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08)
바다새와 늑대 (207)화(208/347)
#51화
속도를 늦춘 배는 제도를 벗어나 휘청이듯 돌고 돌아 검은 해변에 도달했다. 본래라면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던 배는 알게 모르게 정박하길 꺼린 탓에 해가 뜬 뒤에야 항구에 묶일 수 있었다.
그래도 그새 조각배 항해사에서 소형 배 항해사로 승진했군. 장하다, 로트렐리.
홀로 간단하게 자축한 나는 무기를 챙겨 배에서 내린 뒤 한숨을 쉬었다. 하얀 모래로 반짝여야 할 해변은 새까맣게 탄 재로 채워진 듯 검었다. 그 탓에 섬 인근의 푸른 바닷물마저 먹물을 푼 것처럼 까맣게 보였다.
『음, 역시 사람은 없는 것 같아.』
발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없는 무인도라는 사실이 달갑게 느껴지는 것이 낯설었다. 나는 우투그루까지 배에서 내린 것을 보고 해변을 성큼성큼 걸어갔다.
배에는 잠자리로 쓸 해먹과 마장석, 약간의 물과 저장식이 있었지만 불을 쓸만한 곳은 없었다. 그 탓에 우리는 그나마 있는 작은 화로에 냄비를 올려 물을 끓여야 했다. 오랫동안 항해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배가 아니라서 그렇겠지만 아쉽기는 했다. 차라리 항해용 배였다면 정박하는 일 없이 망망대해를 돌아다닐 수도 있었을 텐데.
검은 해변은 두 개의 섬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중 한 곳에 높은 봉우리가 솟아 있었다. 화산이 많은 곳이군, 하고 뜻 없이 생각하던 나는 수풀 사이로 널따란 뜰을 발견하고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제각기 검은 모래밭을 보거나 주변을 살피는 중이었다.
“여기 적당한 곳이 있어.”
“어디? 와, 넓다.”
내 말에 얼른 다가온 도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배에서 가지고 온 짐을 내려놓았다. 키이엘로와 우투그루도 다가와 주변을 정리하고 불을 피울 준비를 했다.
어째 노숙하는 게 익숙해지는 것 같군. 나는 한숨을 쉬며 거슬리는 덩굴과 잎을 검으로 잘라내며 우거진 숲을 응시했다. 짐승의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 게 영 꺼림칙했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내내 육포와 딱딱한 비스킷만 씹는 것에 지친 우리는 마른 빵과 배에 있던 저장식을 한 곳에 넣고 끓여 대충 수프 비슷한 것을 만들어냈다. 제대로 된 식사라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였지만 어쨌든 짜디짠 육포와 레몬잼만 퍼먹는 것보다는 나았다.
따뜻한 국물이 들어가자 그나마 살 것 같았다. 우리가 끼니를 때우는 동안, 내 옆에서 두리번거리던 발카가 말했다.
『지나치게 조용하네. 수상할 정도야.』
“…….”
『원래는 동물은 많은 섬이었는데…….』
나는 다 먹은 그릇을 두고 다른 녀석들이 전부 먹을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발카의 말을 들은 키이엘로도 불길한 것을 감지한 듯, 체할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가련한 놈. 나는 그를 안쓰럽게 보아주고 물을 마시는 척 주변을 다시금 살폈다. 후텁지근한 기후 사이로도 감람색의 깊은 수풀은 어쩐지 스산한 느낌이 났다.
도멤이 냄비와 그릇들을 정리하다 위를 보고는 밝게 말했다.
“앗, 저기 개암이 있어.”
“아직은 안 익어서 못 먹어. 몇 달 뒤에 올 걸 그랬네.”
키이엘로의 말에 도멤은 금방 시무룩해졌다. 조용히 입에 음식을 밀어 넣던 우투그루까지 식사를 모두 마치자 나는 입을 열었다.
“좋은 소식과 불안한 소식이 있어.”
“……갑자기?”
좋은 소식이 있다고 했음에도 셋의 얼굴은 구겨지고 있었다. 나는 어깨만 들썩이고는 말했다.
“뭐부터 들을래?”
“불안한 것부터.”
우투그루가 곧장 말하자 도멤이 기겁하며 외쳤다.
“아냐, 난 좋은 것부터 들을래.”
“다수결로 하자, 나도 좋은 것부터.”
