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04)
바다새와 늑대 (203)화(204/347)
#47화
“언니가 절 찾으러 오는 것과 제가 당신에게 확답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너희는 대체 무얼 생각하고 있는 게냐?”
클루스도가 빠르게 내뱉었다. 그는 윽박지르는 것 같기도 했지만 동시에 호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제국의 눈을 피해 살 생각이냐? 우리의 협력 제의를 거절하고? 그게 뭐든,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랄티아는 괜히 부자연스럽게 행동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혹은 차라리 극심한 반항기 청소년처럼 보이길 바랐다. 어른들은 종종 손쉽게 그녀 또래의 낌새를 알아챈다. 굳이 꺼림칙한 기색을 엿보여 자신들을 감시하는 눈을 늘릴 수는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랄티아는 문득 협력하는 척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가능한 말이다. 언니와 달리 랄티아는 얌전하고 연약한 여자애라는 인식이 많으니까. 랄티아는 잠시 침착함을 되찾았다.
‘나도 언니처럼 주먹질을 잘했으면…….’
‘네 알 바 아니잖아, 개새끼야!’ 하고 옴팡지게 주먹질하는 로트렐리를 떠올린 그녀는 속으로 생각을 흩어냈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생각하며 시간을 버리는 것보다 현재 상황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나았다.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계획하든 그건 저희의 일이죠. 당신이 왈가불가할 수 없어요.”
“편한 길을 두고 왜 굳이 어려운 길을 가려 하지?”
클루스도가 선장실의 책걸상에서 일어나며 랄티아를 응시했다. 랄티아는 그것이 무의식적인 위협이라고 기민하게 눈치챘다.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에게 의사를 묻는 것을 두고 왜 우릴 억지로 붙들어 두는 것을 택했죠?”
그 말에 클루스도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랄티아는 코트 자락 아래로 손을 말아쥐며 꿋꿋하게 쏘아붙였다.
“마치 우리의 위험을 미리 인지하고 배려한 듯이 말하네요. 우리가 위험을 감수하고자 한다면 그것조차 우리의 선택이에요. 당신의 섣부른 개입도, 이제 와 인심 쓰듯 말하는 협력도 우리는 모두 원하지 않아요.”
어둑한 선장실을 밝히고 있던 촛불이 휘청 꺾였다. 랄티아는 클루스도를 마주 보았다. 주홍빛 음영과 하관을 덮은 수염 탓에 그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클루스도가 말을 꺼냈을 때, 랄티아는 움츠러들 뻔했다.
“그래, 확실히 내가 실수를 하긴 했지.”
“…….”
“허면 이전의 일을 사과한다면 훗날 네 언니가 왔을 때 재고해 볼 수 있겠느냐?”
“뭐…….”
랄티아는 황망한 얼굴로 클루스도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웃기는 소리였다. 그러나 동시에 당혹스러웠다. 만약 정말로 이들이 나와 언니의 편의를 봐준다면……. 약간 설득되려던 랄티아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독단으로 판단할 문제는 아니네요.”
“……그래?”
클루스도는 냉한 눈으로 랄티아를 직시했다. 그는 그 이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마치 잔잔하던 호수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킨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처럼.
랄티아는 선장실을 나가 선원들의 손에 다시금 함저 구역으로 향하며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제국도 위험하지만, 그렇다고 해적을 믿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지금에 와서야, 바다새가 손아귀를 벗어난 뒤에야 우리의 편의를 봐주겠다며 어르는 건 믿을 수 없어. 그가 발카를 손에 쥐게 되면 그때야말로 나와 언니에게 무슨 짓을 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
랄티아는 짧은 대화만으로 피로감을 느꼈다. 우홉피아주에 있을 때도 끔찍하긴 했지만, 지금은 무언가 다른 방향으로 피곤했다. 그는 왜 언니를 배신하는 것을 택했을까? 그는 왜 바다새를 이런 식으로까지 붙잡으려 하는 걸까? 나는 어떻게 해야 이 배를 벗어날 수 있을까?
언니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갑판을 지나는 잠깐 사이에 불어온 바닷바람이 차가웠다. 따스하게 달아오르는 대기와 달리 푸른 바다를 내달리는 돌풍은 그 색채를 닮아 차갑기만 했다.
시꺼먼 군청색으로 칠해진 밤바다로 걸어가는 것처럼 랄티아는 해적선의 깊숙한 곳으로, 아래로 들어갔다. 감옥처럼 느껴져야 할 바다 아래의 어둑하고 서늘한 곳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현재, 랄티아는 클루스도에 관한 고민을 하는 것을 관뒀다. 로트렐리를 본받기로 한 것이다.
