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93)
바다새와 늑대 (192)화(193/347)
#36화
그녀는 피곤하다는 얼굴로 둘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에 우투그루가 혀를 차며 말했다.
“왜 자다 깨서 봉창 두들기고 난리야?”
“봉창은 너희가 두들긴 거지. 생각 좀 해봐라. 머리맡에서 쑥덕쑥덕하는데 퍽이나 잘 자겠다…….”
가위나 안 눌리면 다행이지. 도멤이나 로트가 깨서 타박할까 싶어 낮게 수군거린 것은 맞는 탓에 우투그루와 키이엘로는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하품을 한 로트렐리는 고개를 설설 저으며 말했다.
“나도 요한처럼 이런 말 하기 싫지만, 싸우지 마. 너희는 화해도 안 할 거면서 어째 싸우기만 오지게 싸우냐.”
로트의 말에 우투그루는 코웃음을 쳤다. 키이엘로는 겸연쩍은 듯 목덜미를 긁적이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생각해 봐, 여기에 도멤 대신 네토르가 있다면…….”
“넌 꼭 공감을 얻으려고 그렇게 끔찍한 소리를 해야 해?”
“효과는 좋잖아.”
“뭐가 좋아. 어쨌든 서로 상종 안 하는 거야 그러려니 하겠지만 크게 싸우지 마. 여기서 치고받고 싸워서 소리라도 새어 나갔다간…….”
로트가 그렇게 말하며 둘에게 잔소리를 하려던 때였다. 조용하던 함저 구역으로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셋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다물고 몸을 낮췄다.
키이엘로가 재빨리 램프의 불을 껐다. 칠흑 속에서 몸을 감춘 그들은 선반 사이로 눈을 내놓고 주변을 살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오크 통과 선반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몸을 숨기기엔 좋았지만, 도망갈 퇴로도 없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다행히 층계를 오가는 계단은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마냥 안심하기엔 누군가 왔다는 것부터 굉장한 이변이었다.
등불을 든 선원 두 명이 창고를 내려오며 투덜거렸다.
“쥐는 무슨 쥐야? 쥐가 있을 수 있다손 쳐도, 객실까지 쥐 소리가 들린다는 게 말이나 돼?”
“클레임이 들어왔으니 어쩔 수 없지.”
그들의 말에 셋은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저 ‘쥐’가 우리를 말하는 건가? 선원 둘은 두런두런 떠들며 창고를 둘러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때 키이엘로가 상자를 열더니 옷을 꺼내 들었다. 로트렐리는 설마, 하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러나 키이엘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하냐? 난 자신 없어! 로트는 소리라고 지르고 싶었지만, 우투그루가 재빨리 키이엘로의 손에서 옷을 뺏어 들고 머리 위로 뒤집어쓰자 별수 없이 자신도 받아들었다.
선원들의 발걸음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쨌든, 쥐덫이나 확인해보고 대충 잡아 해결했다고 달래기나 하자.”
“그거 좋은 생각이지……, 왁! 이게 뭐야!”
등불 아래 선반들 사이로 비죽 튀어나온 발을 본 선원이 꽥 비명을 질렀다.
“시체? 설마 시체야?”
그러자 선반의 뒤에서 웬 남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선원이 다시금 비명을 지르자, 선원의 옷을 입고 튀어나온 키이엘로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마침 잘 오셨어요!”
“뭐, 이거 뭐야? 너 어디 소속이야!”
“그게, 식당에서 손님들을 보다가 이분께서 술에 취하셨는지 창고로 가는 걸 봤거든요.”
키이엘로가 물 흐르듯 지껄이며 단잠에 빠진 도멤의 팔 아래로 손을 넣고는 무겁다는 듯 끙 소리를 내면서 들어 올렸다. 그러자 로트렐리와 우투그루는 도멤의 다리를 한 짝씩 들고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했다.
이 순간 셋은 간절히 기도했다. 도멤, 부디 계속 꿀잠 자고 있어라. 이 은혜는 언젠가 갚으마.
선원 두 명은 미심쩍다는 얼굴로 그들을 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런 녀석이 있었나? 그러나 워낙 큰 여객선인 탓에 선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전부 알고 있진 않은 모양이었다.
“깜짝 놀랐네…. 언제부터 여기 있었는데? 왜 진작 데리고 나가질 않고?”
