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197)
바다새와 늑대 (196)화(197/347)
#40화
한가한 오후였다. 테드의 고향 섬 관련 서류를 보던 그레고리는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테드는 고향 섬에 아직 어머니가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제국령에서 비비려 드는 것은 좋게 보자면 제국에 터를 잡고 이사하려는 것일 테고, 나쁘게 보면 혼자 살자고 도망친 것일 터였다.
하긴, 제국에 빌붙으려는 것들이 어디 시골 촌뜨기 하나뿐인가. 촌놈 하나야 우스웠다. 서류 종이를 대충 옆으로 치워낸 그는 안대를 긁적이며 다른 서류를 펼쳤다.
어느 섬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있으니 병력을 더 증대해주길 요청하는 내용……. 평범한 제국군이군.
노예를 더 데려올 것이니 관련 상선을 호위해주길 요청하는 내용……. 이건 꽤 괜찮고.
누가 결혼을 크게 한다고 하니 병력을 파견해달라는 내용……. 네가 똥을 싸는데, 왜 내가 힘을 줘야 하지?
잉크를 찍은 펜으로 마지막 서류를 북북 긋고 ‘기각’이라고 적은 그레고리는 차석 보좌관이 따라놓은 차를 한 잔 더 마시며 한탄했다.
“요즘 것들은 왜 이리 혼자 할 줄 모르지? 제국이라는 중앙 권력이 생기니 구도가 묘해졌단 말야. 다들 사사건건 요청, 요청…….”
“그나마 요청이라도 하며 숙이는 곳이 낫지 않습니까?”
“하긴 그래. 백려 거기만 봐도…….”
얼마 전 행방불명이었던 백려의 왕자가 제국 근방에 나타나서 공식적으로 백려의 자주국 선언을 하는 사건이 있었다. 제국군이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다시 행방이 묘연해졌다.
분명 어딘가에서 그들을 숨겨 주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레고리는 근래 잠잠해졌다가 그 사건을 계기로 다시 우후죽순 활발해진 백려의 폭도들을 떠올렸다.
“그 나라 왕도 제 남동생이 밖에서 그러고 돌아다니는데 낯짝도 두꺼워.”
“대단한 미인이라던데,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얼마 전 사절이 오지 않았는가. 직접 행차하셨던데 당연히 보았지.”
제국의 협박에 겁먹은 백려 신하들이 제 손으로 백려를 넘긴 것까진 좋았다. 별다른 힘도 들이지 않고 가장 탐나던 곳을 꿀꺽했으니 말이다.
다만 그 후 왕족과 그 섬사람들은 좀처럼 얌전히 있질 않아 제국의 골칫거리였다. 그때 차석 보좌관이 물었다.
“예쁜가요?”
그레고리는 드러난 눈썹을 까딱 올리곤 어깨를 으쓱였다.
“예뻤던가……. 말 안 들어서 군사력만 축내는 나라 왕이라고 생각하니 얼굴이 안 보여서 말이야.”
그 아우에게 가야 했을 왕위를 떠밀리듯 받은 주제에 잘도 속을 긁는 여자였다. 그 까만 머리카락과 그 사이의 황금빛 눈동자는 마치 범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제국은 제 불민한 아우의 말 한마디에 벌벌 떨며 두려워할 국가가 아니지 않습니까? 군자로서의 위엄을 지키시지요.’
온화한 얼굴을 하고 제국에게 적당히 숙이는 척하고 있으나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 여자였다. 게다가 황제가 최근 영 딴 세상에 빠져 있으니 더 그랬다.
그레고리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다가 말했다.
“황제께서 왜 그 여자에게 제국의 남자를 붙이지 않는지 모르겠군.”
“듣기론 이미 국서가 있다던 걸요.”
“그걸 신경 쓸 때인가? 안팎으로 제국 사람을 심어둬야 좀 얌전해질 터인데.”
그레고리가 혀를 찼다. 황제에게 괜히 바다새 이야기를 꺼냈나 싶었다. 바다새를 발견했다는 그레고리의 이야기에 황제는 대단히 반색하며 내내 그것에만 신경이 팔려있었다.
“대체 뭘 감추고 있는 것이기에 이 믿음직한 제후들에게도 알리지 않는 것인지.”
