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94)
바다새와 늑대 (193)화(194/347)
#37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더니 너희는 왜 나를 잡느냐, 하며 계속 칭얼거리는 도멤의 말을 끊어낸 것은 우투그루였다.
그는 선원들의 주머니까지 뒤지더니 돈과 열쇠 꾸러미를 꺼내 챙겼다. 해적단의 부선장 자리는 정말로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우투그루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도멤, 시끄러워. 가짜 진상 고객 말고 진짜 진상 고객이 이 배에 있는 모양인데, 더 찍찍거리다가 또 불청객이 찾아오면 어떡하려고 그래?”
로트렐리와 키이엘로가 ‘가짜’ 진상 고객이라는 말에 도멤을 쳐다보자 도멤은 그들을 찰싹하고 한 대씩 때렸다. 그 뒤 도멤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엄연히 말하자면 우리가 불청객이겠지만……. 어쨌든, 네 말이 맞아. 이 선원들은 어쩌지?”
“답이 없어.”
“문제 제기는 기똥차게 해놓고 왜 이리 빠르게 단념하는 거야?”
우투그루의 매몰차다 못해 삭막한 대답에 도멤이 기함하든 말든, 로트렐리는 코피를 흘리거나 멍을 단 채로 쓰러진 선원들을 보았다.
확실히 답이 없었다. 여기에 그대로 두자니 그 진상 고객이 걸렸다. 그런 진상은 하나만 하지 않지…….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며 배에 다시 항의했다가는 다른 사람들도 이 선원들의 부재를 알게 될 것이다. 암만 선원의 실종을 흐지부지 친다 해도, 진상 고객의 요구 탓에 또 다른 선원들이 이 함저 구역으로 오게 될 것이다.
그걸 오는 족족 다 두들겨 패서 감금하면 호화 여객선에 괴담 하나 만드는 꼴이었다.
그렇다고 위쪽에 두자니 이 선원들이 발견되어 의심을 사는 것은 물론이고, 이들이 깨어난 뒤 함저 구역에 누군가 수상한 인물들이 있음을 더 높은 곳에 일러바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쨌거나 여유는 오늘이나 내일까지군. 거기까지 생각한 로트렐리는 조용히 말했다.
“정말 답이 없네.”
“음…….”
키이엘로 역시 비슷한 생각을 거쳤는지 침음했다. 마른세수하며 침착함을 되찾아 온 도멤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이 배를 탈출하는 수밖에 없을까?”
“너무 위험해.”
우투그루가 매섭게 잘라냈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도멤을 보았다가 로트렐리를 보았다. 정확히는 그녀의 어깨에 앉은 발카를 보았다.
그의 시선에서 무언가 알아챈 발카가 그르륵, 하며 질린 소리를 냈다.
『설마 날 보고 꿍꿍이를 하는 거야? 불쾌하네.』
“우투그루가 좀 음험한 인상이긴 하지.”
뭐라고? 로트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은 우투그루는 눈을 굴리며 손을 내젓고는 말했다.
“아니, 도멤 말이 차라리 가능성이 클 수도 있겠군. 배는 아무리 크고 넓어도 배야. 폐쇄적이지.”
그가 잠시 입을 닫고 쓰러진 선원들을 보다가 말했다.
“이 배에서 시궁쥐처럼 불안해하면서 숨죽일 바에야 바다새도 있고 뱃사람 경력도 넘치는 사람만 넷이니 구명정이라도 훔쳐 타고 탈출하는 게 훨씬 형편이 낫겠지.”
“물자는 어쩌고?”
함저 구역에 누가 오진 않을까 싶어 로지안나가 싸준 짐의 음식은 대부분 소진된 상태였다. 그러나 키이엘로의 나직한 끼어듦에 우투그루가 화물들이 담긴 선반을 두드리며 날카롭게 응수했다.
“머저리냐? 여기 널리고 깔린 게 물자야.”
마장석 파이프로 된 냉장 시설이 없는 터라 신선 식품 따위는 없었지만―물론 냉장 시설이 있었다면 그들이 먼저 신선 식품이 되었으리라― 비스킷이나 육포 등 저장이 용이한 식품과 옷이나 자잘한 필요품은 모두 있었다.
“열리지 않는 선반도 있을 텐데.”
로트렐리가 중얼거리자 우투그루는 선원의 주머니에서 꺼낸 열쇠 꾸러미를 손가락에 건 채 내보였다. 로트렐리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박수를 쳐줬다.
“그래, 해적질 만만세다.”
