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92)
바다새와 늑대 (191)화(192/347)
#35화
여러 결론을 내리는 일행 사이에서 나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이거 골치 아프네…….”
“바다새가 있어서 고된 자여.”
도멤이 혀를 쯧쯧 찼다. 나는 그 말에 어색한 얼굴을 하고 눈을 굴렸다. 어쨌든, 계속해서 내가 나타나지 않으니 우홉피아주와 해군은 내내 헛발질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홉피아주와는 붉은 바다에서 결판을 냈고, 그 이후 해군은 우홉피아주 잔당, 또는 제삼자에게 제보를 입수했다…….
그래서 소장은 다시금 행동에 나선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대충 이렇게 정리하면 되겠지.”
“그 중장, 소장으로 직급이 내려간 건 왜지?”
“그야 우리는 모르지.”
우투그루는 영 마땅찮은 얼굴로 미간을 구겼다. 비관적으로 본다면 제국에서 중장에게 바다새 건을 맡겼다가 일이 꼬이니까 징계로 직급을 내린 것인지 몰라.
그의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그렇게 본다면……. 나는 내심 울렁거리는 속을 꾹 내리눌렀다. 그건 너무 아득한 일이었다.
나는 조용한 섬에서 소시민으로 살고 싶은데 웬 제국이니 뭐니……. 검은바다에게서 랄티아를 되찾는 것만도 힘든 일인데 하물며 제국이라니.
키이엘로와 도멤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는지 별다른 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우투그루는 진작 우리의 분위기를 눈치챘으나, 그다지 개의치 않고 눈썹을 비죽 올렸다.
“역시 우리 이만 갈라설까?”
“넌 무슨 그런 말을 다 같이 밀항하는 도중에 해?”
“어디든 내린 뒤에 다시 말해줄까?”
“됐어.”
나는 고개를 설설 저으며 화물 상자에 등을 기댔다. 발카가 조금 안절부절못하는 몸짓으로 내게 몸을 붙여왔다. 매끄러운 깃털로 뒤덮인 몸이 달싹이며 뺨에 닿자 기껏 억누르던 울렁거림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발카와 무어라 대화라도 하고 싶었지만 도멤이나 우투그루에게는 혼자 웅얼거리는 것처럼 보일 게 뻔해 영 민망했다. 나중에 틈이 나겠지.
발카와 대화하는 것을 훗날로 미루며 나는 뒤의 궤짝에 등을 기댔다. 이야기가 정리되자 키이엘로가 입을 열었다.
“일단 이만 쉬고, 나중에 다시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모으자. 그러다 보면 어디쯤 정박하는지도 알 수 있겠지.”
“그래. 그보다 지금이 언제쯤인 거야? 어두컴컴한 곳에 있으려니 시간 감각도 영 맛이 가는 것 같아.”
“슬슬 배고파진다.”
“배꼽시계만큼은 제대로 작동하나 보네.”
우투그루가 빈정대는 어투로 말했다. 그러나 이쯤 되자 그의 비아냥에도 면역이 생겼기 때문에 나나 도멤, 키이엘로는 별다른 반응 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이제 비스킷은 질려. 요한의 요리가 이렇게 그리워질 줄은 몰랐는데.”
“어디 먹을 게 들어있는 화물이 있지 않을까?”
“너무 당연하게 훔치는 걸 전제로 하고 있네, 우리…….”
뭐 당당하게 식당 가서 먹을 수는 없잖아. 키이엘로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리고 사실, 승객들 대부분이 제국민이라는 소리를 듣자 어쩐지 양심의 가책이 좀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어쩔 거냐, 우리가 더 급하다. 그런 우리 셋을 우투그루는 질색하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저렇게 점잔빼는 얼굴을 하고 있어도 막상 일이 생기면 저 녀석이 제일 먼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움직일 것을 다들 뻔히 알았다.
그때 도멤이 말했다.
“비스킷이야 오래 둬도 되니까 여기에까지 있지만, 그 밖의 식료품은 더 위층에나 있을 텐데. 마장석 설비가 있는 곳에 있겠지.”
