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06)
바다새와 늑대 (205)화(206/347)
#49화
로트렐리가 그가 앉은 울타리의 옆에 마찬가지로 걸터앉으며 물었다.
“뭐 문제 있어? 오늘 낮에 네가 좀 하고 싶은 말을 참는 것 같긴 했지.”
우투그루는 순간, 마치 거대한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당황스러워졌다. 그녀가 그런 것을 눈치채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딱히 그런 건 아냐.”
“왜, 뭔데? 지금은 분위기가 시궁창 될 여지도 없어, 그냥 말해.”
우투그루는 그녀의 재촉에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막상 정말로 ‘이 마을이 아직도 의심스러워’하고 말하려니 어쩐지 마음에 거리꼈다. 그는 어둑해지는 들판을 응시하다가 희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할 말은 항상 비슷하지. 마을 대표가 우리를 순순히 보내 주겠다는 듯 행동했어도 못 믿겠어.”
“흠.”
“그걸 굳이 말할 필요가 없어서 그랬을 뿐이야. 우중충하다든가 그런 게 아니라.”
“왜, 나라도 내 의견을 아무도 안 들어주는 것 같으면 좀 꼬울 것 같은데.”
로트렐리가 가볍게 내뱉는 말에 우투그루는 얼이 빠져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에 로트렐리는 입꼬리만 비죽 올리며 웃더니 말했다.
“됐어, 도멤이야 원래 좀 순진한 녀석이고. 나는 너만큼은 아니어도 나름 조심하려고 하고, 너는 인정하기 싫겠지만 키이엘로는 꽤……. 조심성이 많거든.”
우투그루는 그녀의 말대로 마지막 부분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조심성이 많다고? 그 자식이? 퍽이나.
물론 키이엘로의 임기응변은 도움이 되기는 했으나 딱 그 정도였다. 우투그루는 키이엘로가 딱히 타인의 기색을 살피거나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고 여겼다. 어느 정도는 악감으로 말미암은 평가이긴 했지만 우투그루는 그것을 차치해도 키이엘로에게 후한 평을 내려 주기 어려웠다.
그런 우투그루의 생각을 알아챈 로트렐리는 키득대며 웃었으나 그뿐, 별달리 탓하진 않았다.
“어쨌든, 마음을 좀 편하게 가져. 너 그러다 늙기 전에 머리가 다 희게 새버릴걸.”
“시끄러워.”
“사람은 의심하는 것보다 믿어보는 게 더 좋잖아…….”
로트렐리의 말에 우투그루는 입을 꾹 다물었다. 우투그루는 좀 전보다는 기분이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로트렐리는 발카를 조금은 뚱한 얼굴로 보면서 새의 부리 아래를 긁고 있었다. 우투그루가 물었다.
“넌 왜 나온 거야?”
“그냥, 발카랑 대화나 할까 해서. 근데 네가 먼저 나와 있었잖아. 발카랑 이야기할 때 누가 곁에 있으면 혼자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아서 영…….”
로트렐리는 그렇게 말하며 발카와 눈을 마주쳤다. 그렇지? 그렇게 되묻는 것에 바다새가 답을 했는지는 우투그루는 알 수 없었다. 우투그루는 핏빛 골목에서 떠난 늑대와 키이엘로를 떠올렸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키이엘로는 그 늑대를 꼭 곁에 끼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동물이랑 대화한다는 건 어떤 기분이야?”
로트렐리가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새파란 눈과 마주하자 우투그루는 자신이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가 말을 철회하기 전에, 로트렐리는 눈을 굴리며 골몰하다가 대꾸했다.
“딱히 다른 건 없는 것 같은데. 그냥, 다른 사람들은 발카의 목소리를 못 들으니까 나 혼자 일인극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말이야.”
야, 그리고 내가 모든 동물하고 말이 통하는 건 아냐. 로트렐리의 볼멘소리를 뒤로하고 우투그루는 발카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럼 말이 통하는 동물이라면 사람을 대신할 수 있겠네?”
“…….”
그 말에 로트렐리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녀의 까만 머리카락과 우투그루의 금발이 바람결에 휘날렸다. 바람이 지나간 뒤, 로트렐리가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우투그루는 마치 꾸짖음이라도 들은 양 움찔 로트렐리를 돌아보았다.
“너한테 브레딕이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전부 브레딕이 대신해주는 건 아니니까. 간단히 생각해도, 도멤이 있다고 키이엘로가 필요 없거나 키이엘로가 있다고 도멤이 필요 없거나……. 그렇게 생각하진 않잖아.”