화물들을 뒤지기 시작한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저장식을 모두 챙겼다. 선원의 주머니에서 나온 열쇠로 함저 구역의 창고 문을 열 수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화물로 맡긴 승객들의 짐을 보관하는 곳이었는지, 수많은 트렁크가 그들을 반겼다. 도멤이 속이 쓰리다는 듯 말했다.
“우홉피아주 말고 정말 무고한 사람들 짐가방을 터는 건 처음인데.”
“어쩌겠어. 호화로운 여객선에 탈 정도면 돈이야 썩어나는 작자들이겠지.”
“합리화하지 마, 로트…….”
정말 도둑의 마음가짐으로 트렁크 털기에 임하려는 로트렐리를 기겁하며 쳐다본 도멤은 이내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부자 같은 사람의 가방을 털자.”
“그게 네 양심을 그나마 덜 해친다면, 뭐, 그래…….”
로트렐리가 꿍얼거리며 트렁크를 열었다가 눈을 크게 떴다. 웬 휘황찬란한 드레스가 무더기로 들어있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트렁크들을 하나둘 바닥으로 내리던 키이엘로가 혀를 내둘렀다.
“그래, 이쯤 되면 정말 양심의 가책이 덜어진다.”
드레스에는 수많은 레이스와 보석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그 묵직한 무게에 대충 드레스들을 들춰보며 다른 옷을 찾아보던 로트렐리는 입을 벌렸다.
“이게 다 얼마야. 이런 무거운 옷을 입고 다닐 수는 있는 건가? 역시 너무 무거울 것 같은데.”
“무거운 것 따위 우리가 알 게 뭐야.”
“무게를 좀 덜어주려고.”
우투그루가 냉정하게 말하자 로트렐리는 짧게 대꾸하며 드레스에서 보석들을 뚜둑 뜯어냈다. 우투그루는 그녀를 미친 사람 보듯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트렐리는 보석들을 주머니에 넣으며 드레스를 트렁크에 도로 쑤셔 넣고는 씩 웃었다.
“앞으로는 가벼운 드레스를 입으세요, 마담.”
“보석을 어디에 쓰게?”
“혹시 사람 많은 섬에 가게 되면 돈 없을 때 팔아야지.”
우투그루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답지 않은 얼굴이었으나, 그는 그런 것은 생각도 못 하고 되물었다.
“사람 많은 섬에 갈 생각이었어?”
“혹시 모르지. 사람이 없는 시골 섬이어도 보석으로 입막음할 수도 있는 법 아니겠어?”
그 말에 우투그루는 침착한 낯이 되더니 ‘일리 있는 말이야.’, 하고는 짐가방들을 마저 뒤지기 시작했다. 도멤만이 떨떠름한 얼굴로 범법자에 가깝게 다가선 스스로의 처지를 한탄했다.
키이엘로는 넌지시 도멤에게 말했다.
“도멤, 해적은 원래 범법자야.”
“우린 정의로운 해적이었어!”
“아니, 그건 아니지.”
“그래, 그건 아니지.”
“민간인이 보기엔 그냥 해적들이 해적질한다고 생각할걸?”
냉정한 부정에 호되게 맞닥뜨린 도멤은 조용히 납득했다. 그래, 우린 원래 범법자였구나! 게다가 수배까지 되었으니 사실이 어떻든 아무런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가방들을 모두 뒤진 그들은 적당한 여행용 배낭과 여분의 옷가지, 로트렐리와 우투그루가 옷들에서 뜯어낸 보석 따위를 챙겼다.
순식간에 짐이 얼추 꾸려지자 네 명의 도적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이제 짐은 모두 준비되었는데……. 배는 어쩌지?”
도멤의 물음에 로트렐리가 답했다.
“승객들을 구명정으로 몰아넣고 이 배를 우리가 강탈하자.”
“현실성 없고 지나치게 몰입한 대답하지 마.”
당연하게도 기각당했다. 로트렐리는 우투그루의 일갈에 정신을 차렸다. 도둑질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키이엘로는 로트렐리에게 말했다.
“로트, 역시 넌 대도둑의 싹수가 보여.”
“조용히 해. 쥐도 새도 모르게 네 명줄도 훔쳐주는 수가 있어.”
너희 둘 다 조용히 해! 우투그루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으르는 것과 동시에 도멤이 의견을 제시했다.
“밤에 몰래 나갈까?”
“아무래도 그러는 편이 현재로서는 가장 괜찮은 방법이겠지.”
“저것들은 어쩌지?”