키이엘로야 어차피 내가 하려는 ‘불안한 소식’이 뭔지 대충 알 것 같으니 도멤의 편을 드는 것 같았다. 나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좋은 소식은, 우리가 안전하게 식사를 마쳤다는 거야.”
“……?”
도멤의 얼굴이 멍하게 바뀌었다. 나는 이어 말했다.
“그리고 불안한 소식은, 운이 안 좋다면 우리가 식사를 안전하게 마친 게 운이 좋은 일일 수도 있다는 거지.”
“그게 뭔 헛소리야?”
우투그루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 기껏 사람이 없는 곳이라고 이끌어 데려왔는데 이런 말을 꺼내자니 좀 민망했다.
“이 섬 너무 조용하지 않아?”
“……그래, 운치 있지.”
하얗게 질린 도멤이 체념한 것 같은 어투로 말했다. 키이엘로가 덧붙였다.
“새소리도 없고 벌레 소리도 없을 만큼 고요하지만, 뭐, 그래. 운치 있지.”
“놀리지 마, 키이엘로! 난 진짜 울고 싶다고! 대체 우린 왜 이런 섬만 골라서 오는 거지?”
절망하는 도멤에게 우투그루가 침착하게 을렀다.
“아직 아무것도 발견하지 않았잖아. 조용하다는 것뿐이야, 좀 침착해.”
“우투그루……. 위로해주는 거니?”
도멤이 감격한 얼굴을 하자 우투그루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나는 도멤이 우투그루를 부러 우스꽝스럽게 대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말을 받아 돌렸다.
“뭐, 우투그루 말대로 아직 아무것도 발견하진 않았지. 하지만 경계는 하는 편이 좋아.”
“맞아.”
키이엘로가 가볍게 내게 동의했다. 우투그루도 소리 내 대꾸하진 않았지만, 몇 번의 경험을 근거로 그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으면 대체로 동의한다는 뜻임을 아는 나는 도멤을 바라보았다.
도멤은 숟가락으로 빈 접시만 긁으며 입을 비죽였다.
“우린 바다 괴물을 피할 수 없는 처지인가 봐. 이런 생활은 심장에 안 좋다구.”
“바다 괴물일지 아닐지는 모르잖아. 희망을 가져, 그냥 터가 안 좋아서 벌레 새끼 하나조차 살지 않는 땅일 수도 있지.”
“그래, 어쩌면 무인도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흉흉한 터인지도 몰라.”
“저기, 전혀 위로가 안 되거든…….”
나와 키이엘로의 말에 도멤은 한숨을 쉬고는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마음을 가볍게 먹고 자리를 정리했다. 그래, 괴물이 있으면 뭐 어때. 사람에 쫓기는 것보다야 괴물에게 쫓기는 편이 더 마음이 편하다.
괴물은 죽여도 별 죄책감이 안 드니까.
짐을 모두 정리한 우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왕 섬에 정박했으니 이곳에서 챙길 수 있는 것은 챙기고 가고 싶었다. 특히 식수 같은 것은 많을수록 좋았다. 우투그루가 말했다.
“섬을 살펴보긴 해야 할 텐데.”
“별수 있나. 말만 하지 말고 가자.”
나는 대번에 일어나 검을 챙겼다. 그에 도멤은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지만, 순순히 창을 등에 메며 일어났다. 우투그루는 어쩐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으나 딱히 거절할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인지 다른 말을 꺼내진 않았다.
개울이 있나 숲속을 거닐던 우리는 작은 물소리를 듣고 걸음을 옮겼다. 잡담을 하며 걷자 고요한 섬이 주는 미묘한 긴장감도 점차 흐려졌다. 물줄기가 조금 굵어진 것을 본 우투그루가 말했다.
“이쯤에서 물을 좀 담아가는 게 낫지 않아?”
그 말에 도멤이 고개를 가로질렀다.
“수원에 이상한 게 있을 수도 있잖아.”
“동물도 안 사는 마당에 무슨.”
우투그루가 가볍게 툴툴거렸다. 나는 그를 조금 생경하게 보다가 걸음을 마저 옮기며 말했다.
“뭐든 확실한 게 좋잖아.”
내 말에 우투그루는 그제야 자신이 다소 안일한 발언을 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우투그루는 미간을 좁히며 옅게 한숨을 쉬었다. 약간의 자괴감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부상이 나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피곤한가? 나는 힐끔 그를 봤다가 이내 구태여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개울을 따라 걸었다.