“…….”
“내게 발카는 물론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발카가 모두를 대신할 수는 없어.”
그 말을 들은 우투그루가 로트렐리를 보는 것과 동시에, 발카 역시 로트렐리를 바라보았다. 시선에 담긴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그녀가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봐? 누가 너 보고 동물보다 못하대?”
“뭐? 대체 누가 그러겠어?”
“그럼 그런 걸 왜 물어보냐?”
우투그루는 평소의 뚱하고 시큰둥한 얼굴로 돌아와서 미간을 좁혔다. 그냥 물어보는 것도 안 되냐? 우투그루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로트렐리는 미심쩍다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너 어디서 맞고 다니거나 그런 거라면…….”
“넌 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말도 많고 의심도 많은데 은근히 자주 다치고 허약한 데다 냉소적이고 예민한 애.”
뭐……. 이런 미친……. 줄줄 막힘없이 나온 답변에 우투그루는 넋을 뺀 얼굴을 했다. 로트렐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왜, 염세적이라고도 해줄까?
그 말에 우투그루는 버럭 외쳤다. 누가 염세적이야?!
“바로 너.”
“하……. 됐어, 꺼져. 헛소리할 거면 들어가서 잠이나 자.”
“왜 너는 안 들어가고? 아, 아직도 뭔가 생각하며 공상에 빠질 시간이 필요하니? 사춘기 소년?”
우투그루는 붕대를 감고 있는 자신의 어깨만 아니라면 로트렐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그는 으르렁거리며 로트렐리를 노려보았다가 이내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울타리를 넘어가자 한숨을 쉬었다.
그때, 집으로 들어가려는 그녀의 어깨에서 별안간 발카가 날아와 도로 우투그루의 어깨에 앉았다. 우투그루는 당황한 얼굴로 발카와 로트렐리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로트렐리 역시 의외였는지 놀란 눈으로 발카를 보고 있었다.
바다새를 잠시간 보던 로트렐리는 눈썹을 휘어 올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난 먼저 들어갈게.”
뭐, 얘는 두고? 우투그루는 황망하게 발카와 로트렐리를 번갈아 보았으나 로트렐리는 이미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린 후였다. 우투그루는 떨떠름한 기색으로 발카를 보았다. 그러나 바다새는 그에게는 관심도 주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이게 난데없이 웬……. 그는 머뭇머뭇 발카를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동물도 사색이 필요한가?
우투그루는 발카가 앉은 어깨가 조금 묵직하게 느껴지는 것을 달갑지 않게 느끼며 들판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휘말려 눕는 풀잎 사이로 풀벌레 소리가 났다. 습한 저녁의 냄새엔 소금기가 없어 낯설었다. 그가 옅게 한숨을 쉬는 순간이었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로트렐리나 도멤인가 싶어 뒤를 돌아본 우투그루는 남매 중 여자애가 긴장한 얼굴로 멈춰 선 것을 보았다. 이웃집에 다녀온다고 하지 않았나? 우투그루는 의아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소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근처로 다가와 손을 뻗어 발카의 꽁지깃을 만지작거렸다.
우투그루는 갈등했다. 이거…… 내 새 아닌데 만지게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근데 불쾌했으면 이 새가 알아서 피하지 않았을까? 거기에 그는 지금 어린애가 뭣 모르고 눈치 보면서 만지는 걸 혼낼 기분도 아니었다.
우투그루가 힐끔 아이를 보는데, 마침 아이도 그를 힐긋거리고 있었다. 그냥 일어날까……. 우투그루가 고민하는 그때였다. 소녀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너라면…… 아마 오늘 밤에 멀리로 날아갈 거야.”
우투그루는 숨을 멈추고 소녀를 돌아보았다. 고요한 사위로 풀벌레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아이는 발카를 두어 번 더 쓰다듬더니 우투그루와 눈이 마주치자 주춤 물러나서 어디론가 달아났다. 우투그루는 자신의 숨소리가 긴장한 사람처럼 거칠어진 것을 깨달았다.
“…….”
습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소녀가 있던 곳을 멀거니 보던 우투그루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를 계속 바라보고 있던 바다새의 자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우투그루는 입을 다물고 급히 걸음을 옮겼다.
남매의 집으로 들어가 곧장 방문을 열자, 바다새는 기다렸다는 듯 제 주인에게로 날아갔다. 그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할 틈도 없이, 우투그루가 말했다.
“짐 싸.”