“여기는 왜 함저 구역이 화물칸인 거야?”
“해적선이랑 유람선이랑 똑같은 구조라고 생각하면 곤란해…….”
허허롭게 웃으며 주변을 살피던 키이엘로는 옆의 화물 상자를 슬쩍 보더니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건 이 배 선원들 옷 같은데.”
“오, 확실히.”
우리는 그 옷을 들고 고민했다. 이거 잘 쓰면 선원으로 위장해서 다닐 수 있지 않을까? 잠시 옷을 들고 고민하는 사이, 키이엘로가 먼저 옷을 들어 제 몸에 대봤다.
품은 잘 모르겠지만 길이는 그럭저럭 맞아떨어졌다. 그에 도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일 키 큰 놈한테 맞으면 우리한테도 맞겠지. 만일을 위해 염두에 넣어두자.”
“대체 그 ‘만일’이 뭔데?”
우투그루가 삐딱하게 묻자 도멤은 씩 웃었다.
“비스킷으로는 못 버틸 것 같을 때?”
우투그루의 얼굴이 폭삭 찌그러졌다. 우리를 더없이 한심하게 보는 눈이었다.
키이엘로와 도멤도 돌아왔고 짧게 정보도 정리했겠다, 소강상태에 빠진 우리는 궤짝과 화물이 들어찬 선반들 사이에 각자 기대앉았다.
계속 불평불만이던 우투그루도 다들 조용해지자 입을 딱 다물었다. 사실 그는 입과 시선만 날카로울 뿐이지 태도는 매우 협조적이었기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도 없었다. 순조로운 밀항이었다.
* * *
키이엘로는 반짝 눈을 떴다.
잠시 쉰다는 것이 선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어둑한 함저 구역의 화물칸을 비추던 램프는 기름이 떨어져 가는지 빛이 흐렸다. 주변을 둘러본 키이엘로는 고요하게 잠든 로트와 도멤을 보고 화물칸에 눕듯 기대있던 몸을 일으켰다.
배는 이제 나흘 정도 항해 중이었다. 그들이 있던 섬에서 목적지까지 향하는 데에는 해적선으로는 일주일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여객선인 점을 감안하면 시간은 더 걸릴 것이다. 그 전에 마땅히 내릴 경유지가 있던가…….
그동안 몇 번 선내를 몰래 오가며 정보를 찾아보았지만 그다지 유의미한 것들을 알아내진 못했다. 게다가 지금 그들은 밀항자였다. 과감하게 정보를 얻어보겠답시고 섣불리 움직였다가 들키면 낭패였다.
키이엘로는 피로감 탓에 묵직한 머리를 털어내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차라리 텐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 커다란 늑대는 지나치게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면이 있으니 운신에 큰 문제점이 되었으리라.
발카의 경우엔 비둘기 수준으로까지 작아질 수 있었으니 늑대가 일찍이 떠나 구박받는 신세를 면해 차라리 다행이었다. 키이엘로는 화물을 덮는 모포로 몸을 덮고 앉아 잠든 로트와 그 품 안의 발카를 보았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는 아직도 텐이 그리웠다. 알지 못할 말이나 늘어놓고 훌쩍 숲으로 떠나버린 그 늑대가…….
그때 키이엘로는 우투그루와 눈이 마주쳤다. 자고 있다가 깬 것인지 몸을 뒤척이던 그는 키이엘로와 시선이 맞닿자 왈칵 인상을 찌푸렸다.
키이엘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누군들 저와 같이 있는 게 좋을 줄 알고?
키이엘로는 애초부터 우투그루가 이해되지 않았다. 섬에서 마담 릴리가 있는 골목으로 이끌며 흐린 머릿속으로도 생각했던 일이다. 아마 저 녀석이 골목에 들어가게 되면 하루도 못 버티고 뛰쳐나가겠지.
키이엘로가 아는 우투그루는 그 어머니처럼 매사에 결벽적이고 까다로운 녀석이었다. 어차피 자신들과 함께할 이유도 없는 놈이니 후에 일어났을 때 저 혼자 뛰쳐나갔더라, 하는 소리를 들어도 이상할 것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우투그루는 여전히 그들과 동행하고 있었다.
