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10)
바다새와 늑대 (209)화(210/347)
#53화
클레인스는 랄티아를 보았다. 좀만 살펴보면 안다니, 그간 하몬과 딱 붙어 지낸 소년은 그에게서 그런 기색을 느끼지 못했다. 하몬은 전투하는 선원들 틈에 자신도 끼겠다고 고집부리는 괴팍한 아저씨였으니 말이다.
“하몬이 위험해지면 어쩌죠?”
“…….”
랄티아는 ‘그건 제 알 바가 아니죠,’하고 말하려는 것을 꾹 참고 잠시 머리를 굴렸다. 안락하던 가족의 품에서 벗어나 랄티아가 느낀 가장 큰 깨달음은 계략을 짤 때보다 배려할 때 더 머리를 많이 써야 한다는 점이었다.
사람이란 너무 성가셨다. 다들 언니처럼 올곧은 외골수거나 부모님처럼 랄티아의 까칠한 말에 그다지 상처 입지 않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랄티아는 짧게 고민하고 말했다.
“하몬에게 무언가 생각이 있겠죠.”
“으음…….”
클레인스는 ‘랄티아가 그렇게 말한다면 믿어볼까’와 ‘하몬이 그렇게 깊게 생각하고 있을까’가 반반씩 섞인 얼굴로 침음을 흘렸다. 그런 클레인스의 뒤로 브레딕은 마장석 기구를 바라보았다. 하몬은 간만에 자리를 비워 함저 구역의 다른 선실에 가 있는 상태였다. 아마 그는 함저 구역에 있는 다른 선원들을 끌어들이러 갔을 것이다.
브레딕은 랄티아가 클레인스에게 굳이 모나지 않은 말을 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속으로 클레인스에게 소소하게 유감을 표했다. 그래도 랄티아가 클레인스에게는 무의식중에 다소 부드러워지는 것을 호재로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브레딕은 저 이성적인 동생님이 그가 잘 알고 있는 누군가를 닮았다고 느꼈다. 우투그루를 떠올리자 그가 어쩌고 있을지 조금 걱정스러워졌으나, 제 코가 석 자인 마당에 그에게만 정신이 팔려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투그루는 그의 의도와 달리 다시 검은바다를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브레딕은 그가 알아서 한적한 곳에 터를 잡고 살았으면 하고 바랐으나 동시에 우투그루가 그렇게 산뜻한 성격이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로트 일행과 함께 다니고 있겠지. 브레딕의 생각에 그는 뜻밖에 로트렐리와 가장 잘 어울리고 있을 것이다. 도멤은 착하긴 하지만 그가 공감하기엔 너무 물렁하고 이상적이며, 키이엘로는 생각이 맞고 안 맞고를 떠나 말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로트렐리라면, 우투그루가 판단하기론 보이는 것과 달리 사람을 잘 내치지 않는 성정이랬으니 그를 적당히 챙겨주고 있겠지. 홀로 생각을 잇던 브레딕은 랄티아에게 물었다.
“만약 탈출한다면 어디로 갈 거야?”
“어디든 상관은 없어요. 심지어 제국일지라도 신분증명이 꼭 필요한 본섬이 아니라면 위험할 일은 없죠. 제가 언니도 아니고.”
“아무런 계획도 없는 거야?”
브레딕은 다소 황망해졌다. 그러나 랄티아가 무어라 대꾸하기 전에 네토르가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런 계획이 없는 게 아니라 당장 직면한 과제가 더 큰 거지. 하몬이 우리에게 남은 비자금을 내주겠다고 해도 탈출하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야.”
“그 말이 맞아요. 계획이 없다기보다, 탈출을 완수하면 그 뒤는 선택지가 대폭 늘어나니 굳이 지금 고를 필요가 없다는 말에 가깝죠.”
하몬의 비자금 이야기가 나오자 클레인스는 다시금 고뇌하는 기색이었다. 하몬은 어쩌자고 비자금까지 내준다는 거죠……. 암울하게 웅얼거리는 클레인스를 살갑게 도닥여줄 사람은 이 중 베제뿐이었다.
그마저도 서툴기 짝이 없어 기운 내라는 도닥거림보다는 우중충한 소리 말라며 눈치 주는 손길 같았다. 그것을 보며 한숨을 쉰 랄티아는 하몬이 들어오자 답지 않게 반색하며 말을 걸었다.
“어쩌고 왔어요?”
“내게 사사건건 캐묻지 마라.”
하몬이 매정하게 응수했지만 랄티아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클레인스가 ‘저 아저씨가 또 미운 소릴 한다’며 툴툴거렸다.