언니는 짜증 나는 사람이 눈에 보일 때마다 주먹질을 휘두르거나 엿을 날리거나 ‘빡치는 새끼는 신경 끄고 내 할 일이나 해야겠어’라고 말하곤 했지. 나는 앞의 두 가지는 못하니까 마지막 하나라도 따라 실행할 거야.
랄티아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빡치는 새끼는 신경 끄고 내 할 일이나 해야겠어.”
“……네가 이럴 때마다 로트 동생이 맞다는 것만 깨닫는다.”
그 중얼거림에 브레딕이 은은한 미소를 띄웠다. 그에게 대꾸하는 대신 하몬을 바라본 랄티아는 미간을 좁혔다.
“저기요, 중립분자 씨. 어디까지 허용해줄 거예요?”
“그걸 내가 어떻게 정하냐? 너네끼리 알아서 대가리나 잘 굴려봐.”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굴면 유혈사태가 일어날지도 몰라요.”
“퍽이나.”
일전의 고문이 고작 간지럼이었기 때문인지 하몬은 당당히 코웃음을 쳤다. 랄티아는 자신이 전에 <가장 성공적인 고문 방법 100선>을 읽어본 적이 있다는 것을 말할까 고민하다가 눈을 굴렸다.
참고로 그 책은 58번째 방법인 ‘사람의 뼈관절을 사용하기’ 부분을 읽던 중 어머니께 압수당했다. 그래, 완독한 것은 아니니 일단은 입 다물자.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는 어디까지 가능한지 알아야 해요. 하몬은 무시하고 우리끼리 생각해 보기로 해요.”
“헤더는 어쩌고?”
네토르가 물었다. 랄티아는 난데없는 이름에 눈썹을 들어 올렸다. 헤더는 함저 구역에 격리된 게 아니지 않던가? 요한과 이미 소통이 된 마당에 굳이 헤더와 말을 주고받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랄티아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헤더는 여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면에선 우리보다 더 감시받는 중이라 발각될 위험성이 커요. 여길 나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요한과는 다르니까요.”
“그래서 안 데려가겠다고? 헤더는 널 따라가고 싶어 할 텐데.”
랄티아는 더더욱 의아한 얼굴을 했다. 나를? 왜? 클레인스가 침착한 얼굴로 입매를 펴며 네토르를 보았다.
“헤더 누나도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하는군요.”
“그야, 뭐. 이제는 걔 아버지도 죽었고. 걔가 기대던 게 로트 그 녀석인데 이제 그 녀석과 이 배가 도로 돈독하게 될 여지가 없잖아.”
“그게 왜 저를 따라올 거란 이야기로 전개되는 거죠?”
네토르는 할 말 많은 얼굴로 랄티아를 보았다.
“넌 온갖 똑똑한 시늉은 잘하다가 이럴 때만 못 하더라.”
그에 랄티아가 뚱한 얼굴을 하자, 네토르는 그 얼굴마저 로트를 닮았다며 진저리를 치고는 말했다.
“네가 로트의 동생이잖아. 그리고 헤더가 이 배에 남아서 대체 뭘 하겠어? 설령 여기 사람들이 걔한테 역할을 준다고 해도 헤더부터가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을걸.”
이미 우리가 해적단에서 벗어난 듯이 말을 하는구나. 베제가 구시렁댔으나 네토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받아쳤다. 난 형제만 찾으면 된다니까. 그들의 대화를 무시한 랄티아가 재차 말했다.
“그것까진 제가 신경 쓸 여유가 없어요. 일단 계획 자체도 백지상태니 뭐라도 골자를 짜둬야죠.”
솔직히 말하자면 랄티아는 헤더는 안중에도 없었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헤더가 부담스러웠다. 막말로 헤더가 자신을 돕는 것과는 별개로 랄티아는 헤더까지 책임지고 싶지 않았다.
헤더의 아버지란 사람은 로트렐리의 진주가 하나뿐이었던 탓에 죽었다. 그리고 랄티아는 그녀의 아버지가 어찌 되든 상관없이 로트렐리만 무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내심 초조함과 짜증을 느끼기까지 했다. 랄티아도 그랬는데 헤더라고 그러지 않았을까?
랄티아는 마음을 다졌다. 역시 믿지 못하겠어. 꺼림칙해.
랄티아는 그 누구도 믿지 못했다. 이들과 오래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었던 데다, 그간 언니에게 들은 이야기 틈으로 보이는 선원들의 태도는 자매의 고향 섬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언니에게 그런 태도를 보이는 놈들은 신뢰할 가치가 없다.
물론 이들 중 몇은 나름 그녀를 잘 챙겨줬고 위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보호해줬지만……. 그때 베제가 말했다.
