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0)
바다새와 늑대 (19)화(20/347)
#19화
마녀의 주변엔 진주들이 수없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는데, 파도의 포말이 공중에서 멈춘 것 같이 보였다. 바람과는 상관없이 넘실거리는 물결 같은 머리카락이나 난데없이 나타난 점이나, 그녀를 감싸고 있는 형용할 수 없는 기이한 분위기가 모두 소녀가 마녀라고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입을 벌리고 주춤주춤 뒤로 팔을 뻗어 물러나자, 마녀는 고개를 기울였다. 파도 같은 머리칼이 느리게 흐트러졌다. 마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다가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너 저주받았구나?”
“예?”
“지독한 저주야. 너 앞으로 살날이 그리 길진 않겠구나.”
나는 대뜸 듣게 된 시한부 선언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마녀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아예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왼쪽 귀의 파란 깃털 귀걸이를 건드리거나 내 짧고 까만 머리카락을 슬쩍 들추는 등 내키는 대로 건드렸다.
그러더니 마녀는 내 코앞에서 내 눈동자를 빤히 보다가 물었다.
“「이전의 바다」를 알아?”
“네?”
“몰라?”
나는 눈만 데굴데굴 굴리다가 띄엄띄엄 대꾸했다. 모, 모르는, 데요……. 마녀는 흐음, 하고 나를 보다가 히죽 웃었다. 너 해적이구나? 그 단 한 마디에 온몸에 소름이 내달렸다. 도멤과 베제의 말이 떠올랐다. 초월자들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특히 바다의 마녀는 더더욱……
바다의 주인을 찌른 마녀, 땅을 삼키는 바다
마녀를 죽여라, 바다에 피를 담가라
마녀가 바다의 주인을 죽였기 때문에 지금의 바다가 되었대…….
온갖 생각이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문득 산하 해적들의 난파선이 떠올랐다. 동시에 뇌리에 한 가지 가설이 스쳐 지나갔다. 어떤 바다 괴물에게 당한 걸까 싶었는데 만약 괴물이 아니라 내 눈앞의 바다 마녀가 한 짓이라면?
그 순간 바다의 마녀가 얼굴을 굳히고 싸늘하게 물었다.
“일전의 그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과 한패냐?”
“…….”
설마가 맞았다. 나는 숨을 멈췄다가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아뇨, 적인데요.”
목소리가 덜덜 떨리는 것이 꼴사납기 그지없었으나 나는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거대한 짐승이 코앞에서 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과 비슷한 위압감이 등골을 내달렸다. 마녀의 눈동자가 차가운 심해처럼 가라앉다가 문득 나를 또렷하게 보더니 둥글게 떠졌다. 그러더니 눈을 끔뻑이던 마녀는 입을 가렸다.
“그러니?”
“……예.”
그래, 그렇단 말이지……. 어라? 이럴 수가, 세상에! 마녀는 눈을 가늘게 뜨다 말고 갑자기 난데없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파도 위를 찰박찰박 서성이며 혼자 뭐라고 중얼중얼거렸다.
아니 무슨 요즘 애들은 이렇게 헷갈리게 생겼다니? 하여간 다들 비슷비슷하게 입고 비슷비슷하게 생겨선……. 큰일 날 뻔했네……. 죽였다면 어쩔 뻔했어? 나는 더 듣는 것을 포기했다. 어차피 도망칠 수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처분을 기다리는 도살장 돼지 기분으로 눈을 꾹 감는데, 바다의 마녀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힉, 하고 소리가 새어 나가는 것도 잠시, 마녀가 말했다.
“내 이름은 루루미야. 이 바다의 초월자 중 하나지.”
“……?”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한참을 가만히 있던 마녀, 루루미는 내가 눈만 데룩데룩 굴리고 있자 내 얼굴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으응~? 그 소리에 나는 목을 자라처럼 움츠리다가 뒤로 뺐다. 그러자 루루미는 더욱 가까이로 붙어왔다. 으으응~?
나는 시선을 맞추지 않고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다가 문득 루루미가 내 이름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로, 로트.”
“그래, 로트!”