“함저 구역의 인원 중 반절은 반대하더군. 그래서 끼지 않을 거라면 조용히 있으라고 했지.”
“그 말은 반절은 찬동했다는 거군요.”
“그래. 비단 나만 위엣것들에게 불만이 있었겠느냐?”
하몬은 즐거운 건지 지친 건지 알지 못할 말투로 지껄이고는 휠체어의 바퀴를 굴려 마장석 기구 앞에 자리를 잡았다. 네토르가 랄티아에게 속닥였다.
“함저 구역의 대부분은 몸이 성치 못한 작자들뿐이야. 그런 사람이 이끄는 반란이 정말 성공할 거라고 보냐?”
랄티아는 이 인간이 왜 언니와 치고받고 싸웠는지 알겠다는 생각을 하며 침착하게 대꾸했다.
“제 알 바는 아니죠.”
“…….”
클레인스에게 해줬던 배려를 해줄 필요가 느껴지지 않아서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네토르는 랄티아를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나름 사려 깊은 게 아닌가 생각했던 이전의 판단을 수정하는 중이라.”
“사람 보는 눈이 없네요.”
“수정하는 중이랬잖아.”
“어쨌든요.”
핑퐁처럼 오고 가는 말을 끊어낸 하몬이 퉁명스럽게 을렀다.
“뭘 그리 숙덕거리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랄티아는 재빨리 얼버무렸지만 동시에 클레인스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할 정도로 귀가 안 좋은 사람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상기했다. 아니나 다를까 하몬의 옆에서 클레인스는 미묘한 얼굴로 그녀의 방향을 보고 있었다.
조금 민망해졌지만 랄티아는 애써 그의 시선을 무시했다. 댁이 하몬과 친하니까 어떻게든 걱정하는 건 알겠는데, 그걸 제가 감당할 이유는 또 없거든요. 속으로 혼잣말을 한 랄티아는 하몬에게 물었다.
“언제 할 거예요?”
“되도록 빨리.”
짧게 응수한 그가 마장석 파이프를 몇 번 만지작거리며 복잡하게 작동했다. 철컥거리며 황동이 맞부딪치는 소음이 멎자 기구의 구석이 서랍처럼 열렸다.
그곳에서 쏟아지듯 나오는 주화를 보자 천하의 랄티아도 순간 말을 잃었다. 클레인스 역시 얼빠진 표정으로 그것을 보다가 기함했다.
“이게 다 뭐예요?”
“내 비자금이지. 이젠 네놈들에게 넘겨줄 거고 말이다.”
“그, 선장, 선장님께…… 옛날 옛적에 다 주셨던 게……?”
브레딕이 더듬거리며 간신히 묻자 하몬은 샐쭉한 얼굴을 하며 휠체어의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대부분을 준 거지. 이건 원래 있던 비자금의 1할 정도다. 혹여 그 자식이 돈을 다 써버릴까 무서워서 최후의 보루로 다시 남겨뒀던 거지.”
“…….”
“왜, 소인배 같은 꼬라지더냐? 원래 보험은 몇 개가 있든 많을수록 좋은 법이야.”
모두가 말을 잇지 못하는 가운데 네토르가 물었다.
“정확히 얼마죠?”
“천만 펠른. 제국 괸
1)
으로 환전하면 삼사백쯤 되겠군.”
“아, 그렇지. 환율이 진짜…….”
양심 다 뒤진 환율…. 브레딕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몇백만 괸이라는 소리를 듣자 겨우 현실감을 되찾은 랄티아가 침착하게 말했다.
“이걸 왜 다 주는 건가요?”
“준대도 뚱기적거리는 머저리가 어디 있겠나 했는데 여기 있었군.”
그렇게 말한 하몬은 무언가 더 말할 것 같은 운을 떼어놓고 입을 도로 다물었다. 그는 대신 다른 화두를 꺼냈다.
“요한 그놈과 접선할 기회는 언제 만들 생각이냐?”
“프라세가 의심받을 수도 있으니 신중해야 해요. 너무 성급해하지 마세요, 가까운 시일 내에 다 완료할 거니까.”
랄티아의 말에 브레딕이 넌지시 물었다.
“이곳을 나가서 로트와 만날 방법은 생각해뒀어?”
“비자금을 준다고 했을 때부터 생각해뒀어요. 정보원을 쓸 거예요.”
침착하게 대꾸하는 랄티아에게 네토르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정보원을 써서 걔를 추적할 수 있었다면 이미 그 그레고리 경이 꼬리를 잡았겠지.”
