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89)
바다새와 늑대 (188)화(189/347)
#32화
마담 릴리의 말대로 통로의 끝에는 항구가 있었다. 인부가 자리를 비운 사이 여객선의 짐칸으로 숨어든 일행은 피로감 탓인지 긴장 탓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창고의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그때, 여객선이 움직이며 뱃고동을 울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로트렐리는 자신들이 다시 바다로 떠밀려 왔음을 실감했다.
그러나 수면이 보이지 않는 배의 깊은 아래, 화물 창고는 바다보다는 차라리 지하실에 있는 것에 가까운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피곤했으나 누군가 올지도 모르기에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키이엘로는 빈손을 매만지며 늑대를 생각했다.
섬을 떠나기 전에 텐이 향했을 숲을 한 번쯤 다시 가보려 했는데 이제 그것도 틀렸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키이엘로는 진정으로 늑대와 이별했음을 실감했다.
이제 더는 늑대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 텐은 아이를 달래듯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키이엘로는 분명 아직 미숙했지만 그렇다고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어리지도 않았다.
꿈꾸듯 평화로운 시간과 몰아쳐 온 긴박한 상황 탓에 느끼지 못했던 상실감이 뒤늦게 그의 어깨 위를 뒤덮었다. 기약 없는 이별은 언제나 그를 불신으로 밀어 넣곤 했다.
그때 로트렐리가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어디든 가야지. 제국의 눈을 피해야 하니까 제국 쪽은 제외하고.”
우투그루가 딱딱하게 대꾸했다. 우투그루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왜 너희랑 이 꼴이 된 거지……. 로트렐리는 그 투덜거림을 무시하고 낮게 말했다.
“우릴 수배했다는 소장 말인데.”
“뭔가 짚이는 게 있어?”
“또 바다새 탓이겠지.”
우투그루의 날카로운 말에 로트렐리의 어깨에 앉은 발카가 움츠러들었다. 도멤이 우투그루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우투그루는 혀를 쯧 차고 가슴 앞으로 팔짱을 꼈다. 로트렐리는 우투그루의 짜증을 꿋꿋하게 묵살하고 말을 이었다.
“어쩌면 아주 예전부터 연관이 있는 걸지도 몰라. 내가 섬마을에서 내쫓기기 전에 혼담이 오갔던 작자가 해군 중장이었거든.”
“최근에 좌천되었다고 했으니…….”
“그래.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뭔가 찜찜하단 말이야.”
로트렐리의 말에 키이엘로는 금방 집중하며 미간을 좁혔다. 연신 팍 찡그린 얼굴이던 우투그루도 눈을 가늘게 뜨며 빗장 걸듯이 엮었던 팔을 풀고 몸을 기울였다.
“혼담이 오간 정황이 자세하게 어떤 식이었어?”
“섬에 있는 어떤 선생이 그 중장이 혼처를 구한다는 것을 어떻게 듣고 편지를 보냈다고 했지. 거기에 내 이야기를 넣은 것 같은데……. 그때 이미 내게 발카가 함께하고 있었으니까.”
“좀 이상한데.”
“뭐가?”
우투그루가 턱을 문지르며 로트렐리를 바라보았다. 너희 섬은 작은 시골 섬이었다며? 그에 로트렐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얼굴을 굳혔다. 그것을 직시하며 우투그루는 낮게 읊조렸다.
“그 중장이 혼처를 구한다는 건 선생이 어떻게 아는데?”
“잠깐……. 그러니까…….”
로트렐리는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키이엘로가 물었다. 발카를 만난 게 언제야? 로트렐리가 열다섯, 하고 대답하자 도멤 또한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렇게 예전부터 있었는데 이제야 알려진다는 것도 이상하네.”
그 말에 일행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쩌면……. 어쩌면 바다새에 대한 정보는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은폐되어왔던 것인지도 몰랐다.
키이엘로가 입을 열었다. 제국 짓인가? 그에 로트렐리가 반박했다. 그놈들은 그 정도로 인내심이 넘치지 않을 텐데.
그에 우투그루가 확신했다. 그럼 중장 짓이군.
