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1)
바다새와 늑대 (20)화(21/347)
#20화
갑작스러운 재해를 피하지 못한 세상의 문명 대부분은 그 순간 바다에 수장되어버리고, 다른 친우들은 급하게 수장되어가는 땅을 건져 올렸다. 그것이 지금의 섬들과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바다의 주인을 찔렀던 친우는 원하던 대로 주인 자리를 차지했으나, 마녀로 불리게 되었다. 마녀는 바다의 주인과 같은 사랑을 받지 못하자, 땅을 덮은 바다를 수습할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이전의 바다가 끝나며 함께 가라앉은 문명과 땅을 다시 되살리기 위해서는 마녀를 죽여 바다의 주인이 가진 원한을 풀어야 했다.
그렇기에 모든 바다의 존재는 마녀를 무찌를 영웅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영웅이 나타나는 때, 모든 바다의 존재들은 영웅에게 복종하게 될 것이라고. 뱃사람의 마음을 자극하는 결말이었다.
거기까지 듣자 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와는 별개로 루루미를 떠올렸다. 뭐가 재미있는 사실이라는 거지. 자기가 바다의 주인을 찔렀다는 게 자랑스러운 건가? 키이엘로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이렇게 재미있게 하는 것도 재주라며 도멤에게 가볍게 웃고 있었다.
그와 히히덕거리던 도멤은 날 보고 말했다.
“재미있지? 나 어렸을 때 이거 듣고 바다의 마녀를 엄청 겁냈다니까. 뭐, 아직까지 바다의 마녀를 본 사람은 드물지만. 사실 없는 거 아니냐는 소리도 있어. 뜬소문만 들리는 존재라.”
“맞아. 우리 배에서 가장 오래 뱃일을 했던 선장님과 디겔 아저씨도 바다의 마녀는 본 적도, 봤다는 사람도 없었대. 그냥 옛날 마장석이 없던 때에는 뱃일이 고되니까 환상을 키우려고 이런 이야기가 생긴 거 아니냐는 말도 있더라.”
키이엘로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아니, 본 사람 여기 있는데. 물론 나는 굳이 말하진 않았다. 바닷물에 닿은 상처가 나은 것도 루루미가 한 짓이겠지. ……날 산하 해적과 같은 패거리로 의심하면서 굳이?
그때 도멤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워낙 옛날 전설이라 여러 가지 각색도 많아. 마녀가 바다의 주인을 사랑했는데 바다의 주인은 다른 인간을 사랑해서 죽였다는 거나, 바다의 주인이 삶이 지루해져서 자신을 죽여 달라고 했다거나, 사실 날뛰었던 건 바다의 주인이고 그런 그를 무찌른 게 바다의 마녀라거나.”
“재미있네.”
“그렇지?”
도멤은 궁금한 건 풀렸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이 외에 알고 있는 바다의 마녀 이야기는 없다고 말하는 도멤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랄티아라면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루루미가 말했던 재미있는 사실을 알아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삭아 들었다.
키이엘로가 짧게 하품을 했다. 할 일도 없는데 오늘 밤쯤에는 출항하겠지? 그렇겠지! 빨리 해먹에 눕고 싶다. 숲의 바다로 가는 건 무섭지만.
도멤의 대꾸를 들으며 나는 주머니 안의 진주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사실 진주를 쓰게 될 일이 금방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무슨 의미냐 하면, 할 일도 없어 뱃노래나 부르는 선원들의 목소릴 들으며 백사장에 누워있던 대낮에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배 안에서 칼날이 일어나는 것 같은 아픔이었다.
나는 참아 보려고 식은땀을 흘리다가 오히려 이러고 있다가 발카에게 들킬까 겁이 나 진주를 하나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진주를 삼키자 달달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진주 같은 외관만 아니라면 사탕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빠르게 진주를 사용하게 되자 조금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루루미가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닌지, 아픔은 금방 사라졌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 몸을 일으켰다. 텐과 도란도란 대화하던 키이엘로가 나를 보고 물었다.
“어디 가게?”
“땀을 흘려서. 조금 씻고 올게.”