“맞아요, 그래서 정보원은 사실 크게 기대하지 않아요. 그래서 두 번째 방법이 있죠.”
“뭔데?”
되묻는 말에 랄티아는 일행을 돌아보며 단언했다.
“우리의 이야기를 신문에 실을 거예요.”
“……뭐?”
네토르가 어벙한 얼굴을 하는 것과 동시에 다른 이들도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클레인스가 당황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러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일단 그렇게만 알고 있으세요. 육지에 가면 생각보다 많은 수단이 있을 테니까. 그중엔 저와 언니에 관한 것을 낱낱이 밝히지 않아도 언니가 접하기만 한다면 저를 알아채는 방향으로 정보를 전달할 수는 얼마든지 있겠죠.”
일견 자만하는 것 같기까지 한 말에 베제는 헛웃음을 지었다. 나 원 참, 대체가……. 브레딕과 네토르 역시 할 말은 많아 보였지만 어쨌거나 제 언니를 향한 무시무시한 집착을 보이는 사람이 황당무계한 소리를 하리라 여기진 않았다.
하몬은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보채는 것처럼 말했다.
“그래서 요한은 언제 부를 셈이야?”
“함저 구역에서 오래 숨죽이고 후일을 도모한 사람치고는 다소 조급한 모습이네요.”
랄티아는 회색 눈동자로 하몬을 바라보며 눈썹을 휘어 올렸다. 그에 하몬은 잠시 끙 소리를 내고는 시선을 피했다. 랄티아는 그를 눈길로 지그시 누르듯 일별하고 고개를 돌렸다.
“나갈 땐 마장석도 챙겨 나가라. 소서러가 안 쓰면 달리 누가 쓰겠어.”
“…….”
클레인스에게는 유감이기 때문에 소리 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그는 이번 반란으로 사생결단을 낼 모양이었다. 그러나 어쨌거나 랄티아에게는 잘된 일이다. 저 작자가 목숨을 내걸든 말든, 그 기회에 랄티아는 이곳을 빠져나가면 될 일이지.
프라세가 얼마 뒤 오기로 했으니 그때까지는 기다리자는 말을 나눈 뒤, 일행은 각자 함저 구역에 뿔뿔이 흩어졌다. 하몬은 다시금 함저 구역의 선원들을 입단속 하겠다며 나갔다.
브레딕과 네토르는 각자 본인의 고민에 빠져든 것 같았고, 베제는 못 잔 잠을 마저 자려는 눈치였다. 랄티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더니 편두통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때 랄티아에게 클레인스가 가까이 붙어 앉아 몸을 기울였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무슨 방법이요?”
“물론…… 아무런 대책도 못 내밀면서 이런 무책임한 말을 해서 미안해요. 근데 하몬이 너무 걱정돼요.”
랄티아는 잠시 클레인스를 보았다. 클레인스의 주홍색 머리가 어두운 함저 구역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는 파르스름한 마장석의 빛과 섞여 묘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언니에겐 듣기론 그쪽은 꽤 정의롭고 하몬보다 무모한 지점이 있다고 하던데요.”
“로트…… 누나가 그랬어요?”
“네. 그리고 제가 붙잡혔을 때 당시에도 지금 선장님이 하는 일이 옳지 않은 것 같아서 가담했다고 했죠.”
그 말에 딱히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한 클레인스는 멋쩍은 기색으로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런 소년을 보며 랄티아는 건조한 얼굴로 느리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왜 인제 와서 하몬이 나서는 걸 꺼리는 걸까.”
“…….”
클레인스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은 무엇을 감추기 위해 말문이 막히거나 허를 찔린 기색은 아니었다. 미숙한 소년은 자신의 생각을 설명할 방법을 찾는 것 같았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저는…… 그냥, 하몬 그 아저씨가……. 안전했으면 좋겠어요.”
랄티아는 일순 입을 다물었다. 클레인스는 고개를 수그리곤 민망한 듯 뒷목을 문질렀다.
“저야말로 사사건건 나섰으면서 참 못하는 말이 없죠……. 그래도 더 젊고 팔팔한 제가 다 할 테니까 그 아저씨는 좀 자기 몸 보전에 힘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랄티아는 어쩐지 그 말이 그렇게 생뚱맞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소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어느 정도 결은 다르지만, 랄티아도 로트렐리를 보며 엇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언니가 좀 더 자신을 챙겼으면 하는 생각을 한 적은 랄티아 또한 있었다. 그때 클레인스가 말했다.
“하지만 뭐, 괜찮아요. 어차피 제가 남아서 돌봐주면 될 일이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