“아까까지는 술주정을 꽤 격하게 부리셔서요. 아시잖아요, 이런 손님들 손 한 번 잘못 댔다간…….”
키이엘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도멤을 답 없는 술주정뱅이 진상 손님으로 만들며 빙긋 웃었다. 흔들리는 옅은 등불이었으나 어둑한 창고에서 드러난 얼굴은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기엔 지나치게 수려했다.
선원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아, 그 쥐 소리라는 게 어쩌면 저 진상이 낸 소음이었나……. 아름다운 얼굴이 불러온 놀라운 설득력이었다.
선원 중 한 명이 말했다.
“그럼 빨리 데리고 나가자고. 안 그래도 그 손님 탓인지 클레임이 들어왔어.”
“아, 그렇군요. 그럼 먼저 나가세요. 저희가 알아서 정리한 뒤 객실로 돌려보내겠습니다.”
“왜? 뭐가 더 남았나?”
“뒤쪽에 이분이 구토를 해놔서요. 다행히 화물에 피해는 없습니다만.”
야 인마, 키이엘로. 도멤이 엄청난 쓰레기가 되고 있잖아. 그만해. 차마 소리 내서 말하지는 못하고 로트렐리는 입속으로 도멤에게 유감을 표했다.
도멤, 너의 구겨진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우리를 위기에서 구해줄 거야. 너의 희생을 숭고히 여기마.
로트렐리와 나란히 도멤의 다리를 한 짝씩 잡은 우투그루는 거짓말을 좔좔 늘어놓는 키이엘로를 보며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 등불을 든 선원이 선뜻 말했다.
“그런 거라면 손님은 우리가 데리고 가지. 객실 호수 불러. 우리는 어차피 클레임 걸었던 손님께 다시 가야 해서 객실 층을 돌아야 하거든.”
너희도 고생 많았을 텐데. 그 말에 우투그루와 로트렐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만큼 직업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 미워 보이긴 또 처음이었다.
그냥 내버려 둬! 귀찮은 일 피하고 꿀 빨면서 월급 떼먹기나 하라고!
키이엘로 역시 비슷한 마음이었을 게 뻔했지만, 그는 거의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저희가 하겠습니다. 클레임 건이라면 서둘러 고객께 대응해드리는 게 나은데 이분까지 모셔다드리고 하려면 시간이 많이 지체될 거예요.”
잘한다, 키이엘로! 로트렐리는 도멤의 다리를 꽉 쥐며 양치기 소년을 응원했다. 이로써 키이엘로가 밑도 끝도 없이 든든해지는 것은 전투할 때와 임기응변으로 거짓말해야 할 때라는 것이 명확해졌다.
그러나 선원들은 만만치 않았다.
“뭐? 굳이?”
“아니, 뭐 취객 데려다주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인 것도 아니고…….”
그에 일행은 그들의 속내를 눈치챘다. 이 새끼들, 직업적으로 훌륭한 게 아니라 클레임 건 고객에게 가는 시간을 최대한 늦추고 싶은 거구만.
그들에게 항의한 고객도 어지간히 진상이었나 보다. 물론 도멤은 진짜 진상 고객인 건 아니었지만…….
그 고객은 왜 고운 말로 항의해도 될 것을 진상 짓을 해서 우리를 이런 위기에 빠뜨린단 말인가? 이 선원들은 그냥 눈 딱 감고 다녀오면 끝나는 일을 지지부진 끌고 싶어서 우리를 이렇게 만든단 말인가?
애초에 우린 왜 밀항을 해서 이런 상황에……. 잠시 진하게 몰아치는 한심함을 느끼던 셋 중 우투그루가 입을 열었다.
“그냥 저희가 먼저 손댄 일은 저희가 해결하는 것이 낫겠네요. 가보세요, 저희는 저희 일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러자 그 말에 빈정이 꽤 상했는지 선원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키이엘로의 얼굴이 낭패라는 듯 일그러졌다. 그는 우투그루를 힐난하듯 쳐다보았다가 애써 다시 웃으며 말했다.
“이 녀석은 원래 말씨가 이래요. 교육이 덜된 놈이라…….”
그 말에 우투그루가 키이엘로를 노려보았다. 로트렐리는 도멤의 발이나 붙잡고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웃음을 참는 중이었다.