그것을 보고 있던 도멤이 박수쳤다. 그에 세 쌍의 시선이 도멤을 향하자, 그는 멋쩍은 낯으로 웃었다.
“너희 무슨 추리쇼 해주는 사람 같아.”
“…….”
우투그루의 표정이 곧장 일그러졌고, 키이엘로는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트렐리는 도멤에게 활짝 웃어주었다.
“추리를 보태지 못한 탈락자는 죽음으로 응징받는 쇼인데, 몰랐나 봐?”
“앗, 살벌해…….”
하여간 무섭게 군다며 유난스럽게 몸을 떤 도멤이 이내 말을 이었다.
“음……. 근데 사실 지금 우리가 고민하는 건 현재로서는 별로 쓸모없는 이야기잖아.”
그 말에 키이엘로는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네. 순순한 동의에 도멤이 그렇지? 하며 실없이 웃었다.
도멤의 말대로 그레고리 경이란 작자가 옛적부터 바다새를 노리고 있었음을 캐낸다 치더라도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금방 그것을 생각해낸 일행은 다시 시무룩해져서는 배가 기우는 소리나 들으며 대충 선반과 벽에 기대앉았다. 발카가 무어라 웅얼거리며 로트렐리의 머리칼에 고개를 파묻었다.
로트렐리는 바다새를 느리게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밀항을 하게 될 줄이야. 범죄와는 먼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전직 해적이 할 말은 아니다…….”
“난 기간직이었어. 너희야말로 정규직이었지. 이 범죄자 녀석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로트렐리의 당당한 발언에 황당해하는 도멤을 뒤로하고 우투그루는 코웃음을 쳤다.
“어쨌든 수배지에 마녀로 얼굴이 나붙은 이상 일개 해적보다 더 극악무도한 존재가 된 셈 아닌가?”
“…….”
너는 또……. 말을 또……. 도멤의 탄식을 뒤로하고 키이엘로는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갖고 있던 짐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로지안나가 급한 상황에 막무가내로 욱여넣은 탓에 짐가방 안의 옷가지는 사정없이 구겨져 있었다.
“이거나 정리하자.”
그의 말에 할 일이 생긴 넷은 한동안 아무 말도, 생각도 하지 않고 손만 부지런히 놀렸다. 복잡한 생각은 밀어두고 대뜸 시작되어 버린 항해를 다시금 준비할 때였다.
* * *
헤더는 불현듯 눈을 떴다. 프라세에게 랄티아의 쪽지를 전해 받은 그녀는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뒤늦게 잠들었던 선잠도 지금 막 깨버렸다.
심심하거나 바람 좀 쐬고 싶다고 이곳저곳 들쑤시지도 못했다. 그나마 프라세가 도와주고 요한이 눈을 감아줬으니 랄티아의 일행과도 연락이 닿았지,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까지 헤더는 홀로 버티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우리는 멀쩡하고, 이쪽의 대단한 분을 적절하게 대할 방법을 찾고 있어요. 우리는 나름대로 궁리하는 중이에요.’
랄티아의 쪽지를 처음 받았을 때는 이게 무슨 뜬구름 같은 소리인가 싶었다. 헤더는 두어 번 더 읽어 본 뒤에야 ‘대단한 분’이 하몬을 말하는 것을 깨달았다.
헤더는 다시금 쪽지를 읽었다. 자신에게 도와달라거나 무언가 해달라는 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헤더는 스스로 자조했다. 자신은 랄티아의 일행에게 그다지 유의미한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헤더는 그들과 비슷한 일을 저질러도 디겔의 딸이란 이유로 처벌에서도 빗겨 갈 것이다. 그것이 헤더는 유독 원망스러웠다.
클루스도는 방에 틀어박힌 헤더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디겔에게 부끄럽지 않게 해다오.’ 그게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인가?
헤더는 뒤틀리는 속을 흙을 다지듯 눌렀다. 아마 아빠가 지금 있었다면 클루스도 아저씨, 당신의 머리를 때리고 한바탕 호통을 쳤을걸요.
