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13)
바다새와 늑대 (212)화(213/347)
#56화
그때 네토르가 클레인스를 붙잡았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린 클레인스를 네토르가 잡아 눌렀다. 물결이 거칠게 일어 구명정을 적셨다.
검은바다는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빠른 속도로 바다를 가로지르던 구명정이 이내 서서히 느려졌다. 헤더가 고개를 들고 랄티아를 보았다.
“지쳤어?”
“아뇨. 마장석이 다 떨어진 거예요. 이제 평범한 속도로 가야겠어요.”
랄티아는 기구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러자 폭발할 것처럼 터져 나오던 푸른빛이 잦아들었다. 클레인스는 흐린 시야 사이로 네토르와 랄티아를 보았다.
랄티아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클레인스에게 말했다.
“하몬은 이번 일로 죽진 않을 거예요.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아서 유감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그 말에 클레인스는 다시금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랄티아의 목소리는 가끔 그렇게 묘했다. 귀가 밝은 그조차 헷갈릴 정도로 확실하진 않았지만…….
때때로 두 사람이 동시에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네토르가 붙들고 있던 키에서 손을 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가까운 섬으로 어디든 가자고.”
* * *
후작의 저택은 그 이름값과는 다르게 검소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사치를 자중하는 가풍에서 온 것도, 혹은 가난에서 온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저택의 주인이 다른 것에 더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나았다.
그레고리는 백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깔끔한 모양의 액자와 그 속의 초상화를 보다가 들려오는 발소리에 돌아섰다.
“그레고리! 어서 오시게.”
저택의 주인인 캐시언 후작이었다. 그레고리는 자신을 반기는 캐시언 후작의 미소를 속으로 적당히 흘기며 웃었다.
“이리 환대해 주시니 감사하군요. 안주인께서는……?”
“부인은 살롱에 가 있지. 자, 자리에 앉게나.”
깔끔하다 못해 휑뎅그렁한 응접실에 두 남자가 앉자, 사용인이 금방 차를 내왔다. 은근히 호화로운 주변은 고급스럽다기보다 스산하게 느껴졌다.
응접실은 저택에서 가장 채광이 좋은 곳이었으나 그럼에도 어쩐지 어스름했다. 어둠을 가르듯 달큼한 냄새가 하얀 김과 함께 실내를 채웠다. 그레고리는 얼른 잘 다듬어진 말을 내뱉었다.
“차향이 좋군요.”
“이번에 새로 들인 차라네. 아상트라에서 재배 중이지.”
그곳이라면 꽤 예전에 그레고리가 제국 해군의 운용 허가를 내린 서류 안에 있던 마을이었다. 새로이 노예를 수송해다 그곳의 차밭에 노역을 시켰더랬다.
음, 허가하길 잘했군. 최근에 허가한 노예무역에서도 그럴듯한 결과가 돌아오면 좋으련만. 그레고리는 차를 몇 번 홀짝이며 음미하다가 이내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편지는 무슨 의미였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곧바로 본론이군. 난 이래서 남작이 좋아.”
캐시언 후작은 호탕하게 웃다가 붉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마흔에 이르는 나이대보다 젊어 보이는 얼굴이 빙긋 웃자 꿍꿍이가 있는 여우가 실실대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게 아니고, 내가 최근에 들은 게 있어서 말이야.”
“바다의 주인과 무언가 연관이 있는 겁니까?”
“그러니 그런 편지를 보냈지.”
캐시언 후작은 후후 웃으며 버터 향이 짙게 나는 쿠키를 입에 넣었다. 그레고리는 찻잔 받침을 손가락으로 톡톡 연거푸 두드렸다. 나름의 재촉이었으나 캐시언 후작은 아랑곳하지 않고 쿠키를 모두 삼킨 뒤에야 느긋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황제에게 누군지 모를 존재가 붙어있는 것은 확실해.”
“…….”
“으음? 딱히 놀라는 기색이 아니군. 이미 알고 있었나?”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후작은 ‘그래?’하고 뜻 없이 되물었다가 어깨를 으쓱이고 말을 이었다.
“그런 존재가 붙어있는데도 불구하고 바다새를 찾는 이유가 뭐겠나? 잠시 고민해 봤지.”
“그래서…….”
“그래. 역시 바다의 주인을 부활시키려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네.”
결론이 너무 성급하지 않습니까? 그레고리는 약간 따지고 싶은 기분으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 후작은 다 좋은데 이런 괴짜 자질이 때때로 성가셨다. 그레고리는 침착함을 되찾기 위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성급한 결론 아닌가 싶습니다만.”