아니, 그보다 상황이나 어떻게 타개해 보자고. 로트는 우투그루처럼 아무렇게나 말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키이엘로처럼 청산유수로 말할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선원들의 시선을 끌었다가 괜히 사달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어두운 불빛 하나에 의지한 상태였으니 가만히만 있으면 눈 색깔을 자세히 보지는 못할 것이다.
로트렐리는 선반의 화물들 사이에 숨은 발카를 힐끔 보았다가 선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선원들은 우투그루의 말에 심히 기분이 상한 듯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거나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에 불안한 기색을 느낀 키이엘로가 입을 더 열었다.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 먼저 잘 제지해야 했는데, 면목 없습니다.”
우투그루가 선원들에게 들리지 않을 만치 혀를 찼다. 옆에서 그 소리를 들은 로트렐리는 흘끔 그를 보았다. 그때 선원 하나가 기분이 꽤나 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누구야? 이름이나 알아두자.”
“…….”
세 명의 입이 마법처럼 딱 다물리자 선원은 눈썹을 올리더니 램프를 좀 더 가까이 가져왔다.
“왜 말을 안 해?”
할 수 있을 리가! 램프가 다가오는 것에 반사적으로 주춤 물러난 키이엘로는 문득 자신이 붙잡은 도멤의 몸에 힘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도중에 깼는데 눈치껏 조용히 있던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에 고마움을 느낄 새는 없었다. 램프를 든 선원이 키이엘로를 빛으로 비추더니 어? 하고 소리를 낸 것이다.
“……에밀 바턴?”
“왜 날 불러?”
다른 선원이 의아한 얼굴로 램프를 든 선원을 바라보았다. 기이하고 섬뜩한 침묵이 화물칸에 내려앉았다.
배에 부딪히는 물살의 소리가 스산하게 울렸다. 어두컴컴한 함저 구역, 지나치게 수려한 얼굴을 가진 모르는 이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수놓은 승무원 옷을 입고 있었다…….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 승무원들은 천천히 시선을 올려 ‘에밀 바턴’이라고 불린 키이엘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이 미소 짓고 있는 턱 언저리에 닿았을 때였다.
“선빵!”
우투그루에게 잡혀있던 발을 들어 선원을 냅다 걷어찬 도멤이 버럭 외치며 펄떡 뛰어올랐다.
“필승!”
반사적으로 외친 로트렐리의 주먹이 ‘진짜’ 에밀 바턴의 얼굴을 강타했다. 난데없는 폭력에 쓰러지는 불쌍한 선원 둘을 얌전히 잡아 선반 옆에 눕힌 우투그루가 혀를 찼다.
“진작 이럴 것을…….”
굉장히 범죄자 같은 대사였다. 키이엘로는 고개를 설설 저으면서도 선원의 손에서 램프를 빼 들고 자신이 입은 재킷의 가슴팍을 보았다.
정말로 ‘에밀 바턴’이라고 멋들어지게 수놓아 있었다. 이 배가 꽤 호화로운 여객선이라는 것을 잊은 탓이다. 일개 승무원의 이름까지 줄줄이 수놓아둔 옷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발카가 날아와 로트의 어깨에 앉는 동안, 도멤이 울컥 화를 냈다.
“키이엘로, 너 때문에 얼굴 다 팔렸어! 날 왜 그런 진상 손님으로 만들어?”
“언제부터 깨어 있었어?”
“내가 토해놨다는 부분부터! 어쩐지 꿈에서 술에 취해서 개떡 된 나를 너희가 골목길에 버리고 가더라!”
로트렐리가 자신들을 변호했다.
“버리진 않았잖아.”
대신 너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버리긴 했지만……. 아무도 여객선에서 술주정 부리며 화물칸까지 내려와 바닥에 부침개를 만들어준 사람이 너라고 생각하진 않을 거야. 로트렐리는 그 말은 꾹 삼켰다.
도멤은 허망한 얼굴로 웅얼거렸다.
“그래, 버리진 않았지. 고맙다, 정말…….”
“천만에.”
키이엘로가 뿌듯하단 얼굴로 웃자 도멤은 그를 물어뜯고 싶다는 듯 쳐다봤다. 반어법 몰라, 반어법?
도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다들 조용히 무시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