로트렐리가 아직도 쓰러져 누워있는 선원들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에 우투그루는 피곤하다는 얼굴을 했고, 키이엘로는 그냥 고개만 기울였다.
“여기에 입 막고 묶어둘 생각 아니었어?”
“이 해적 자식.”
“아니…….”
로트 너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왠지 억울해……. 키이엘로가 머쓱하게 뒷덜미를 문지르는 동안 도멤은 검은바다에 있을 클레인스를 떠올렸다.
클레인스가 있었으면 이런 일도 좀 쉬웠을 텐데……. 걔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묘하게 산만하고 난장판인 상황을 견디지 못한 우투그루가 입술을 깨물고 느리게 말했다.
“생산적이고 유의미한 의견이 아니면 입 좀 다무는 건 어때?”
“싫어……. 삭막하잖아.”
도멤의 말에 우투그루의 목에 핏대가 섰다. 다행히 우투그루는 한 번 참아 넘길 수 있었다.
“산만보단 삭막이 낫지. 저 선원들과 구명정을 어떻게 할지가 가장 급한 논제 아냐?”
“지금 우리 무슨 토론회 해? 산만하다고 해서 생각을 안 하고 있는 건 아냐.”
로트렐리의 말에 우투그루의 턱이 씰룩였다. 이를 사리물고 있는 모양이었다.
“선원이야 그냥 입 막고 묶어서 구석 창고에 넣어두면 될 일이야.”
“때려치워!”
키이엘로가 마지막으로 느긋하게 말하자 결국 우투그루가 버럭 외쳤다.
“내일이면, 혹은 지금 당장이라도 구명정을 어떻게 몰래 빼돌려서 탈출할지 고민해야 하는 마당에, 너희가 무슨 일곱 살 꼬마들이야? 왜 이리 산만해?”
그에 도멤과 로트렐리가 한 마디씩 입을 열었다.
“야, 야! 목소리가 크다. 네가 지금 제일 산만해.”
“먼저 걱정부터 하면 머리 빠져. 마음을 편히 가지지 그래? 떽떽 소리 지르지 말고.”
“소리 지르는 게 불만이면 사람을 빡치게 하지 마!”
뭐 이딴 놈들이 다 있어! 우투그루가 자신의 금발을 쥐어뜯을 듯 싸쥐고 버럭 외치는 것과 동시에 우르르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그에 넷은 동시에 굳어서 기절한 선원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고요히 기절해있었다. 제각기 색깔이 다른 눈동자가 오가며 시선을 교환했다. 곧이어 함저 구역의 문이 다시금 열렸다.
선원 여럿이 함저 구역의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고, 그 뒤로 외출용 드레스를 입은 여인, 그리고 그 옆의 잘빠진 수트를 입은 사내가 따라오는 중이었다.
발카가 로트렐리에게 말했다.
『이런, 쥐 소리를 듣고 행차하신 모양이네.』
로트렐리는 발카를 얄밉다는 듯 흘기곤 다른 이들을 돌아보았다. 우투그루와 도멤은 배낭을 챙기고 있었고, 키이엘로는 기절한 선원 둘의 목덜미를 잡고 당겨 선반 너머로 보이지 않게 했다.
선원 중 하나가 말했다.
“원래 이러시면 안 됩니다, 고객님. 쥐덫이 있는 걸 보여드리기만 하면 되는 거 맞죠?”
“그래요. 부인이 쥐를 질색하는데 계속 쥐가 우는 게 들린다고 하니 객실로 들어오지 않으리란 확신만 있으면 됩니다.”
여인 옆의 사내가 대꾸하고는 콧대를 높게 들었다. 그는 다소 거만한 태도로 함저 구역의 어두컴컴한 곳을 훑어보고는 혀를 차며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그것을 보자 그들은 저절로 알 수 있었다. 저 태도, 저 표정, 저 몸짓…….
진상 고객이었다!
넷은 눈을 질끈 감고 한탄했다. 진상의 행동력을 너무 얕봤다. 벌써 움직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게 묻듯 도멤이 녹색 눈을 다급하게 굴렸다. 우투그루 역시 비슷했다.
그는 온갖 잔머리를 쥐어짜는 것 같았으나 별다른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고, 로트렐리로 말하자면 마땅히 방도가 있어도 나서서 눈에 띄면 안 될 인물이었다.
결국 이런 일에 가장 자신이 있는 키이엘로가 나섰다.
어둠 속에서, 그는 아름답게 웃으며 기절한 선원들의 옷을 벗겼다. 우투그루가 이번엔 키이엘로를 미친놈 보듯 쳐다봤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