차의 힘은 위대하게도, 그냥 생각하던 것을 침착하게 내뱉을 수 있게 해줬다. 후작은 여유만만한 태도로 손가락을 까딱이며 혀를 찼다.
“황제가 긍정했네.”
“예?”
“일전에 개인 알현을 하러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자신의 뒤를 봐주는 이가 있다는 것과 바다의 주인을 다시 나타나게 하는 목적임을 밝히더군. 얼마나 멋지던지! 내게 그것과 관련해 일을 맡긴 거라고!”
후작은 극적인 어투로 말하며 하하 웃어댔다. 그레고리는 미심쩍은 얼굴로 후작을 보다가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황제가 긍정했다고 그것을 전부 믿을 수 있는가?
다소 미심쩍은 일이었다. 너무 순순히 밝히는걸.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 황제가 그 정도로 후작을 믿고 있었나?
하긴, 캐시언 후작은 귀족들 사이에서 나름 명망이 있는 편이었다. 문제는 괴짜 같은 면이 너무 크다는 거겠지만. 그 명망을 괴짜 기질로 죄다 깎아 먹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그렇다면…… ‘그’가 후작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로 했다고? 아니, 그전에 정말로 황제의 뒤에 그가 있는 게 맞았군. 짧게 계산을 끝낸 그레고리는 후작에게 물었다.
“그럼 왜 굳이 바다새를 잡으려 하는 겁니까?”
“아마도 매개체겠지?”
“매개체요?”
후작은 가뿐하게 도로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열 손가락 모두에 주렁주렁 달린 반지의 보석이 보랏빛을 반사하며 반작거렸다. 거미 다리 같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즐겁게 두들기며 후작이 은근한 어투로 말했다.
“내 호문쿨루스는 소서러를 매개체로 만들었지. 그것처럼, 지금은 소실된 바다의 주인을 도로 만들어내려면 바다새가 매개체로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네.”
“아, 그렇죠……. 그러고 보니 일전에 줬던 호문쿨루스는 잘 썼습니다.”
“그렇지!”
후작이 손뼉을 치며 손짓했다.
“멀쩡한가? 어디에 썼다고 했지?”
“해적들에게 주었지요. 아마 제국 변두리 일에도 관심이 있으시면 들어봤을 이름일 겁니다. 우홉피아주라고…….”
그러나 후작은 아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붉고 얇은 눈썹을 들썩이며 그레고리를 보았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뭐어, 자네라면 잘 썼겠지.”
“그런데……. 다른 해적과의 전투에서 죽었다고 하더군요.”
“죽어?”
여유롭게 다과를 집어 들던 후작이 대번에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들었다. 주홍빛 눈동자가 뱀의 그것처럼 날렵하게 빛났다. 그레고리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정황을 설명하려 하기도 전에, 곧장 후작이 성급하게 물었다.
“어쩌다? 어지간한 충격에도 견딜 텐데. 겉도 단단하고, 좀 긁히는 정도로는 내 호문쿨루스의 작동을 멈출 수 없어.”
“알고 있습니다.”
“그럼 왜? 어떻게?”
“자세히는 모르지만, 결정적으로 소서러의 짓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것은 직접 들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레고리의 말에 후작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그가 웬 운송차를 마차 뒤에 더 끌고 온 것을 떠올리고 후작은 앞으로 쏠려있던 상체를 의자에 파묻었다.
“자네는 또 뭘 갖고 온 거야?”
“뭐, 엄밀히 따지면 다 쓴 걸 떠넘기는 셈이라 죄송한 일이지만요.”
“아하, 재활용이다, 그건가? 건강한 놈들이야?”
후작의 물음에 그레고리는 차를 모두 마시곤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안대를 만지작거리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바다를 누비며 해적질을 해왔던 놈들이니 쓸만하겠죠.”
“하하, 평범한 해적이었다면 공적이 되었을 텐데 굳이 내게 준다는 건…….”
후작은 방실방실 웃더니 그레고리의 오른쪽 눈과 시선을 마주치며 은근한 어투로 덧붙였다. 그에 그레고리는 어깨를 들썩이고는 말했다.
“예, 제게 더는 필요 없는 것들인데 고역스럽게 찾아왔길래.”
“정말로 자네에겐 쓸모없고 나에겐 보물 같은 것을 갖고 왔군.”
