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11)
바다새와 늑대 (210)화(211/347)
#54화
요한이 돌아간 뒤, 함저 구역은 이례적으로 매우 분주해졌다. 그러나 위에서 지내는 이들은 이 분주함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랄티아는 클레인스와 하몬이 기구에서 빼주는 마장석을 얌전히 주머니에 담아 허리띠에 묶으며 옅게 숨을 내쉬었다. 과보호 받는 아가씨가 된 기분이었다.
초여름이 무르익은 때였음에도 함저 구역은 마장석 탓에 항상 서늘하고 때로는 쌀쌀할 정도였다. 흰 원피스 하나와 속바지만을 입고 버티기엔 추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랄티아는 춥다고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애초에 겨울부터 우홉피아주의 함저 구역에 있던 랄티아였다. 몸이 약하긴 하지만 잔병치레가 잦은 약골인 건 또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로트렐리와 재회하기 전에 병에 걸려서 기침이나 하다가 죽었겠지. 물론 그 지점을 생각하면 오한이 이는 것이 사실이었으나, 그러니까.
“뭍에 닿으면 여름일 거라니까요.”
“그래도요.”
……옷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은 별로 없었단 말이었다. 랄티아는 어디서 난 것인지 긴 셔츠와 외투 따위를 가지런히 개어주는 클레인스를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뿐만은 아니었다. 함저 구역의 이들은 랄티아를 옷감으로 둘둘 싸매지 못해 안달이었다. 물론 하몬은 코웃음을 쳤지만 네토르와 브레딕은 랄티아에게 매번 모포도 양보했다.
클루스도와 대화하기 위해 노상 갑판으로 올라갔을 때 분명 기후가 온화했으니 이제 날씨가 따뜻할 텐데…….
“마장석은 한기를 뿜어내잖아. 날씨랑 상관없이 몸에는 안 좋을 게 당연하잖아.”
“제가 계절 타는 풀때기도 아니고.”
“만전을 기하는 건 중요하다며?”
여동생의 옷을 가다듬어주는 것처럼 로브를 둘러 매듭을 묶어주며 브레딕이 한숨을 쉬었다. 그에 랄티아는 따지려던 것도 그만뒀다. 진짜 한여름의 쪄 죽을 것 같은 때가 오면 그땐 이 인간 이불로 이걸 덮어주자.
조용히 다짐하는 랄티아를 보며 무언가를 예감했는지 브레딕이 낮게 을렀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뭐가요?”
“뭐든 간에. 너희 자매는 갑자기 조용해지면 사람 골탕 먹일 생각을 하는 것 같거든.”
“의중을 모르겠네요…….”
“내 기우라면 다행이겠네…….”
랄티아는 태연자약하게 시선을 굴렸다. 브레딕은 허허롭게 웃고는 짐가방 중 하나를 그녀에게 둘러주었다. 로트렐리와 비슷한 손길이었다. 미약한 향수를 느끼며 눈을 내리깔고 있던 랄티아가 문득 물었다.
“부선장을 만나면 어쩔 거예요?”
“걔가 바라는 곳으로 떠날 거야.”
“떠나요?”
“그래.”
우투그루와 어디서든 농사나 지으며 살겠다고 했던가. 랄티아는 흐음,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일순 무언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꿈은 불가능할 것이다.
심술 궂은 생각처럼 떠오른 예감이었다. 사실 예감이라기보다 추리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뭐지? 랄티아는 잠시 뚱한 얼굴로 허공을 노려보다가 브레딕이 의아하게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자 충동적으로 말했다.
“떠나고 싶은 거면 지금처럼 절 챙기는 건 관두는 게 좋을 텐데.”
그 말에 브레딕은 눈을 깜짝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 앞가림은 알아서 잘하니까 걱정 마.”
“아니…….”
걱정과 애정이 섞인 퉁명스러운 말 따위가 아니라고. 황당해진 랄티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썩은 시금치처럼 찌그러졌다. 브레딕은 가볍게 웃더니 자신의 짐을 마저 챙기러 돌아섰다.
랄티아는 찜찜한 생각을 떨쳐 내고 피스톨을 들고 살폈다. 엉성하게 붙여 조급하게 만들었던 피스톨은 하몬의 도움으로 좀 더 이음새가 정교해져 있었다.
화약을 사용하는 실제 피스톨도 아니었고 총의 설계도는 제국이 독점하고 있어 만들 수도 없었다.
‘나중에 육지에 가거든 야메로 만든 총이라도 구해보는 게 좋을 거다.’
‘전 마장석만 있으면 돼요.’
‘떼잉, 조언을 해줘도!’
그런 대화를 했었지. 하몬은 총을 구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으나 랄티아는 아무렴 상관없고 이왕 줄 거면 마장석이나 가득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서러가 마장석을 사용하려면 마장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게 할지 구체적으로 구상할 수 있는 틀이 필요했다. 요컨대 단순히 마장석만 쥔 채로 마장을 활용하려고 하면 모래를 움켜쥔 감각뿐이라 구체적인 구상이 불가능하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지금 랄티아가 손에 쥔 피스톨처럼 구체적인 구상이 가능한 물건이 있다면 모래를 녹여 유리를 만들 듯 일반적인 마장석 기구보다도 더 마장을 뽑아낼 수 있었다. 랄티아는 피스톨을 바라보며 찜찜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양심이 아픈 건지 뭔지.
자신은 언니를 만나기만 하면 된다. 그 외에는 굳이 신경 쓸 필요 없었다. 그러나 내심 헤더가 마음에 걸렸고, 하몬의 퉁명스러운 친절이 껄끄러웠고, 클레인스나 브레딕의 배려가 거북했다. 내가 그들을 타자화한다면 그들도 날 타자로 보는 것이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그때 네토르가 물었다.
