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05)
바다새와 늑대 (204)화(205/347)
#48화
로트렐리는 우투그루가 발끈해 일어나기 전에 부러 둘의 사이를 가리며 비스듬히 섰다. 비죽 나오기 시작한 뒷머리를 반쯤 모아 묶으며 로트렐리가 우투그루에게 물었다.
“그래서, 좀 나았어?”
“……이전보다야 훨씬 낫지.”
탐탁지않은 기색으로 입을 다문 그가 로트렐리에게 팔을 내밀어 보였다. 그의 부상은 피가 다 멎고 벌건 살갗이 새로 나고 있었다. 브레딕이 약학을 공부할 때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우투그루는 스스로를 곧잘 챙겼다. 로트렐리는 다시금 물었다.
“언제쯤 출발할 수 있을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나갈 수 있지만. 그건 왜 물어?”
“대략적인 일정을 잡으면 마을에 알리려고.”
그녀의 말에 황당해하려는 우투그루를 손을 들어 가로막고 로트렐리가 말을 이었다.
“원래 일정보다 며칠 더 기간을 늘려서 말할 거야. 그래야 혹시 모를 위험을 피하지. 그리고 말하는 건 키이엘로가 맡을 거고.”
갑작스러운 통지였지만 키이엘로는 당황한 기색 없이 순순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투그루도 로트렐리의 말을 곱씹더니 납득한 것 같았다.
도멤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사란은 아직 부른 적 없지?”
“응. 굳이 시도 때도 없이 부르면 오히려 능률이 떨어지지 않나 싶기도 하고, 마을 사람 이목 피하는 게 어렵기도 하고…….”
로트렐리는 한숨을 쉬며 말하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어디로든 가야 했다.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적당히 사흘쯤 더 후에 떠나기로 결정한 뒤, 키이엘로가 마을의 대표에게 그것을 전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를 따라 마당으로 나온 셋은 대충 햇볕이나 쬐며 풀밭에 앉았다.
“불안한 요소만 아니라면 참 좋은 곳인데. 매일 빵을 나눠주는 사람도 있고, 남매는 귀엽고, 부부는 친절하고, 마을 사람들은 우리에게 간섭 안 하고.”
도멤의 말에 로트렐리는 고개만 끄덕였다. 어린 남매는 그녀에게 하여금 죽은 동생들을 떠오르게 했다. 발카를 신기해하며 만져 보려 살금살금 다가오는 모습이 더욱 그랬다.
하지만 향수를 불러오는 것과는 별개로 로트렐리에게 그들은 경계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갑자기 발카를 잡아채려고 하거나, 해를 끼치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 탓에 로트렐리는 남매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족족 매섭게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남매는 로트렐리를 어려워했다. 정확히는 남자애 쪽이 그랬다.
여자애는 오히려 뭔가 동경하는 얼굴로 로트렐리를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후다닥 도망가기 일쑤였다. 로트렐리는 길게 자라난 강아지풀을 손아귀에 쥐고서 흔들며 흘러가는 높쌘구름을 응시했다.
‘만약 일이 잘 풀린다면 애들에게는 미안한 일을 한 게 되네.’
괜한 의심으로 동물을 신기해하는 애들을 눈치 주며 쫓아냈으니 내심 양심에 찔리는 일이었다. 조용히 산들바람과 햇살을 받으며 누워있던 셋은 금방 노곤노곤한 기분에 휩싸였다.
풀잎이 스치는 소리와 멀리서 이따금 가축이 우는 소리, 살짝 습하고 따끈한 온도와 옅은 땀을 식히는 바람까지 모조리 한가로웠다.
“다시 바다로 떠나게 된다면 지금이 좀 그리워지겠다.”
가물거리며 졸던 도멤이 비몽사몽 한 어투로 말했다. 로트렐리가 그러게, 하고 동의했다. 우투그루는 별말 하지 않았지만, 그가 비아냥거리지 않으면 대부분은 동의의 표현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열심히 각자 일하고 있을 텐데 우리만 이렇게 한량처럼 들판에 누워서 낮잠이나 잔다니.”
“우린 괴물을 무찌른 사람들이잖아. 좀만 즐기자.”
로트렐리의 실없는 소리에 도멤이 소년처럼 웃으며 답했다. 제일 열심히 일을 돕던 주제에 말은 잘한다고 생각하던 로트렐리는 어김없이 찾아온 여자를 보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들을 발견하고 밝은 얼굴로 다가온 그녀에게 다시금 빵을 얻은 셋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로트렐리가 멀어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곧 떠날 거라고 말을 하는 게 나았나?”