후작이 콧노래를 부를 기세로 싱글벙글한 얼굴로 기뻐했다. 그레고리는 헛헛하게 웃음 짓고는 혀를 찼다.
“하여간 이렇게 홀로서기를 못 하는 걸 보면 꿈만 큰 해적들이었지 싶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더 있는 모양이야?”
“뭐……. 그게 후작님께 중요하겠습니까?”
그레고리의 물음에 후작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아니지. 그러더니 종을 울린 그는 사용인에게 그레고리가 가져온 것들을 지하에 옮기라며 명령했다. 유령처럼 응접실을 떠나는 사용인을 보던 그레고리는 바다새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더 할 말이 있어 보이는 후작을 눈치채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뭔가 더 있습니까?”
“아까 말한 매개체 말인데.”
“예, 저도 그것 때문에 바다새를 어떻게 잡을지 고민을…….”
“아니.”
후작이 그레고리의 말허리를 끊더니 싱긋 웃으며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휘황찬란한 보라색 보석들이 겹겹이 겹쳐져 거미의 눈처럼 보였다.
“바다새에 더해 새로운 매개체의 연구가 필요할 것 같아서 말야.”
“……소서러를 더 구하고 싶습니까?”
“아니, 이미 소서러는 충분히 연구했어.”
후작은 느긋한 동작으로 찻잔에 차를 따랐다. 희게 올라오는 김 너머로 후작이 교묘하게 웃었다.
“자네, ‘에른’이라고 알고 있나?”
“에른이요?”
그레고리는 미간을 좁혔다. 그간 초월자와 소서러는 자주 들었어도 에른은 퍽 생소한 이름이었다.
“제 지혜가 아직 부족한 모양이군요.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습니까?”
“소서러에 관해 연구하다가 ‘소서러로 추정되는 인종’을 논하는 기고문을 본 적이 있네.”
거기까지 듣고 그레고리는 한숨을 쉬고 싶었다. 어디서 동화라도 보고 온 건 아니겠지? 놀랍고도 유감스럽게도, 후작이 무턱대고 망상 이야기를 쫓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후작은 웃으며 말했다.
“어쩌면 자네도 들으면 알지도 모르는데……. 해군의 내부 문서였거든.”
그레고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해군 중장으로 있을 적에도 일을 위해 앞선 시대의 서류나 정보를 열람하긴 했으나 에른이라는 이들을 기록된 것을 본 기억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해군 문서를 어디 감히 ‘기고문’이라고 한단 말인가? 후작은 차를 홀짝이다가 말했다.
“모를 수도 있나? 쿨라와비투, 현재는 무인도 지대라고 불리는 곳에 제국은 꽤 공을 들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말에 그레고리는 입을 다물고 휘둥그레 뜬 눈으로 후작을 보았다. 쿨라와비투는 과거 제국이 백려보다도 우선으로 차지하려 들었던 곳이다. 그러나 이제 제국에서 그곳을 건드릴 엄두를 내는 이들은 없다.
잠들었다고 알려진 초월자 ‘벨라우라그’가 깨어나 쿨라와비투를 황폐하게 만들었고, 멋대로 쳐들어갔던 제국은 처참하게 패퇴했다. 한때 찬란한 황금의 땅이었던 그곳은 현재 원주민조차 살지 못하게 되었다.
죽어버린 땅은 주변 바다마저 온갖 괴물이 들끓고 있는 상태다. 그 유명한 눈물의 바다와 유령의 바다를 포함해 수많은 위험한 바다가 빽빽하게 들어찬 곳이 무인도 지대였다.
그레고리는 제 귀를 의심하며 물었다.
“그 에른이라는 자들이 그곳에 사는 겁니까?”
“정확히는 살았었지. 알다시피 지금 그 땅은 아무도 못 사는 곳 아닌가. 그곳에 살던 원주민 중 에른이라는 종자가 있다더군.”
후작은 거의 신이 난 아이처럼 들뜬 어조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레고리는 어디 계속해보라는 듯 쳐다보며 차를 홀짝였다.
“본토로 이주한 원주민 중에 이어지는 에른의 피가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원주민을 일일이 추려내 소집하기도 귀찮은 일이지. 꽤 옛날 일이니 힘들기도 하겠고 말이야.”
“그래서요?”
“그래서……. 자네의 함대가 나와 무인도 지대로 동행해주길 바라네.”
“이게 뭔 개소리, 콜록!”
그레고리는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쌍욕을 참아내는 대신 찻물을 뱉어내야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