물론 키이엘로야 그가 껄끄럽긴 했으나 멀쩡히 있는 놈을 자기 보기 거슬린다는 이유로 부러 쳐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키이엘로는 우투그루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괜히 시비라도 걸려서 싸우면 로트와 도멤에게 눈치 보일 게 뻔했다.
그때 우투그루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너는 일이 끝나면 어쩔 셈이지?”
“뭐?”
키이엘로는 당혹스럽고 언짢은 얼굴로 우투그루를 돌아보았다. 저놈이 왜 갑자기 멀쩡하게 말을 걸지? 그는 네토르가 말을 걸었을 때 질색하던 로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키이엘로가 떨떠름한 기색으로 되묻기만 하자, 우투그루가 미간을 좁히며 다시 낮게 말했다.
“일이 모두 끝나면 어쩔 셈이냐고. 설마 이 난장을 피우고도 우리 섬으로 돌아갈 생각은 아니겠지.”
키이엘로는 하, 하고 날카롭게 숨을 내뱉었다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틀었다.
“웃기는 소리 마, 네가 굳이 걱정 안 해도 난 육지에서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 작부에게 빌붙어서?”
우투그루의 삐딱한 말에 키이엘로는 얼굴을 굳히며 다시금 우투그루를 홱 돌아보았다. 비아냥거리는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던 우투그루는 어딘가 어정쩡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다가 키이엘로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돌렸다.
키이엘로는 옅게 분노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물론 그가 어쩌면 마담에게 도움을 구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키이엘로도 그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마담이 작부라서가 아니라 그녀에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는 우투그루의 말에서 단번에 뼈를 읽어냈다.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에게 끝없는 자책을 느끼게 하고 은혜를 베풀어 준 이들은 세상에서 천대받았기에, 그는 이런 일에 익숙했고 타인보다 기민하게 반응했다.
“마담을 모욕하지 마. 일개 해적 마을에서 왕자님 취급받으며 살아온 얼간이에게 그런 소리 들을 분은 아니니까.”
“뭐?”
“나야말로 묻고 싶다. 네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직도 우리와 함께 있는지. 너야말로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다시 배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
키이엘로의 말에 우투그루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가 낮게 을렀다.
“네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내 일도 네가 신경 쓸 바 아냐.”
키이엘로의 말투에서 강한 배척을 느낀 우투그루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첨예하게 날이 선 공기가 둘의 사이를 가르고 있었다. 짧은 침묵 후에 우투그루가 말했다.
“네가 전보다 덜 민폐인 것 같아서 남아있는 건데 그게 그렇게 아니꼬운가 보지?”
“뭐?”
“널 좀 더 객관적으로 보는 게 어때? 웬 커다란 늑대까지 달고 있는 데다 괴이쩍은 능력까지 있잖아. 누가 널 달가워하겠어?”
우투그루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의 말과 태도까지 부드럽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 적의가 가시처럼 가득 돋친 말에 키이엘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나마 그 늑대가 저 알아서 떠나줬으니 망정이지.”
“닥쳐.”
키이엘로가 날카롭게 응수했다. 우투그루는 비뚜름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장에야 사이 나쁜 이복형제가 절친한 늑대를 언급하는 것이 퍽 불쾌할 터였다.
하지만 그것을 굳이 우투그루가 사려 깊게 살펴줄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 늑대가 널 버려줘서 다행이라고 충분히 고마워하는 게 나을 거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곧장 덤벼들 거란 우투그루의 생각과 달리 키이엘로는 불쾌해하다 말고 미묘한 얼굴을 했다. 키이엘로는 약간 미심쩍은 태도로 우투그루를 보며 입을 열었다.
“텐을 사람인 것처럼 말하네, 너.”
그에 우투그루의 입이 딱 다물렸다. 키이엘로의 얼굴이 기이하게 굳어졌다.
“너…….”
“너희 싸우냐?”
그가 무어라 입을 열려는 순간 형제의 사이를 가르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로트렐리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