키이엘로는 누워있던 내가 땀을 흘렸다고 하니 어리둥절한 것 같았지만 별달리 캐묻진 않았다. 나는 발카와 함께 백사장을 가로질렀다. 선원들이 어디서 또 갖고 온 건지 술을 마시며 뱃노래를 불러댔다. 그 중 디겔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동부 해안에서 백 년 동안
서부 해안에서 백 년 동안
오, 그래 오, 백 년 전에
나는 불량배 존을 알지
바다에선 멋지지만 육지에선 불량배야
충고 따윈 듣지 않는 존
나는 항해사가 우는 것을 들었지
늙은 항해사가 우는 것을 들었지
경쾌한 운율과 달리 어쩐지 슬프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숨을 쉬며 바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파도에 손을 넣어 물을 묻히고 땀을 닦아내는데, 발카가 어깨에서 날개를 파닥였다.
『누가 오는데.』
응? 내가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이었다. 누가 내 멱살을 다짜고짜 잡아챘다. 놀란 발카가 꽥 소리를 지르고, 나도 놀라서 눈을 크게 뜨며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빡, 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의 보라색 머리채가 홱 돌아갔다. 내 멱살을 놓친 손까지 철썩 치고 나는 이를 갈았다.
“뭐 하는 짓이야!”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보라색 머리가 맞은 얼굴을 문지르며 야차처럼 인상을 구겼다. 그러더니 다시금 내 멱살을 잡았다.
“너 이 새끼, 병이라도 있냐?”
“뭐?”
생뚱맞은 소리에 얼굴을 해괴하게 일그러뜨리자, 보라색 대가리는 내 멱살을 잡은 손을 흔들었다. 이런 썅! 그의 팔뚝을 잡아채 팔을 꺾으려는데, 이미 긴장하고 있었던 것인지 보라 대가리가 손을 확 빼냈다.
“아까 다 봤어! 끙끙거리다가 주머니에서 약 같은 걸 꺼내 먹었잖아!”
이 누군지 모를 미친놈이 그건 또 언제 봤지? 나는 깜짝 놀라 그를 보았다가 이내 인상을 찌푸리고 이를 드러냈다. 영문을 모르는 발카가 위협적으로 날개를 퍼덕이며 발톱을 세우자 보라 대가리는 발카에게 팔을 휘둘러댔다.
내가 깜짝 놀라 발카를 감쌌다. 이유 없는 악의에 어울려줄 필요 없었다. 나는 이를 갈며 개소리 마, 하고 씹어뱉듯 말했다.
“생사람 잡을 거면 다른 놈 찾아! 난 병 따위 없고, 건강하니까!”
“그럼 아까 처먹은 건 뭔데!”
“―! 이 새끼가 돌았나!”
나는 내 바지 주머니를 뒤지려 드는 미친놈을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보라색 미친놈도 날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재빨리 피했지만, 주먹이 관자놀이를 스치자 둔탁한 통증이 미미하게 올라왔다.
보라색 또라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놈을 이 배에서 내리게 해주겠어!”
“미칠 거면 곱게 미쳐!”
나는 그의 배를 걷어찼다. 그러자 그가 몸을 수그렸다가 내 오금을 걷어차며 목을 잡아 밀었다. 내가 악,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지자 미친놈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눈썹 위쪽을 가격당하자 일순 눈앞이 어찔했다. 발카가 비명을 질렀다.
나는 이를 갈며 발카를 잡았던 팔을 풀었다. 사이에 껴봤자 발카가 다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고, 이 미친놈과 제대로 싸우려면 두 팔이 자유로운 편이 나았기 때문이었다.
발카가 날아가며 발톱으로 또라이를 긁으려 들자, 미친놈이 발카를 퍽 밀쳤다.
그 틈에 내가 두 팔을 교차해 보라 머리통의 목젖을 밀 듯 후려치고 팔꿈치로 목덜미를 찍어버리자 그는 악 비명을 질렀다. 씩씩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이게 웬 난데없는 날벼락인가 생각하는데, 소란을 들었는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야? 꿍얼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이내 거리를 두고 들려온 목소리 중 익숙한 누군가 기겁했다. 로트?! 도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눈앞의 보라색 머리통이 내 얼굴을 친 것이다.
빡, 하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일순 번쩍였다. 도멤이 비명을 질렀다. 로트!
나는 분노로 눈앞이 시퍼렇게 얼어붙는 걸 느꼈다. 입가가 찢어졌는지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나는 번개처럼 그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꺾고 얼굴을 몇 번이고 주먹으로 갈겼다.
보라 머리통이 손을 허우적거리며 날 치려 했으나 내 무릎이 그의 명치를 갈기는 것이 더 빨랐다. 으악, 로트! 도멤이 기겁하는 소리와 함께 싸움을 말리려는 손길이 이곳저곳에서 뻗어져 나왔다.