“글쎄, 아직 시간 여유가 있으니까 나중에 말하지 뭐.”
그렇게 대꾸한 도멤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해. 다들 로트 너를 여자라고 생각하질 않는 것 같아.”
“난 이미 익숙해졌어…….”
로트렐리가 못마땅한 얼굴로 대꾸하며 빵을 쪼개 개울가로 던졌다. 작은 물고기 떼가 몰려와 그것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도멤 역시 옆에서 그녀를 따라 하며 웅얼거렸다.
“그렇지만 이상하잖아. 물론 나도 한때 널 남자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지만 말이지, 돌이켜 보면 넌 항상 네 성별을 딱 말하지 않은 데다가 여자라고 생각하고 봐도 이상할 게 없거든. 이젠 머리카락도 꽤 길었는데 다들 널 남자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뭘까?”
“역시 내가 너무 잘생겼나?”
로트렐리의 말에 도멤이 호오, 하고 흥미롭단 소리를 냈다. 반면 그들의 대화를 아닌 척 듣고 있던 우투그루는 질색하며 그들에게서 등을 돌려 누웠다. 도멤은 우투그루의 반응에 낄낄 웃다가 말했다.
“하지만 너처럼 잘생긴 남자가 흔한 것도 아닌데.”
“우리 사이엔 키이엘로가 있잖아. 말조심해야지.”
“하긴, 여자 중에도 남자 중에도 키이엘로를 미모로 이길 사람은 드물 거야…….”
시답잖은 이야기나 나누던 중 키이엘로가 돌아왔다. 로트렐리와 도멤은 그를 대단히 환대했다.
“왔는가, 미인!”
“어서 와, 미인!”
“갑자기 뭐야?”
키이엘로가 당황하든 말든 깔깔 웃는 두 명을 보며 우투그루는 학을 떼며 진저리쳤다. 그들이 키이엘로에게 대강 무슨 얘기를 했는지 떠든 뒤에야 우투그루가 말을 꺼냈다.
“마을 쪽에선 뭐라고 했는지 얘기 안 할 셈이야?”
그 말에 셋이 잡담하던 것을 멈췄다. 우투그루는 어쩐지 자신이 그들의 화목한 시간을 방해한 걸림돌이 된 기분이었다. 그는 짧게 한숨을 쉬고 키이엘로를 보았다. 키이엘로는 별다른 반응 없이 말했다.
“평범한 반응이었어. 필요한 게 있는지 묻길래 작은 배나 하나 내달라고 했지.”
“포부가 왜 이리 작아? 이왕 받아 내는 거 큰 배를 내놓으라고 해야지.”
“로트, 넌 언제부터 그렇게 깡패였니?”
도멤의 어깃장에 ‘글쎄, 한 일곱 살 때부터? 난 천재였지.’라고 받아친 로트렐리가 말을 덧붙였다.
“뭐, 그래, 작은 배도 문제는 없지. 대신 우리가 준비했던 음식들이 대부분 젖어서 쓸모없어진 건 알지?”
그에 우투그루 역시 동의했다. 그때의 긴박한 탈출로 인해 ‘짠물 먹은 비스킷’ 운운한 것뿐만 아니라 그 외에 쟁여뒀던 식량도 모두 바닷물에 젖어서 버려야 했다. 그나마 유일하게 입에 넣을 만했던 것이 육포였으나, 그것마저도 일전에 둘하스를 상대했던 섬에서 대부분을 먹어치운 상태였다.
도멤이 우투그루의 손에 멀쩡하게 들린 빵을 가리켰다.
“그동안 이 집 가족의 바구니에 넣어뒀던 빵을 도로 싸갈까?”
“줬다 뺏는 거 참 정 없다.”
로트렐리의 말에 도멤이 말을 잃고 입을 뻐끔거리자, 키이엘로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사이 우투그루가 말했다.
“정 없고 자시고, 딱히 좋은 생각이 아냐.”
“이럴 수가, 우투그루 경, 아직도 이들이 빵에 무언가를 넣었을 거라고 의심하십니까?”
로트렐리가 부러 과장된 어투로 물었다. 우투그루는 잠시 인상을 구겼다가 이내 표정을 풀며 한숨을 쉬더니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우리야 구워져 나온 빵만 보았으니 반죽하면서 뭐가 더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로트렐리 경?”
“오.”
