠다. 키이엘로는 다행이라는 듯 한숨 놓더니 내게 말했다.
“별일 없었다니 다행이다. 사란은 만나봤고?”
그 말에 도멤이 도로 벌떡 일어났고, 우투그루는 뭐라도 잘못 씹은 얼굴로 이불을 걷고 귀신처럼 상체를 느리게 일으켰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