내 주먹질에 코피가 터진 보라색 머리통이 이를 갈며 다시 내 멱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얼른 몸을 뒤로 물렸으나 그의 손이 내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를 잡아챘다.
아차 하는 순간 목이 일순 콱 조이더니 이내 목걸이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뚜둑, 하는 소리에 내가 눈을 부릅뜨는 순간 발카가 길게 울며 발톱을 세웠다. 윽, 하고 보라색 머리가 신음했다. 발카에게 긁혀 힘이 풀린 손에서 붉은 자갈이 달린 목걸이가 후두둑 떨어졌다. 로트! 도멤이 얼른 나와 보라색 대가리 사이로 끼어들어 나를 끌어안았다.
내가 이를 갈았다.
“놔, 도멤.”
“으아, 갑자기 왜 이래! 왜 싸워?! 네토르 너, 로트한테 무슨 짓 했어?!”
“도멤, 놓으라고!”
“지, 진정해, 로트!”
내 일갈에도 도멤은 나한테 매달려서 말리기에 급급했다. 나는 분이 안 풀려서 연신 씩씩거리다가 보라 머리를 향해 침을 퉷 뱉었다.
“개자식아, 너 오늘 운 튼 줄 알아.”
도멤이 절규했다. 로트 네가 깡패니?! 나는 그에 야멸차게 짓씹었다. 조용히 해, 도멤. 성질대로였으면 저 새끼 오늘 저녁밥부터는 죽만 처먹었을 테니까.
내 말에 도멤은 눈물을 흘렸다. 어째 내 주변엔 항상 무서운 애들만 있냐……. 나는 숨을 몰아쉬다가 바닥에 떨어진 목걸이를 주워 들었다. 무참하게 끊어진 모습을 보자 다시 화가 치밀어 한 번 더 보라색 또라이를 걷어찼다. 감기 탓에 골골대며 한숨 돌리던 도멤이 다시 내게 매달렸다.
그때 나처럼 선원들에게 붙잡힌 보라 머리가 고함을 쳤다.
“저 새끼 병 있는 게 틀림없어!”
“헛소리는 꿈나라 가서 해, 미친놈아!”
도멤이 내 허리에 달라붙어서 감탄했다. 상황과 별개로 너도 말빨이 끝내주는구나!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입가에 흐른 피를 거칠게 닦아냈다. 보라 머리가 분을 못 이겨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배에 병든 놈을 태우려는 거야? 검은바다가 언제부터 봉사 단체였나! 아무나 태우고 다니질 않나!”
“너 귀먹었냐? 병 없다고!”
“그야 없다고 하겠지! 병 있는 새끼를 누가 배에 태우겠어!”
이거 진짜 말귀를 못 알아듣는 새끼였다. 내가 울컥해서 다시 덤벼들려 하자, 도멤이 으아아악, 하며 다시 허리에 달라붙어 매달렸다.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난장판을 뚫고 들려왔다.
“전염성만 없으면 돼.”
키이엘로였다. 도멤이 휘둥그레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나도 눈을 둥그렇게 뜨고 키이엘로를 돌아보았다. 허수아비이긴 하나 간부진의 등장 때문인지, 소란스럽던 주변이 조용해졌다. 키이엘로는 물끄러미 보라 머리를 보며 말했다.
“타당하지 못한 이유로 난장판을 일으키면 돛에서 손 떼야 하는 건 너야, 네토르.”
“……이 새끼가 약을 먹는 걸 봤어.”
저 새끼가 끝까지……. 으악! 으악악! 로트! 한 번만 봐주자! 한 번만 참아주자! 도멤의 기겁에 애써 화를 가라앉히고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진주 하나를 꺼냈다. 그걸 보고 도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주?
“이걸 보고 오해를 한 거 같은데, 아까 내가 먹은 건 이거야.”
“…진주를 먹었어, 로트?”
나는 티 나지 않게 짧게 고민하다가 입을 헤 벌리고 있는 도멤에게 먹였다. 깜짝 놀라던 도멤이 눈을 끔뻑였다.
“……이거 사탕이야?”
나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키이엘로가 고개를 까딱이며 네토르라고 불린 보라 대가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네토르는 정말로 생사람을 잡게 된 것이 되자 수치스러웠는지 얼굴이 붉어졌다. 키이엘로는 짧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정리된 거 맞지? 싸우지 마.”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