“그것 말인데, 최근 황제의 혼잣말이 늘었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설마 내가 정말 미치광이를 데리고 왈츠를 추고 있던 건 아니겠지…….”
소박한 꿈과 희망이 가득한 자신의 미래 설계를 떠올리며 절망한 그레고리는 습관적으로 안대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무슨 혼잣말?”
“그것까지 어떻게 알겠냐마는, 남작님께서 심어두신 시종의 말에 따르면 침실에서 종종 홀로 애걸복걸 떠든다고 하더군요.”
초월자가 개입한 것이 아니냐는 사견도 덧붙어있었습니다, 차석 보좌관은 심드렁한 그레고리의 얼굴에 소심한 얼굴로 자신 없게 말을 끝맺었다.
“초월자? 그들이 한가한 작자도 아니…인지는 우리야 모르지. 어쨌든 초월자들은 여태 세상 사람들 사는 것에 개입한 적이 없어. 학자들도 다들 그리 말하지 않나.”
보좌관은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학자들은 초월자들에게 미움받아서 멀찍이 떨어진 채 짐승 관찰하듯 그들을 관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안다는 듯 말할 수 있는가?
물론 뭐든 그가 섣불리 상사의 말에 토를 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서류를 대강 처리한 그레고리는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황제가 무엇에 정신이 팔려있든, 이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좋을 텐데 말이지.”
“만약 정말로 초월자나 그 엇비슷한 무시무시한 게 있다면요?”
겁을 집어먹은 보좌관의 말에 그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 위대한 그분 같은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혹시나, 만약의 이야기지만요.”
“글쎄…….”
그레고리는 제가 어렸을 적 만났던 사내를 떠올렸다. 검은 로브를 길게 껴입고, 창백한 손으로 바다새를 그리던 남자…….
그레고리가 황가의 집념을 멍청한 유전병이나 광기로 치부하지 않을 수 있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유년기에 미지의 존재와 조우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게 정말 미지의 존재였는지, 그냥 미치광이 사이비 신도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그래, 어쩌면 그 사내가 황가와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레고리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만약 그렇다면 이용할 게 아니라 납작 엎드려야겠지. 어느 쪽이든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은 변하지 않아.”
어찌 되었든 그는 권력을 잡을 생각이 만만했다. 그때 집무실의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안대를 매만지던 그레고리가 손짓하자 차석 보좌관이 서둘러 나가 문을 열었다.
편지 하나를 갖고 돌아온 보좌관이 얼떨떨한 얼굴로 그것을 그레고리에게 내밀었다.
“후작께서 보내신 편지입니다.”
“아하.”
내가 그것을 뒷전으로 하고 있는 걸 어찌 아시고. 후작이 슬슬 어땠냐며 닦달할 때가 되긴 했다 싶었다. 테드에게 받아둔 이야기가 있었으니 답장을 쓰는 것엔 큰 어려움이 없을 터다.
하여간 후작도 참 대단한 작자였다. 혀를 내두른 그레고리는 페이퍼 나이프로 편지 봉투의 윗면을 깔끔하게 잘라낸 뒤 그것을 빠르게 읽어 내렸다.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있던 그의 표정이 점차 미묘하게 변해갔다. 그리고 편지의 끝을 읽을 적에는 황당함에 일그러져 있었다.
차석 보좌관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내가 제대로 읽은 것이 맞나?”
그레고리는 인상을 굳힌 채로 하나뿐인 눈으로 종이 뭉치를 노려보았다.
“바다의 주인을 부활시킨다고?”
* * *
“그게 정말 바다새였을까요?”
쿤트만 제도로 향하는 여객선은 아직도 소란스러웠다. 이미 밀항자들이 탈출한 후였지만, 그들이 ‘마녀와 폭도들’이었으리라 짐작한 이들이 입을 쉴 새 없이 놀려대는 탓이었다.
그 폭도들과 마녀가 생각보다 수려했기 때문에 더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쉬웠다. 푸른 눈, 까맣게 흩날리는 머리칼, 혜성처럼 날아오르는 바다새…….
‘마녀’라는 오명에 어울리지 않게도 그것은 퍽 뭇사람들이 열광할 만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접시에 올리는 일을 은근히 즐길 이들은 많았다.
