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02)
바다새와 늑대 (201)화(202/347)
#45화
저녁 식사가 끝난 뒤엔 남매의 집으로 갔다. 우리에게 방을 내준 집이 매우 작아서 그 가족은 주방 바닥에 이불을 깔았다. 도멤은 미안하고 눈치 보이는 태도로 가족들을 힐끔힐끔 살폈지만, 나야 냉큼 좋아서 드러누웠다.
“우리한테 방을 다 내주다니……. 너무 미안한데.”
“내버려 둬. 우리야 며칠 푹 쉬다가 가면 되는 거고, 저 사람들도 며칠 잠자리만 불편하면 되는 일인데.”
“그렇지…….”
도멤은 머쓱한 기색으로 이불을 덮고 누웠다. 나도 물론 선량한 민간인의 집을 이렇게 비양심적으로 차지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노숙으로 쌓인 피로는 풀 수 있을 때 풀어야 앞으로의 여정에 무리가 없을 터였다. 마음이야 좀 불편하지만 며칠뿐이니까.
나는 부러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눈을 감았다. 발카가 그런 내 가슴 위로 올라와 납작 엎드려 누웠다. 마지막으로 씻으러 갔던 키이엘로가 방으로 돌아와 머리칼을 털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배도 부르고 잠자리도 편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의 호의라는 것도 오랜만에 받아보고. 마을 사람들은 우리를 남매의 가족에게 떠넘기기는 했으나 기본적인 태도에는 호감이 가득했다. 덕분에 발카를 밖에 꺼내줄 수도 있었고.
사람들은 파란 새를 신기하다는 듯 보기는 했으나 바다새라고 여기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런 점은 검은바다에 처음 올랐을 때가 생각나는군.
나는 꺼림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의 붕대를 모두 새로 간 우투그루도 자리에 눕자 키이엘로가 램프의 유리를 열고 말했다.
“불 끌게.”
후. 램프 불을 끄는 숨소리와 함께 우리는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다.
* * *
아침이 되자 우리는 신세를 지고 있는 가족들에게 나름의 도움을 주고자 여러 잡일에 손을 거들어주었다. 도멤은 빨래나 장작 패기를 도우면서 이런 거라도 할 수 있다는 것에 기쁜 표정을 지었다.
대체 그간은 검은바다에서 어떻게 해적 노릇을 하고 지냈는지 알 수 없었다. 하긴, 우홉피아주에게 눈이 돌아가 있던 때라 그랬겠지. 사실 도멤은 그때조차도 붙임성 좋고 착한 녀석이었다.
나는 내 어깨에 앉은 발카에게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는 남매를 힐끔 일별하고 고개를 돌렸다. 괜히 애들에게 관심을 주며 돌보게 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뒤뜰에서 남매의 어머니가 그들을 부르자 남매는 발카에게 손을 흔들더니 와르르 제 어머니께 뛰어갔다.
마을이 제국의 소식을 듣지 못한다는 확신이 생기자 나는 답답하던 후드도 벗어버렸다. 나는 나무 그늘에 앉아 턱을 괴고 한갓진 정경을 응시했다.
내 머리칼 위로 습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바람에 휘어지며 소란한 연둣빛 들판의 너머로 하얀 새들이 날아올랐다. 거대하게 부푼 뭉게구름을 보자 여름이 성큼 다가온 게 실감이 났다.
한가로운 광경이었다. 만약에 랄티아를 되찾아 육지에 살게 된다면 이런 풍경을 느긋하게 볼 수 있는 곳이 좋겠다……. 그때 나와 같이 나무 그늘에 앉아 있던 우투그루가 잡일을 돕는 도멤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저 얼간이.”
“뭐 어때, 양심의 가책을 덜겠다는데. 내버려 둬.”
“넌 네 친구가 저렇게 호구 잡혀도 상관없어?”
“호구가 아니라 착한 녀석인 거지. 도멤이 왜 호구냐? 보증을 서준 것도 아니고.”
내 말에 우투그루는 뚱한 낯을 하더니 신경질적으로 팔짱을 끼다가 부상 탓에 어깨를 움칠 떨었다. 나는 그걸 보고 파하하 비웃었다.
그때 연노랑 색의 치마 위에 앞치마를 걸친 여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손에는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있었는데, 깅엄 체크 무늬가 들어간 보로 덮고 있어 내용물은 짐작할 수 없었다. 나와 우투그루가 다소 경계하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여자는 옅게 상기된 얼굴로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저, 빵을 구웠는데…… 드시겠어요?”
