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86)
바다새와 늑대 (185)화(186/347)
#29화
나는 떨떠름한 눈으로 도멤과 우투그루를 보다가 키이엘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바다의 정보를 당장 알 수는 없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살펴보고, 내가 부를 때마다 알려달라고 부탁했어. 그리고 사란은 아무래도 뭐든지 도와줄 생각인 것 같아. 좋은 아군이 생겼어.”
“그나마 다행이다.”
“그렇지. 그래서 말인데, 네 몸도 거의 나았으니 슬슬 이 섬을 떠야 할 것 같은데.”
내 말에 키이엘로는 붕대를 푼 제 팔을 만지작거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키이엘로의 부상은 그렇게 지지부진하며 열이 끓던 것과 달리 그가 병상을 털고 일어나자 항상 그랬듯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그러니 언제까지고 이 섬의 사창가에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랄티아를 되찾고, 제국의 눈이 닿지 않는 한적한 장소를 찾아야 했다.
그런 우리의 사이로 수면이 부족한 듯한 우투그루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끼어들었다.
“다 알겠는데, 그건 나중에, 자고 일어나서 얘기하면 안 되겠냐?”
“우리끼리 정할 테니까 자든가.”
“머리맡에서 꿍꿍이라도 도모하는 것처럼 구시렁대는데 퍽이나 잘도 자겠다.”
그건 네가 지나치게 편집증적인 건 아닐까? 도멤이 작게 웅얼거렸으나 우투그루는 고스란히 무시했다.
나는 우투그루의 신경쇠약을 지켜주고자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나도 짚 더미에 파묻혀 선잠만 잔 데다, 제국군에 들킬까 지나치게 긴장했던 탓에 몸이 굳어져 있어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키이엘로는 나를 보더니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뭐……. 그래. 로트 너도 피곤할 테니까 나머지는 자고 일어나서 의논하자.”
태연하게 말하는 키이엘로의 뒤에서 우투그루가 그를 엄청나게 짜증스럽다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잘 자, 안녕, 같은 소리 하기 전에 그냥 입 닥치고 잠 좀 자자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게 나를 향하는 시선이 아닌데도 괜히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다. 침대에 걸터앉은 나는 짚에 파묻혀있었던 탓에 씻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꼭두새벽에 물을 길어다 목욕 재개를 하는 것도 성가셨기 때문에 고민을 짧게 끝내고 대충 누웠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 눕자 도멤은 불 끈다, 하며 램프의 불을 꺼트렸다. 그에 온화하던 작은 석양이 가시고 작은 방 안에 푸른 새벽이 들어찼다.
나는 내 머리맡에 와서 베개에 몸을 눕히는 발카의 깃털이 이마에 닿는 것을 느끼며 돌연 불안감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한 단계 마무리하고 이후로 넘어가는 상황으로 본다면 불안감은 어불성설이었으나 방에 어슴푸레하게 들어찬 새벽의 빛깔을 보자 나는 왠지 위태로움을 먼저 느꼈다. 잠이 몰려오는 머리가 느리게 불평을 털어놓았다.
이래서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드는 새벽에는 잠이나 처자야 해.
* * *
새벽에 겨우 잠든 우리는 정오에 가까워지는 때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아직도 비몽사몽 한 도멤을 두고 우리는 각자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그러던 중 열린 문을 대충 가볍게 두드린 마담 릴리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로지안나도 피곤했는지 아직도 자고 있더구나. 덕분에 내가 수고해야 하네. 식사하렴.”
“감사해요.”
키이엘로가 얼른 쟁반을 받아들며 어설프게 웃었다. 그에 마담 릴리는 귀여운 조카아이에게 하듯 손을 뻗어 키이엘로의 머리칼을 쓱쓱 쓰다듬었다. 다른 일손을 시킬 수도 있는데 굳이 온 건 아무래도 그를 보러 온 것 같았다.
그때 마담 릴리와 우투그루의 눈이 마주쳤다. 마담 릴리는 금방 시선을 돌렸지만 나는 목격한 찰나의 순간에 약간 의아함을 품었다. 뭐지?