“준비는 다 했어?”
“네.”
“좋아.”
랄티아는 그를 보다가 망설이며 물었다.
“그쪽은 왜 저희를 돕는 거예요?”
“……설문 조사라도 해?”
네토르는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보았던 랄티아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냥 갑자기, 이해관계가 헷갈려서 그러는 거예요.”
“이해관계라.”
하몬은 선상 반란을 위해, 브레딕은 우투그루를 위해, 베제는 로트렐리에게 진 빚을 청산하기 위해. 클레인스는 모르겠지만. 네토르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일전에도 말했잖아. 몇 번을 말하게 해? 난 내 형제를 찾으러 떠날 거야.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영…….”
“그럼 이 배를 벗어나면 우리와는 떨어져 다닐 건가요?”
“흠, 그러게. 우투그루가 로트 일행과 따로 떨어져나오지 않았을 마당에 브레딕이 헛되이 다른 곳으로 돌 리도 없으니까 걔는 너랑 같이 다니겠군.”
네토르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다가 말했다.
“그때 상황 보고 움직이면 되지 않겠어? 나도 무작정 형제를 찾아 떠돌 자신은 없으니 일단 너와 동행하긴 할 거야.”
“…….”
랄티아는 네토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긴 몰라도 언니를 찾기 위해서라면 꽤 많은 곳을 돌아다녀야 할 것이다. 일순 네토르가 꽤 가혹한 삶을 살아왔다는 예감이 들었다. 브레딕을 보고 추리하듯 들었던 예감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에 랄티아는 인상을 찌푸리고 이마를 짚었다. 그러자 네토르가 놀란 듯 랄티아를 보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그녀가 무어라 답하기 전에, 하몬이 선실로 들어왔다. 휠체어에 앉아 검을 무릎 위에 둔 그는 단단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올라가자.”
그의 뒤로 함저 구역의 선원들이 제각기 서 있었다. 랄티아는 그제야 정말로 일이 시작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불쑥 기대감과 두려움이 솟아났다. 하지만 언니를 위해서니까. 이것조차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언니를 볼 낯이 없지.
로트렐리가 들었더라면 ‘그냥 가만히 있어!’하고 기함했겠지만 어쨌거나 당사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니 되었다.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고, 구명정만 찾아서 바로 먼저 들어가 있어. 알겠지?”
브레딕이 랄티아에게 가까이 다가와 빠르게 말했다. 이미 수 번은 나눈 이야기였다. 랄티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피스톨을 허리띠에 꽂았다.
베제는 랄티아의 뒤에, 네토르와 브레딕은 그녀의 양쪽에 있었다. 클레인스는 선두에 있는 하몬의 휠체어를 잡고 긴장한 얼굴로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브레딕이 베제에게 말했다.
“집 잘 지켜.”
“웃기는 소리 마!”
베제는 함저 구역에 남기로 했다. 그는 다른 이들과 달리 프라세와 검은바다의 선원으로 지내도록 혐의를 벗을 수 있는 증거가 필요했다.
반란에 가담하지 않는 그는 연신 불편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으로 랄티아에게 잔소리를 우다다 쏟아냈다. 그 촉새 같은 수다 소리에 네토르가 적당히 하라며 눈치를 줬다.
제 뒤의 클레인스를 보던 하몬은 함저 구역의 위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서 고개를 돌려 어둠을 응시하다가 느리게 말했다.
“가자.”
함저 구역을 벗어나 위로 올라가며 랄티아는 최대한 침착하기 위해 애썼다. 요한이 배식 시간을 한정해서 지금 아래층 선실에 남은 선원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올라가다 보면 간혹 선원을 마주칠 수는 있지만 다른 이들이 처리할 것이다.
자신은 노상 갑판까지 올라가 구명정에 올라타 탈출한다. 아주 간단한 작전이었다.
요한은 헤더에게 별다른 언질을 하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를 좀 껄끄러워했지만, 어쨌든. 그가 그렇게 걱정하던 하몬의 안위도 어느 정도 달린 마당에 헛짓거리를 할 리는 없다.
노상 갑판이 가까워지자 마주치는 선원이 늘어갔다. 그들은 처음엔 하몬을 보고 왜 그가 여기에 있는지 의아해하다가 순식간에 제압되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그들이 당황해 외쳤다.
“하몬! 뭐 하는 거예요?”
“입 다물게 해둬.”
하몬은 함저 구역의 선원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랄티아는 그런 하몬을 보며 혀를 찼다. 이제 노상 갑판까지 두 층 남았다.
브레딕과 네토르가 긴장한 얼굴로 랄티아와 몸을 수그리고 주변을 살폈다. 한 층 더 위로 올라가자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의 선원들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어? 하몬?”
어쩐 일이에요? 선원들의 사이로 웅성거림이 퍼져가는 때였다. 하몬이 외쳤다.
“비켜, 얼간이들아! 나는 클루스도를 만나러 간다!”
그 엄포에 후다닥 물러섰던 이들이 문득 하몬의 뒤로 따르고 있는 함저 구역의 이들과 그들의 손에 들린 무기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하몬, 왜 올라왔어요?”
“난 올라오면 안 되더냐?”
“그게 아니라…….”
하몬을 막으려고 다가온 선원이 웅얼거리며 무어라 말하려 하는데,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든 하몬이 그의 목을 겨눴다. 그에 선원들 사이로 숨죽인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비켜. 나는 노상 갑판으로 간다.”
하몬이 검날을 거두지 않고 외려 목덜미에 가까이 겨누자 선원은 당황해서 물러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