“……아.”
나는 눈을 끔뻑이며 그녀를 보았고, 우투그루는 여전히 언짢은 얼굴로 여자를 흘겼다. 조심스럽게 근처로 와서 잔디 위에 앉은 그녀가 바구니 위의 보를 걷었다. 고소한 냄새와 온기가 끼쳐왔다. 그녀는 뭐가 그렇게 설레는지 불긋해진 얼굴로 내게 빵을 하나 내밀었다.
“드세요.”
“아, 네.”
나는 냉큼 받아들고는 아차 했다. 반사적으로 받아 버렸다! 딱히 먹을 것이 내키는 상태도 아니었던 터라 머뭇거리며 빵을 찢는데, 여자는 우투그루에게도 같은 것을 내밀었다. 그러자 우투그루는 미간을 좁히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뇨, 딱히 생각이 없어서.”
“아, 그렇군요.”
그녀는 겸연쩍은 기색도 없이 흔쾌히 빵을 도로 바구니에 넣고는 나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빵을 입에 넣은 나는 좀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왜지. 빵은 부드러운데 시선 탓인지 목이 막혔다.
부담스럽게 와닿는 그녀의 눈길을 애써 외면하며 먹고 있자니 우유 통을 들고 오던 키이엘로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도멤 혼자만 잡일을 하면 어색해진다며 함께 돕는 중이었다. 사실은 우투그루와 있는 게 몸서리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여자를 보고 눈살을 살짝 찡그린 키이엘로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언제 찡그렸냐는 듯 산뜻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가 챙이 넓은 밀짚모자 아래로 고개를 기울였다. 흔한 농부 차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지나치게 수려했다.
“누구세요?”
“아, 안녕하세요. 저는, 이 옆집 주민인데요.”
여자는 화들짝 놀라 키이엘로를 보았다가 한껏 상기된 얼굴로 재잘거렸다. 그 틈에 나는 발카에게 빵을 넘겼다. 영 안 내키는 얼굴로도 발카는 내가 건넨 빵을 부리로 야금야금 뜯어 먹었다. 키이엘로는 어색한 얼굴로 여자를 보다가 슬쩍 내 근처에 앉았다. 그가 물었다.
“어쩐 일로 오셨나요? 이 집 부부께서는 뒤뜰에 계시는데.”
“아, 괜찮아요. 빵을 좀 나눠드리려고 온 거라서.”
“빵이요.”
키이엘로가 다소 의미심장하게 되짚었지만, 여자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 듯 바구니에서 다른 빵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키이엘로는 미미하게 웃는 얼굴로 그것을 받아들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냄새가 좋네요. 언제 구운 건가요?”
“점심으로 먹으려고 구웠어요.”
그녀는 내내 상기된 얼굴로 나를 힐끔거리며 키이엘로와 대화를 나눴다. 나는 별생각 없이 나무에 기대서 하늘 위 구름이나 구경했다. 다만 우투그루는 제 눈앞에서 시시덕거리는 키이엘로가 꼴도 보기 싫었는지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것참……. 나는 그런 우투그루를 한 번 보고 신경을 끄기로 했다. 여전히 빵은 입에 대지 않은 키이엘로가 물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제국이 이 제도에 괴물이 있다는 걸 무시했다는 것 같은데, 맞나요?”
“네, 네! 세상에, 정말 나쁘죠. 괴물뿐만이 아니에요. 저기 옆에 있는 섬 보이나요?”
여자는 금방 격분하며 말했다.
“저 섬의 화산이 매번 주기에 맞춰서 폭발하거든요. 저것뿐만이 아니라 괴물이 있던 섬도요! 저게 폭발하면 제국에서 우리에게 지원금을 줘야 하는데 아무래도 그걸 주기 싫어서 버틴 것 같아요.”
“저런.”
나는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난 탄식을 흘렸다. 내 반응에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더니 말했다.
“그리고 화산과 괴물로부터 미리 대피한 사람들을 난민으로 받아달라고 몇 번이고 요청했어요. 그런데 그것도 다 거절하고…….”
“…….”
나는 사회면 신문을 보는 아저씨처럼 ‘이 천벌 받을 놈들!’하고 외치려던 것을 꾹 참았다. 솔직히 나와는 연관 없는 이야기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건 꼴만 우스워질 뿐이다. 초면에 꼴불견이 될 뻔했군. 우리가 조용히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 그녀는 뒤늦게 아차 싶었는지 발그레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여러분이 괴물을 물리쳐주셨으니까 다행이죠…….”