하지만 이제 디겔은 이 세상에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헤더는 턱을 들어 올렸다. 그래, 아빠는 이제 이곳에 없다. 그리고 세상 그 어느 땅과 바다를 몽땅 뒤져도, 이제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헤더는 돌연 모두 다 내팽개치고 싶어졌다.
“헤더.”
헤더는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돌렸다. 선실의 문에 기대선 요한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웅크린 헤더를 바라보고 있었다.
느 어디 아픈기가? 그의 목소리에 헤더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헤더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왜 왔어?”
“아니, 뭐……. 별건 아이고. 엇짝에 상선이랑 마주쳤잖냐.”
안 그래도 바다가 넓은 마당에 제국의 횡포가 심해지자 육지가 아닌 뱃길에서 물건을 파는 상선이 등장하고 있었다. 아직은 그 수가 적고 바다는 너무 넓기 때문에 마주치는 때는 적지만, 일단 만나면 굳이 육지에 정박하지 않고도 물자를 조달할 수 있어 도움이 컸다.
요한의 말대로, 검은바다는 어제 상선과 조우했다. 부선장과 항해사의 자리가 비어있는 만큼, 클루스도는 솔선수범해서 뱃일에 모두 나서고 있었다.
헤더는 상선이 왔다는 소리에도 딱히 나가 보진 않았지만, 많은 정보와 물건들이 오갔으리라. 대금은 잘 치렀을까? 하기야, 자신이 걱정할 일은 아니다.
헤더는 한숨을 쉬고 요한을 보았다. 그러자 요한이 허리춤에 꿍쳐둔 뭉치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신문이다. 며칠 전에 호외로 발행됐다나.”
“호외?”
땅의 호외가 물길에서 무슨 소용이라고? 헤더는 의아한 기색으로 받은 신문을 펼쳤다. 그리고 내용을 보자마자 얼굴을 굳히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요한의 표정도 영 떨떠름했다. 흔들리는 눈을 다시 신문 위로 내린 헤더는 당장에 일어섰다.
「도망친 수배자, 폭도들과 함께 하나?」
“나라고 느헌티 알려주려고 한 건 아닌 거 알제? 가만히 있을라고는 했는디 이건…….”
“클루스도 아저씨도 알아?”
“당연히 알지. 그라믄 모르겠냐.”
헤더는 신문을 다시 샅샅이 살폈다. 그레고리 허스튼 애시포드의 수배령, 검은 머리에 파란 눈, 반드시 생포할 것……. 수배 이유는.
“……‘치안 보호법 위반 및 제국 공공재 절도죄’?”
“해적에 발 담그더니 육지 가서는 산적질이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제.”
로, 로, 로트,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무슨 깽판을 친 거야? 로트가 들었다면 억울하다며 뒤집어엎었을 생각을 하며 헤더는 신문을 꽉 쥐었다.
신문에는 ‘마녀와 폭도’로 로트의 일행을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크게 호외로 낸다니……. 신문 날짜도 불과 며칠 전이었다. 뭍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헤더는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들었다. 불현듯 이 소식이라도 기다리고 있을 사람이 떠오른 탓이었다.
“요한, 혹시…….”
“뭐. 설마 내보고 그거 함저 구역에 갖고 가 달라고? 농담허지 말어라.”
“…….”
헤더가 지긋이 그를 쳐다보자 요한은 제풀에 찔려 윽, 하며 시선을 돌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내 봐라. 그에 헤더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어차피 클루스도의 행동이 지나치게 위태로운 것 같아 내심 께름하게 선내를 살피던 그였다.
선원 중 원한이 덜어진 이들은 아예 떠나거나 섬으로 귀환했다. 그러니 지금 배에 남은 이들이라곤 클루스도의 독단에도 기꺼이 따를 놈들뿐이었다.
게다가 바다새에 관해 일장 연설을 하며 이미 선원들을 고취해 뒀으니……. 왠지 울부짖는 파도로 들어가며 폭풍의 눈을 향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전보다 섬들과 가까운 바다에서 항해하고 있으니 상선도 마주치고……. 이러다 제국 함선과도 마주치면 어쩌나 싶을 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