루루미가 기뻐하며 로트, 로트래! 하고 흥얼거리며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 기복에 눈을 깜빡였다. 뭐지. 이름은 왜 알려고 하는 거지. 기억해뒀다가 죽이려고? 어쨌든 지금은 안 죽을 것 같으니 다행은 다행이겠지? 그때 루루미가 나를 보고 공중에 엎드려 팔을 괴더니 황홀하다는 얼굴을 했다.
“귀여운 장난감이 생긴 기분이야.”
취소다, 취소. 죽는 것보다 비참한 꼴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과 다르게, 루루미는 다시 파도 위에 서더니 공중에 떠 있던 진주 중 세 개를 가져다 내게 쥐여주었다. 내가 어리둥절한 얼굴이자, 루루미는 히쭉 웃었다.
“모처럼 반가운 얼굴을 만났는데 그대로 죽게 둘 수는 없지. 이건 내가 직접 키운 진주야. 저주로 아파 올 때 하나씩 그대로 삼켜. 통증이 사라질 거다. 물론 다른 병이나 부상에도 탁월하지. 내키진 않지만, 원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넘겨도 좋아.”
넘길 리가. 나는 손에 들어온 진주 세 알을 꽉 쥐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연신 헤죽헤죽 웃던 루루미는 다시 턱을 괴고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말했다. 여기 있던 해적선, 내가 한 거 맞아. 따개비에 덮여서 죽어 가는 모습이 재미있었는데.
미친……. 난파선에 이상하게 따개비가 많이 붙어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떠올렸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진주를 주머니에 넣을 겸 집어넣어 숨겼다.
젠장, 내게 왜 이런 시련을…….
루루미는 내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여긴 내가 아끼는 섬이란 말이야. 그런데 멍청한 새끼들이 기어들어 와서 망치려 들기에…….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말하는 투가 발카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바다 관련된 자들은 모두 말씨가 이런가?
왜 난데없이 바다의 마녀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맞닥뜨리게 된 이상 초월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란 요원한 일이다. 그때 루루미가 웃으며 말했다.
“기회가 생기면 「이전의 바다」가 뭔지 알아봐. 꽤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루루미를 바라보기만 했다. 초월자들은 다들 이런가? 뭐든지 알고 있다는 것 같은 말투가 뜬구름 잡듯 말하니 일개 인간 입장에서는 ‘도를 믿습니까’ 정도의 헛소리 같았다. 나는 일단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나라도 초월자에게 대들 만큼 생각이 없진 않았다.
루루미는 내 고갯짓에 웃더니 나중에 또 보자, 하고 인사하며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꿈이라도 꾼 기분이었다. 멍한 얼굴로 눈만 깜빡이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자 루루미가 주고 간 진주가 만져졌다. 다시금 바짓단을 걷어 다리를 보자 종아리의 상처가 사라져 있었다. 나는 그제야 숨을 길게 내쉬었다.
꿈이 아니었다.
* * *
도멤이 일어나서 길게 하품을 했다.
“아, 잘잤…… 으악?! 로트?!”
나는 거하게 놀라는 도멤에게 퀭한 안색으로 인사했다. 좋은 아침. 내 근엄한 인사에 도멤은 잠시 입을 뻐끔거렸다.
“지금 한낮이야, 로트…….”
“그래, 그럼 좋은 오후…….”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잠시 후, 도멤은 침낭을 정리하며 혀를 찼다.
“진짜 깜짝 놀랐네. 자고 일어나자마자 다시 영원히 잠드는 줄 알았잖아! 간밤에 잠 못 잤어?”
굳이 따지자면 밤이 아니라 새벽이긴 했지만……. 도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나는 루루미가 사라진 이후, 거의 넋이 빠져서 침낭에 들어와 누웠다가 파도처럼 밀려온 후회를 곱씹어야 했다. 거기서 멍청하게 있지 말고 랄티아의 소식이라도 물어볼걸!
나에게 별다른 심술을 부리지 않았으니 잘하면 도움을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저주는 어떻게 알았지? 하긴, 초월자잖아. 그보다 이 진주 정말 믿어도 되는 걸까?
안 믿으면 어떻게 하겠어. 내 주제에…….