나는 힐끔 우투그루를 보았다. 얼굴을 험상궂게 굳히고 있을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우투그루는 왠지 멀리 있는 것을 괜히 바라보는 듯 흐릿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 녀석이 웬일로 시비도 안 걸고?
그때 도멤이 드디어 잠에서 완전히 깼는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잘됐다, 어제 못했던 얘기는 밥 먹으면서 하자.”
그 말에 마담 릴리는 문을 닫고 자리를 피해줬고, 키이엘로는 탁자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차와 빵이 주를 이루던 쟁반에 얇게 저민 햄과 버터도 들어있었다.
아무래도 마담 릴리가 로지안나보다 씀씀이가 큰 편 같았다. 우리는 가운데에 있는 침대 두 개에 모여 앉아 끼니를 때웠다. 대충 배를 채우고 있을 즈음, 우투그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가 타고 왔던 구명정이 그대로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야. 주인도 소속도 없는 배라고 해군 쪽에서 가져갔을 수도 있지.”
“그러고 보니 그렇네. 사란을 부르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서 그걸 확인을 못 했어.”
내 말에 우투그루는 ‘네가 그럼 그렇지’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것참, 포크로 찌르고 싶은 시선이군.
나는 어쩔 거냐는 듯 부러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키이엘로가 말했다.
“그럼 그걸 확인해보는 편이 좋겠네. 어차피 섬을 떠나려면 검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물건들이 필요할 테니까 상점을 가긴 해야 해.”
“로트가 걱정인데. 함부로 나갈 수가 없잖아.”
도멤의 말에 나는 흠, 하며 골몰했다. 확실히, 검을 살 거라면 스스로 사는 편이 나았다. 다른 사람이 사줬다가 손에 안 맞으면 낭패이기도 했고…….
그러나 괜히 나갔다가 파란 눈이라고 시선이 모이면 그게 더 문제였다. 게다가 이 섬에는 일반 경비병뿐만 아니라 해군으로 보이는 제국군까지 들어와 있는 게 분명했다.
우투그루 역시 비슷한 것을 생각했는지 나를 보며 물었다.
“제국군을 만났다고 했지. 그 녀석들이 뚜렷하게 뭘 찾는지는 파악 못 했어?”
“도망치기 바쁘지 뭘 그런 걸 파악하냐.”
“바다새를 노리고 왔다든지.”
“그건 아닌 것 같았어. 발카는 같이 없었고, 로지안나와 나 둘뿐이었는데도 검문하려 들었다니까. 후드를 쓰고 있어서 내 얼굴은 보이지도 않았을 거야.”
내 말에 키이엘로는 미간을 좁혔다.
“어쩌면……. 후드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검문을 한 걸지도 몰라.”
“하지만 그랬다면 로지안나가 굳이 후드를 쓰라고 충고해줬겠어?”
“이전과는 달리 후드를 쓴 자를 검문해야 할 이유가 생겼나 보지.”
우투그루가 빵을 손으로 조각내며 말했다. 그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건 우리가 생각할 필요 없는 것 같아.
그 말에 도멤 역시 동의했다. 우투그루 역시 선선히 동의하며 말했다.
“그들이 수상해 보이는 이들을 검문하는 건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곤란하긴 하군.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게 네 눈과 바다새를 내놓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어쨌거나 그렇다면 다른 방법으로 시선을 피할 생각을 해야겠네. 어제 썼던 모자를 쓰고 나가는 건 괜찮을 거야. 로트 머리가 아니라 눈이 유별난 거라서 다행이지. 시장터는 인파가 많으니까, 상인의 시선만 주의하면 크게 걸릴 일은 없어.”
키이엘로의 말에 나는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작은 시골 섬에서만 살았던 나보다는 큰 섬의 사리에 밝은 키이엘로가 나았다.
도멤 역시 나와 별반 다를 바 없었는지 군말 없이 동의했다. 그때 우투그루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괜히 나갔다가 걸려서 낭패 보는 것보다 사주는 대로 들고 안전하게 갈 생각을 하는 게 나아.”