“뭐?”
각자 쉬고 있던 일행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우투그루는 그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오늘 밤? 오늘 밤이라고? 바깥은 이미 해가 진 후였다. 시간이 없었다.
만약 그 어린애가 자신들에게 경고를 해준 거라면 당장 떠나야 했다. 급하게 짐을 챙겨 가방을 드는 우투그루를 도멤이 붙잡았다.
“우투그루, 진정해 봐. 무슨 일인데?”
“이 집 여자애가 와서 말하더군.”
그 뒤로 이어진 우투그루의 말에 도멤의 얼굴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알아들었으면 서둘러 가방을 싸라고 말하려던 우투그루는 그 표정에 멈칫 섰다. 우투그루가 미간을 좁히며 쏘아붙였다.
“뭐야?”
“어?”
“왜 그런 얼굴이냐고.”
“아니…….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겨우 그 한마디 들었다고 당장 떠나야 한다니, 말이 돼?”
도멤. 로트렐리가 그를 막아섰다. 우투그루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그라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는가? 그도 냉정하게 생각하기 위해 몇 번이고 자신의 가정을 부정하려고 했다. 가까스로 화를 억누르며 그가 말했다.
“그럼 넋 놓고 있다가 사람들이 날붙이 들고 몰려오면 그때 대화로 해결하자고 연설회라도 열게?”
“하지만 저 사람들이 원하는 게 돈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우린 여객선에서 빼돌린 보화가 많잖아. 조금 나누고 평화롭게 지나갈 수 있다면…….”
도멤의 말을 끊고 우투그루가 뚝뚝 자르듯 말했다.
“네 머릿속이 얼마나 꽃밭인지 알겠다. 사람의 욕심을 너무 우습게 보네, 도멤. 저들은 우리가 보화를 내보이면 그것을 모두 뺏고 우리도 묶어다 제국에 넘길 거야.”
“너…….”
“그만, 도멤.”
키이엘로가 무어라 반박하려는 도멤을 가로막았다. 그의 시선이 발카를 향해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바다새를 바라보고 있던 로트렐리가 말소리가 멎은 틈을 타서 입을 열었다.
“식량이랑 배는 어쩌고?”
“아무거나 갖고 가면 돼.”
우투그루의 말에 로트렐리는 짧게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도멤은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다들 당장 떠나는 것에 동의하자 마땅한 이유가 있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키이엘로가 집에서 저장식과 과일을 챙겼다. 로트렐리와 우투그루가 방 안에서 자신들의 짐을 챙기자 도멤은 무기들을 꺼내 왔다.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그들은 검게 물든 들판 너머로 내달렸다. 부둣가로 달려가는 그들 뒤로 그들의 부재를 눈치챈 듯 들불처럼 횃불이 점점이 일어나고 있었다.
로트렐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저 자신들이 없어져서 걱정하며 찾아 나선 이들이기를 바랐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남매의 집을 뒤진 그들이 갈퀴와 쇠스랑 따위를 들고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이자 그녀는 기대를 접었다. 접혀서 생겨난 빈 곳을 분노가 느리게 채워갔다. 그때 앞서 달리던 우투그루가 멈춰서서 몸을 낮췄다.
항구에서 두 명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의 말소리가 작게 울렸다.
“그 사람들이 닷새쯤 뒤에 떠난다더라.”
일행은 숨을 죽이고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일행의 계획은 사흘 후였으나 키이엘로는 그 계획보다 일자를 더 늘려서 전했었다.
이 마을에 일행 외의 이방인은 없었다. 그러니 저들이 말하는 ‘그 사람들’은 로트렐리 일행일 게 뻔했다.
“그 전에 잡아야겠지? 그런데 보면……. 그다지 반응이 오지 않던데.”
“너무 약한 독을 쓴 게 아냐?”
“어쩔 수 없잖아. 강한 독을 무슨 수로 구해? 제국이 내건 조건엔 생포하라는 게 있었다고. 매일 먹으라고 그렇게 날랐는데 슬슬 입질이 와야 하는 거 아냐?”
일행은 머리 위로 얼음물이 부어지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로트렐리는 매일 빵을 주러 오던 여자를 떠올렸다. 무슨 종류인지는 몰라도 그 빵에 무언가를 넣은 게 분명했다. 눈치챌 수 없게 아주 조금씩.
그것을 깨닫자 로트렐리의 어깨에 소름이 돋았다. 만약 자신들이 그것을 아무런 의심 없이 계속 먹었다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