“네에.”
조용한 남자 둘을 대신해 내가 어색하게 대꾸하자, 그녀는 싱긋 웃더니 허우적 일어났다.
“저, 실례했어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빵 고마워요.”
키이엘로가 그제야 흐릿하게 웃으며 받았던 빵을 흔들어 보였다. 아직도 안 먹었네. 여자는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하고는 멀리 사라졌다. 내내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던 우투그루가 미간을 좁히며 그런 여자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나는 어색하던 사람이 간 것에 기뻐하며 나무에 더 편하게 기대앉았다. 여전히 빵을 먹지 않은 키이엘로가 말했다.
“이건 이따가 이 집 남편분 드려야겠다.”
“안 먹고?”
“음…….”
키이엘로는 말을 흐렸지만 나는 곧장 그가 생판 모르는 사람이 준 빵을 딱히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나는 뒤늦게 찝찝해졌다. 젠장, 난 반쯤 먹었는데……. 게다가 발카도 먹었다.
내 떨떠름한 얼굴을 본 키이엘로가 하하 웃었다.
“걱정하지 마, 뭔가 있을 거 같아서 그런 건 아냐. 그냥 호의를 무작정 받기 부담스러운 거지.”
“그래?”
“사실 조금은 그런 쪽으로 의심했지만.”
“역시 토하고 올까…….”
농담이야! 키이엘로가 웃는 것을 뒤로하고 우투그루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뭔가 의심스러운데.”
“네가 안 의심할 사람이 있기나 하겠냐, 인간불신자.”
“시끄러워. 넌 미심쩍지 않아?”
우투그루의 물음에 나는 눈썹을 휙 휘어 올렸다. 잠시 여자가 간 궤적과 키이엘로가 든 빵을 번갈아 본 나는 의아하게 물었다.
“뭐가? 저 여자가 뭔가 꿍꿍이가 있을 것 같아서?”
“아니, 정말 모든 마을 사람이 너와 발카의 정체를 알지 못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냐는 말이야.”
나는 그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키이엘로 역시 여전히 시큰둥한 얼굴이었지만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물었다.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생각한 건데?”
“제국의 영향이 적다고 말하고 그렇게 보이는 것치고는 제국으로부터 받으려는 건 많아 보이던데.”
“하지만 그건…….”
내가 떨떠름한 얼굴을 하자 우투그루가 재차 말을 이었다.
“그래, 그냥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일 수 있지. 근데 생각해 봐. 제국에게 지원금을 받든 뭘 하든 원하는 게 많을 사람들이 제국의 이야기에 귀를 안 기울일 수가 있나?”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발카를 힐끔 보았다. 발카는 날개를 한 번 퍼덕이더니 말했다.
『걱정 마, 네 눈은 잘 안 보였을 거야.』
딱히 그걸 걱정한 건 아니지만. 나는 이제 반쯤 모아 묶을 수 있는 머리카락을 슥 손으로 빗었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네 말도 일리는 있어. 근데 일단 당장은 어떻게 할 수 없잖아. 단순히 경계를 늦추지 말자는 뜻이지?”
내 말에 우투그루는 제 어깨를 보고 혀를 찼다. 우투그루의 부상도 부상이지만 우리가 떠나는 것을 도와주기로 한 마을의 사람들은 며칠 준비할 기간을 달라고 했다. 그들 사이에서도 뭘 얼마나, 누구의 것을 내줄지 상의가 필요하겠지. 적어도 공짜 배에 식량을 얻어 떠나게 되는 거니 기다리는 것이 이득이기도 했다.
우투그루가 퉁명스러운 얼굴을 하며 말했다.
“그냥 야밤에 배 하나 가져다 뜨면 안 되나?”
“글쎄다…….”
“너희 뭐 해?”
그때 도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잡일꾼 노릇은 끝난 모양이었다. 우리가 나누던 이야기를 해주자, 도멤은 애매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진작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괴물을 처치했으니 무시무시하게 보였는가 보지.”
“우투그루, 괴물보다 사람이 해치우기 쉬운 법이고, 마을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는 수적으로 열세야. 그리고 너도 부상인 걸 그들도 아니까 네가 낫는 걸 기다리기보다 당장 해치우는 게 좋았을걸.”
도멤이 퍽 논리정연하게 말했다. 이렇게 들으니 또 맞는 말 같고……. 살벌한 의견과 달리 침착한 얼굴이던 우투그루는 서서히 다시금 불퉁한 표정을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