“그전에 말인데, 나는 탈출에 함께하진 못할 거야.”
“네?”
랄티아가 골몰하던 머리를 홱 들며 되묻자, 그가 얼른 부연했다.
“돕지 않겠다는 게 아니고, 같이 탈출하진 않는다고. 전에 말했다시피, 난 프라세를 봐야 하니까.”
“하지만 그럼 우리가 탈출한 뒤에 처지가 애매해질 텐데요.”
이미 비슷한 이야기를 나눈 전적이 있었다. 흐지부지 마무리되었지만 검은바다에서 그들이 탈출하고 나면 남은 이들의 처우가 그리 곱진 않을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클레인스의 말에 베제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데 나는 아무래도 프라세를 포기 못 할 것 같아. 그렇다고 걔를 데리고 가자니, 프라세의 가족은 섬에 있잖아. 걔가 성인이면 모를까 아직 청소년인데 가족하고 생이별을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건 그렇죠…….”
네토르나 브레딕이나 클레인스나, 모두 사과나무 섬에서 기다리는 가족이 있는 이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베제는 프라세를 제 동생처럼 아꼈고, 프라세의 가족은 버젓이 섬에서 지내고 있었다.
프라세와 베제가 탈출한다고 해도 훗날 검은바다의 화풀이가 섬에 있는 가족에게도 끼칠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마당에 베제가 섣불리 랄티아를 따라 떠날 수는 없었다. 랄티아는 대강 이해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건 괜찮아요. 누구처럼 애매하게 굴면서 간 보는 것보다야 훨씬 명쾌한 문제네요.”
“그거 설마 날 말하는 거냐?”
하몬이 왈칵 성을 냈지만 랄티아는 대꾸조차 하지 않고 손을 들어 그들의 시선을 모았다.
“그래서, 제가 막 떠올린 방법이 있는데요.”
“그래? 뭔데?”
“그 전에.”
말을 끊은 랄티아는 푸르스름한 빛을 뿜는 마장석을 보았다가, 하몬을 보았다. 하몬은 여전히 심드렁하고 권태로운 낯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그 여유롭고 거만한 자세만 보자면 그가 앉아 있는 곳이 마치 왕좌 같았다. 하몬이 신경질을 부렸다.
“뭘 보느냐?”
“하몬, 눈감아 주는 건 싫다고 했죠.”
그 말에 하몬은 눈썹을 삐딱하게 올렸다. 강퍅한 인상이 차가운 색으로 도드라졌다. 랄티아가 말했다.
“그럼, 우리가 당신을 돕는 건 어때요?”
하몬과 랄티아의 시선이 부딪쳤다. 괴팍한 사내는 랄티아의 회색 눈을 한참 바라보다가 씨익 웃었다.
“그거 괜찮군.”
* * *
사흘이 빠르게 흘러갔다. 히스테릭하던 우투그루도 마을 사람들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그제서야 좀 잠잠해졌다. 첫날 일행에게 빵을 주러 오던 여자는 그 뒤로 아침을 제외한 모든 때에 빵을 주기 위해 왔다.
도멤과 로트렐리는 그녀가 남매의 가족이 받는 부담을 덜기 위해 그런 게 아닐까 추측했다. 희망적인 생각에 기댄 추측이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괜히 피곤하게 의심하는 것보단 나았다. 우투그루도 미심쩍은 얼굴을 했지만 몇 번은 입에 넣었다.
의외로 절대 그것을 먹지 않은 건 키이엘로였다. 키이엘로는 주는 빵은 기쁘다는 얼굴로 흔쾌히 받고는 그걸 남매의 집 빵 바구니 안에 넣었다.
“너희도 웬만하면 먹지 마.”
키이엘로의 말에 도멤은 순순히 받은 빵을 집의 바구니 안에 두며 물었다.
“너도 뭔가 미심쩍은 거야?”
“조심성 있다고 해둘게. 그리고 정말 그 여자가 이 집의 부담이 클 게 걱정되어서 그러는 거라면, 딱히 문제가 되는 일은 아니잖아.”
그 여자가 준 빵도 이 가족에게 골고루 돌아갈 테니. 키이엘로는 그렇게 말하며 우투그루를 흘겼다. 우투그루는 제 부상을 살피고 있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눈썹을 들어 올렸다.
“뭘 봐?”
“여기서 제일 짐덩이인 놈이 언제쯤 짐덩이 신세를 벗어날까 싶어서.”
키이엘로는 다정한 어조로 신랄하게 말하고는 싱긋 웃었다. 여객선에서 있었던 말다툼의 복수였다. 로트렐리는 또 시작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