마을에서 예정보다도 빨리 떠나온 탓인지 우투그루는 항해하는 도중에야 붕대를 풀고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부상 중에는 피로 회복도 더뎌지니 아마 우리 중 우투그루가 가장 지쳐있을 것이 분명했다.
다 같이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인원을 나눠서 올 걸 그랬나? 이미 개울을 따라 한참을 걸은 뒤에 떠올리기엔 늦은 감이 있는 생각이었다. 나는 결국 이렇다 할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묵묵히 수원을 찾아 완만한 경사가 진 숲을 걸었다.
깊숙한 숲의 안으로 가자 꽤 깊은 계곡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샘물이 보였다. 우리는 곧장 주변부터 살폈다. 별다른 특이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키이엘로가 입을 열었다.
“왠지 시큼한 냄새 나지 않아?”
“어디 동물 사체라도 있나?”
“시체 냄새가 아냐.”
도멤의 의아한 되물음에 키이엘로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에 나도 주변의 냄새를 맡아보았으나 시큼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내가 물었다.
“어떤 냄새인데? 썩는 냄새? 아님 뭐……. 이 물이 탄산수인가?”
“농담이지?”
우투그루가 날 힐난했다. 나는 어깨만 으쓱였다. 뭐 어쩌라고, 그럴 수도 있잖아. 그러나 키이엘로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좀 황당한데, 식초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식초?”
근처에 식초가 있을 만한 이유가 있나? 나와 우투그루가 아리송한 얼굴을 하는 그때, 도멤이 어, 하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저거 혹시 지붕인가?”
“…….”
난 잘 안 보이니까 네가 봐봐, 로트.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들어 그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갈맷빛의 나무가 높게 솟은 사이로 뾰족한 지붕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거리가 멀어서 거의 바늘의 끝처럼 보였지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성당에나 자주 짓는 뾰족한 첨탑 형태의 지붕이었다.
“……사람이 사나?”
“이런 곳에서 혼자? 동물도 없는데. 하긴, 벌레도 없으니 먹고 사는 것만 아니면 쾌적하긴 하겠네.”
우투그루가 비아냥거리듯 중얼댔다. 그사이 키이엘로는 샘물을 조금 마시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물 자체에는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일단 물을 담고……. 저 건물은 어쩌지?”
“선택의 시간이네.”
수통에 물을 가득 채우며 우리는 골머리를 앓았다. 누가 봐도 수상한 섬의 수상한 건물이었다. 하지만 만약 사람이 터를 잡으려고 노력했던 곳이거나 혹은 홀로 외진 섬에 은둔한 사람이 있는 경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해변에 닻을 내려둔 배를 생각했다. 앞으로 얼마나 그 배를 쓰게 될지 모르는 판에 자재의 여분이 있으면 좋을 텐데.
키이엘로가 말했다.
“가서 살펴보고만 오자.”
“어째 불안한데.”
“바다 괴물이든 육지 괴물이든, 뭐 어때?”
늘 그렇듯 죽이면 되지. 산뜻하게 웃는 키이엘로의 모습에 왠지 모를 설득력이 넘쳤다. 굉장히 쉽게 말하는구나. 도멤이 한숨을 쉬었지만 키이엘로의 얼굴을 보고는 기운을 차린 듯 호기롭게 말했다.
“그래, 우린 둘하스도 죽였어.”
그건 또 너무 지나친 자신감인 것 같아. 키이엘로의 단호한 말에 도멤은 금방 다시 시무룩해졌다. 발카가 내게 말했다.
『내가 가서 보고 올까?』
“됐어, 위험할지도 모르잖아.”
날아다니는 새조차 없는 섬이었다. 발카가 암만 똑똑하고 하늘을 나는 새라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나무 사이로 보이는 지붕의 거리를 눈대중으로 쟀다.
생각보다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말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아.”
“그래, 뭐……. 정말 아무 일도 없으면 좋은 일인 거니까.”
도멤이 동의했다. 결국 우리는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조금 더 깊숙한 숲으로 나아가자 키이엘로가 말한 대로 식초 냄새가 어렴풋이 나기 시작했다.
멀리 보이는 집은 집이나 오두막보다는 저택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꽤 큰 규모의 석재건물을 보고 우투그루가 혀를 내둘렀다.
“누가 있든 없든 저런 저택을 숲 한가운데에 지어두다니, 단단히 정신 나간 짓이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