심지어는 귀족들의 사생활을 캐려고 잠입해있던 기자들이 저마다 정체를 감추는 것을 마다하고 전서구를 날려댔으니 알만한 일이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제국에도 소식이 퍼졌을까. 가만히 생각하던 단델리온 백작 부인은 난간에서 바닷바람을 맞다가 제 남편을 돌아보았다.
“맞아요. 그 ‘마녀’가 소문 속 바다새의 주인이죠.”
“아르세나 당신……. 알면서 그녀를 놓아줬나요?”
“그럴 리가 있나요. 더 빨리 알았다면 회유했을 거예요.”
아르세나 티포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 백작은 의심쩍다는 얼굴을 하다가도 그녀를 뒤에서 감싸 안고 난간을 잡은 채 물었다.
“그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죠? 당신도 나처럼 그녀를 본 적은 없을 텐데…….”
“아뇨, 전 꽤 어렸을 때의 모습을 본 적 있어요.”
그래서 자라난 이목구비를 알아보기 힘들었지요. 아르세나는 그렇게 말하며 남편의 어깨에 뒤통수를 기댔다. 연갈색의 잔머리가 바람에 휘날려 백작의 뺨을 간지럽혔다.
“그리고 그 창고는 너무 어두웠어요. 조금만 더 밝았다면 푸른 눈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그녀의 말에 단델리온 백작은 이미 눈을 크게 뜬 상태였다.
“그럼 그녀가 일전에 말한…… 당신 고향의 그…….”
“네, 맞아요.”
아르세나의 대꾸에 그는 몸을 살짝 그녀에게서 떼어내며 입을 손으로 가렸다. 청명한 바다를 가로지르는 가운데 둘 사이에 잠시 말소리가 멎었다.
바다에 뛰어들더니 파도에 휩쓸리듯 순식간에 사라진 밀항자들의 마지막 모습을 곱씹던 단델리온 백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회유가 가능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렇다고 그녀를 애시포드 남작 손아귀에 둘 수는 없죠.”
“맞아요.”
단델리온 백작은 짧게 수긍했다. 애시포드 남작이 바다새의 정보를 공개했을 때부터 진흙탕 싸움은 예견되어 있었다.
그간 황제가 애시포드 남작에게 힘을 실어주었던 이유를 알 수 있게 되었으니 그보다 먼저 바다새를 차지해야 했다. 혹은 적어도 남작의 손에 그것이 들어가지 않게 해야 했다.
몇몇 귀족들은 전설이니 뭐니 하는 뜬구름 잡는 소리에 비과학적이라며 질색했다. 그러나 어쨌거나 황제가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었다. 권력을 위해서 뭔들 못하겠는가.
아르세나가 말했다.
“지금의 제국은 옳지 못한 길을 가고 있어요.”
“알아요.”
“그것을 막으려면 제국을 좀먹는 암 덩이부터 잘라내야죠.”
“알아요…….”
단델리온 백작과 그의 누이는 제국의 방향에 회의적인 세력이었다. 그러니 굳이 제국인이 아닌 일개 섬의 평민을 처로 들인 것이리라.
아르세나는 비록 그런 이유에서 귀족 부인이 되었지만, 악시언―단델리온 백작―의 뜻에 동참하는 것에는 일말의 거부도 없었다.
악시언 티포네가 말했다.
“하지만 역시 미심쩍군요. 아무리 일전엔 중장이었다지만 일개 남작이 그렇게까지 큰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아마도 뒤에서 누군가 그를 돕고 있겠지요.”
애시포드 남작은 군인이라서인지 행보에 거침이 없었으나 보통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여태 애시포드가 정보를 숨겼듯, 그와 같은 방향을 걷는 다른 귀족이 있다면 그들도 자신의 정보를 감추고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그 남자가 중장에 오를 만치 많은 공을 세운 것도 의심스럽기는 합니다만.”
“중요한 것을 더 우선적으로 보죠.”
아르세나는 단델리온 백작을 보며 난간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황제가 찾는 전설들에 마찬가지로 눈독을 들이는 귀족을 추려봐야겠죠. 이건 황녀의 도움이 필요하겠네요.”
아르세나의 말에 단델리온 백작은 자신의 조카를 떠올렸다.
제 누이의 딸이자, 제국 황실의 장녀. 자신들이 세력을 실어주면 장차 제국을 보다 옳은 곳으로 이끌 인물.
샤를리나 황녀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