번뇌에 사로잡힌 인간은 잠 못 드는 법이다. 나는 늘어지는 팔다리를 겨우 추슬러 침낭을 정리했다. 도멤의 비명에 날벼락 맞아 기상한 키이엘로가 그런 나를 보고 고개를 설설 저으며 자신이 대신 내 침낭까지 가져가 정리했다.
원래라면 내 몫을 왜 네가 하냐며 뭐라고 해야 할 내가 그것도 넋 놓고 보고 있자, 도멤이 진지하게 물었다. 로트, 간밤에 인어라도 봤니? 헛소리하지 마. 내가 딱 잘라 대꾸하자 도멤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로트 맞네…….
나는 빵과 치즈를 가져와 그들과 함께 늦은 아침을 먹으며 웅얼웅얼 물었다.
“바다의 마녀를 자세하게 알아?”
“왜, 관심이 더 생겼어?”
“음…….”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도멤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버터를 바른 빵을 입에 넣고 손을 털었다. 우물거리며 빵을 삼킨 도멤이 턱을 문질렀다.
“옛날 동화 같은 거지만. 알지, 그 이야기? 「이전의 바다」 말이야.”
또 그 이야기였다. 다들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인가? 나는 대충 바다에 대한 전설을 아는 정도였다. 바다의 주인을 마녀가 죽이고, 대신 바다를 독차지했다는 전설이나, 옛날에는 가장 큰 제국의 섬보다 더 커다란 대륙이 있었다는 등의 이야기. 그것도 거의 잊고 있었다. 누가 어릴 적에나 들었던 동화 내용을 다 기억하고 있겠어?
나는 고민하다가 이실직고했다. 사실 난 「이전의 바다」를 본 적은 없어. 그러자 키이엘로가 놀라는 얼굴을 했다. 도멤도 눈을 크게 뜨고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건…… 의외네. 어릴 때부터 뱃일했다 하지 않았어? 나는 그 소리에 심보가 불퉁해지는 것을 느꼈다. 뭐, 뱃사람 필독서이기라도 하냐?
어쨌거나 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어깨를 으쓱였다. 옛날 옛적부터 마을의 뱃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받았다고 말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게다가 난 책과는 부러 거리를 두곤 했다. 알아봐야 하등 쓸모없는 기대감만 부푸는 것 같아서…….
그때 도멤이 별수 없지, 하고 입을 열었다.
“「이전의 바다」는 말 그대로, 이전의 바다에 관해 적힌 책이야. 같은 제목이지만 얇은 동화책도 있고, 논문 수십 개는 엮은 것 같은 어마어마한 두께도 있지. 뭐 다들 아는 건 동화 부분이지만, 거기에 매달려서 바다에 잠긴 문명을 연구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야.”
그게 재미있나? 하여간 학자는 이해하기 힘들어. 도멤은 삐죽이고는 말을 이었다.
“동화는 유명하니까 다들 간단하게라도 알지. 이전에는 지금 제국이 있는 섬보다 더 큰 땅덩어리도 존재했고, 그때엔 바다를 다스리는 ‘바다의 주인’이 있었다고.”
도멤은 재치 있는 입담의 소유자답게 어린아이들이 보는 동화도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갔다. 동화 자체가 재미있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야기에서, ‘바다의 주인’은 뱃사람들을 가호하는 신적인 존재였다. 그는 푸른 머리카락과 자줏빛 눈동자, 빛나는 물결같이 멋진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바다 괴물들도 바다의 주인에게는 고개를 숙이고, 거칠게 치는 파도는 그의 손짓 아래 잠잠해졌다.
그는 어느 날, 바다를 빚어 바다새를 만들었다. 그에게 권능을 일부분 받은 바다새는 날씨를 읽고, 뱃사람들에게 가호를 내릴 수 있었다.
바다의 주인에게는 여럿의 친우가 있었는데, 그중 바다의 모두에게 사랑받는 바다의 주인에게 질투하는 친우가 있었다. 그 친우는 어느 날, 질투심을 참지 못하고 새벽을 틈타 바다의 주인을 칼로 찔렀다.
칼에 찔리는 순간 바다의 주인은 여명의 하늘과 바다의 푸른빛을 눈에 담고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고, 잠들어있던 바다 괴물들이 눈을 떴다. 잔잔하던 바다가 깨어났다.
그리고 순식간에.
온 세상을 바다가 덮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