로트렐리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며 우투그루를 보았다가 금방 그런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찬가지로 우투그루를 생소한 것 보듯 일별한 키이엘로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 점은 너무 걱정하지 마. 아마 마을 쪽에서 준비해줄 생각인 것 같으니까.”
“그래? 하긴, 이 빵은 너희가 전부 꺼림칙해하니까. 가져가 봐야 맛있게 먹기는 글렀지.”
도멤이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로트렐리는 제 수중에 조금 남은 빵 쪼가리를 마저 잘게 찢어 냇가에 던져 물고기 밥으로 준 뒤 말했다.
“우리가 떠난다는 소식이 마을에 금방 퍼질지 어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동안 지냈던 집에는 알려주자. 그게 마땅한 도리 같고.”
“맞아, 그간 우리한테 방도 내주고 고생이 많았지.”
도멤이 그녀에게 맞장구치자 우투그루도 별말 없이 선선히 동의했다. 키이엘로는 그런 우투그루를 힐끔 보았다가 눈을 굴리고는 말했다.
“어쨌든 말했던 일정보다 좀 더 이르게 떠날 테니까 내일은 짐을 싸자. 부둣가로 가서 배도 좀 봐둬야겠지.”
오랜만에 일이 술술 풀렸다. 일행 사이에서 별다른 의견 충돌도 생기지 않자 도멤은 괜히 들떠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투그루는 마음에 걸리는 지점이 아직 있는 모양이었지만 굳이 꺼내진 않았다. 그는 슬슬 자신이 정말로 과민하게 의심하고 있던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우투그루는 푸른 새를 어깨에 앉힌 채 무어라 떠드는 로트렐리와 연신 싱글벙글한 얼굴인 도멤을 보았다. 입술을 깨문 그는 미간을 좁힌 채 푸른 들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자신의 의심이 틀렸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곧 떠날 생각으로 화목한 분위기를 망치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런 우투그루를 바라보고 있던 키이엘로는 제 친구들과 우투그루를 번갈아 보다가 홀로 어깨를 으쓱였다.
* * *
푸른 들판이 어스름한 저녁놀에 뒤덮이는 때였다. 우투그루는 저녁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작은 집에서 나와 울타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정말로 자신이 잘못 생각했나? 하지만 그게 문제는 아니었다. 그가 사람을 의심하는 것은 원치 않는 피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였지 항상 자신이 옳다는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요전에 도멤과의 대화는 거의 후자처럼 보였음을 그는 부정할 수 없었다.
우투그루는 인상을 찌푸린 채 지평선의 땅거미를 응시하다가 끙 소리를 냈다. 차라리 다른 배를 타고 사과나무 섬으로 돌아가 검은바다로 귀환하는 것이 나았을까? 그는 브레딕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검은바다를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우투그루는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돌연 푸드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우투그루의 어깨가 묵직해졌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든 그는 자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발카였다. 우투그루는 좀 황망해진 기분으로 파란 바다새를 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뭐야?”
그에 발카가 부리를 잘게 딱딱 부딪쳤다. 이 새가 말이 통하는 동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우투그루는 발카를 평범한 동물 대하듯 할 수가 없었다. 이건 지금 뭐라고 말을 하는 중인 건가, 아닌 건가……. 내 말을 알아듣고는 있는 건가?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렇다고 네가 신경 써주리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로트렐리였다. 우투그루는 뒤를 돌아보았다. 로트렐리는 얇은 셔츠를 걸치고 문가에 기대 서 있었다. 그녀의 새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파란 눈동자가 우투그루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우투그루의 어깨에 앉은 발카가 꾸륵, 하고 목울음을 냈다. 그는 반사적으로 흠칫 몸을 떨며 제 어깨에 앉은 바다새를 도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로트렐리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며 가까이 걸어왔다. 첨예하고 서늘한 인상이 올라간 입꼬리와 접히는 푸른 눈매에 순식간에 흩어졌다.
“너 꼴이 웃기다.”
“……이 새가 뭐라고 한 거야?”
“음…….”
로트렐리는 발카를 바라보았다. 바다새는 그녀가 가까워지자 미련 없다는 듯 우투그루의 어깨를 박차고 로트에게로 날아가 앉았다. 잠시 말을 고르던 로트렐리가 말했다.
“네가 우중충해 보였대.”
“…….”
우투그루는 로트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렸다. 아무렴 바다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날개 아래를 부리로 긁고 있었으므로, 우투그루는 더 생각하는 것을 관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