“어제의 소동을 제국군이 가만히 보고 있지도 않을 거야. 이왕 움직인다면 같이 움직이는 게 나아. 이곳도 제국군이 뒤지려 들면 얼마든지 수색할 수 있으니까.”
키이엘로가 낮고 단조로운 어투로 반박했다. 그에 우투그루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시선을 매섭게 올렸다. 둘 사이에 앉은 도멤의 얼굴이 순식간에 탈색되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차다가 발카를 보았다.
발카는 어떻게 결론 나든 상관없다는 듯 침대의 머리맡에 앉아 우릴 보고 있었다. 어땠거나 자기가 못 따라가는 건 공통이다, 이거지.
“둘 다 뭘 걱정하는지는 알 것 같은데, 어느 쪽이든 포기 못 하는 건 마찬가지야. 아니면 차라리 나 혼자 검을 사고 들어올 테니까…….”
“그게 더 어이없는 일이라는 건 너도 알겠지.”
우투그루가 날카롭게 응수했다. 그건 그랬다. 아니 그러면 너네끼리 신경전 하지 말고 그럴듯한 해결책을 내놓든가. 나는 금방 삐죽 올라오는 신경질을 억누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냥 포기해. 우리는 이제 운명공동체야. 잡혀가는 것도 다 같이 잡혀가고, 도망치는 것도 다 같이 도망가자고.”
그러자 우투그루가 곧장 인상을 구기며 을렀다.
“누구 맘대로? 너랑 엮지 마.”
“맞아, 로트. 난 혼자서라도 살 거야!”
“끼어들지 마, 도멤. 네가 끼면 신뢰도가 떨어지니까.”
아니 왜 나한테 그래? 도멤이 억울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지만, 이번만큼은 키이엘로도 우투그루의 의견에 동의하는 듯 아무런 반응도 해주지 않았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들을 보다가 키이엘로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가 싱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로트 말이 맞아. 이왕 뒤질 거면 외롭지 않게 다 같이 죽자.”
나는 황망한 얼굴을 했다.
“넌 또 왜 그렇게 사람이 극단적이야?”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결국 ‘뭔 일 있겠냐, 잘 가리고 빨리 다녀오자’로 결론지었다. 검뿐만 아니라 옷이나 기타 물건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별수 없이 다 같이 다니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우투그루의 의견은 거의 묵살된 상태였다. 하지만 우투그루는 반쯤은 이미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딱히 보채지도 않고 뚱한 얼굴로 우리를 노려볼 뿐이었다.
우리는 수상하지 않을 만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나는 구두 닦는 소년처럼 멜빵을 차고,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도멤은 워낙 수수한 인상이라 아무거나 걸쳐도 길가를 산책하는 청년 같았다. 키이엘로와 우투그루도 가벼운 셔츠와 바지의 단벌 차림이었다.
건물의 로비에서 담배를 피우던 마담 릴리는 우리가 나간다는 것을 알고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래, 아가가 우리한테 손 벌리기 싫어하는 건 잘 알지. 굳이 필요 이상으로 가리려고 하지 말고, 적당히 얼굴 보여주면서 다니렴. 생각보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관심이 없어.”
마담의 말에 키이엘로는 어색하게 웃다가 모자를 눌러쓰고 있는 나를 일별하고 말했다.
“제국군이 부쩍 검문이 심해진 걸 보면 그렇게 생각하긴 어려운걸요.”
“아서라. 생각 외로 사람들은 서로의 눈을 잘 쳐다보지 않아. 당당하게 다녀. 그놈들은 인상착의를 감추려 드는 놈들을 주의 깊게 보는 거야. 여기까지 와서 밤중에 로브 쓴 놈들 검문한다면 뻔하지. 혁명단을 찾는 거란다.”
“혁명단…….”
마담의 말에 키이엘로는 의외의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눈을 둥글게 뜨더니 문가에서 기다리는 우리를 보고 아차 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다녀올게요.”
“그래. 조심히 다녀오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