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14)
바다새와 늑대 (213)화(214/347)
#57화
요란하게 기침을 하는 그레고리를 보며 후작은 어이구, 저런, 하며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것을 사양한 그레고리는 대신 자신의 주머니에서 행커치프를 꺼내 입을 닦았다. 길게 한숨을 쉰 그레고리가 단호하게 물었다.
“제정신이십니까?”
“그리 말할 정도인가?”
후작은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시무룩한 낯을 했다. 그레고리는 어이가 없었다. 무슨 무인도 지대를 간다는 정신 나간 생각을 한단 말인가?
차라리 말마따나 쿨라와비투의 원주민을 소집하는 것이 나을 판국이었다. 당시의 쿨라와비투 기록을 열람했다면서 어떻게 저런…….
쿨라와비투 정복 작전은 그레고리가 해군에 완전히 말뚝을 박기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일은 제국이 본토와 멀리 떨어진 곳의 식민화를 꺼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만큼 유명했다.
실제로 쿨라와비투 이후로 제국은 완전히 동떨어진 섬으로는 손을 뻗지 않거나 협정을 맺는 식으로 연결 다리를 놓지, 백려처럼 자근자근 밟으려 들지는 않았다.
쿨라와비투는 그만한 기억이 있는 이름이었다. 또한 초월자에 홀딱 빠진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에서 비중 있게 취급되는 정보이기도 했다.
“이미 제국에게 제공받은 소서러와 마장석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굳이 에른인지 뭔지가 필요합니까?”
“알다시피 나는 이미 마장석과 소서러에는 전문가 아닌가?”
“그래서요?”
“더 강한 호문쿨루스를 만들고 더 넓은 지평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뭐든 새로운 표본이 필요해.”
그래서 그게 에른이라는 것인가? 그레고리는 기운 빠진 얼굴로 후작을 바라보았다. 이 미친 괴짜 과학자……. 그 표정을 뻔히 보았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후작은 열렬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들어보게, 자네에게 줬던 호문쿨루스- 7기 2열…….”
“그냥 헤로이핀이라고 부르십시오.”
“흠, 깜찍한 이름이군. 어쨌든, 그 헤로이핀도 꽤 튼튼한 녀석이었어. 그런데 죽었다며? 더 강하고 튼튼한 녀석을 위해서라면 표본의 범위를 넓혀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일세.”
“하지만 일전에도 따개비의 요정을 찾겠다고 함선 하나를 동원했다가 허탕을 치지 않으셨습니까?”
그레고리의 날카로운 말에 후작은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부렸다. 아니, 그건, 그때 정보원이 쓸모없는 정보를 준 거고, 어쩌고저쩌고, 하며 웅얼거리는 후작을 흘긴 그레고리는 한숨을 삼키고 말했다.
“에른도 현재 존재할지 안 할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
“어쩌든 간에 찾아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으면 모르는 일 아닌가.”
“그래서 무인도 지대로 항해를 강행하시겠다고요?”
후작은 능글맞게 웃으며 쿠키를 쪼개 입에 넣었다. 그레고리는 그 얼굴을 떨떠름하게 보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떤 이유로든 불가능합니다. 일단 전 이제 소장이니 그것을 허가할 위치도 아니지요.”
“그냥 정찰과 정보 수집을 위한 목적인데도?”
그레고리는 후작이 맡은 분야가 국방 쪽이 아니라 사무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는 짓은 국방과 너무 긴밀한 일만 해대는 터라.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후작을 응시하던 그레고리는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쿨라와비투는 그리 간단한 게 아닙니다. 일단 정신 나간 민간 항해가 아닌 이상 쿨라와비투로 가는 군함은 무조건 해군의 대장에게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흠…….”
“헛된 생각하지 마십시오, 후작님. 그곳은 초월자 벨라우라그의 영역입니다. 있는지도 모르는 바다의 마녀 같은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러나 그레고리의 말에 후작은 오히려 눈을 빛내며 흥미를 감추지 못했다. 답답해 미치겠다는 얼굴로 차를 재차 따라낸 그레고리가 말했다.
“제국은 당시에 수십 척의 함대를 이끌고 쿨라와비투로 갔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치명적이었죠. 겨우 두 척만이 용케 난파되지 않고 살아 돌아왔으니 말입니다. 하물며 그녀는 우리 제국인이 그 땅에 질병을 옮긴 것을 증오했습니다. 그 탓에 저주를 건 것인지 뭔지, 제국에 도착한 두 척 중 한 척의 군사들은 이후 원인 모를 병으로 사망했죠.”
“흥미롭군.”
그레고리는 버럭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야, 이 정신 나간 작자야! 내가 지금 ‘으스스한 망태 할아범 이야기’라도 해주는 줄 알아?! 가까스로 후작의 면전에 욕을 하는 것을 참은 그는 차를 한 번 더 마시고 말을 이었다.
“쿨라와비투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무인도 지대 근처 바다는 이미 후작께서도 잘 알지 않으십니까?”
“알기야 알지. 하지만 난…….”
“잠깐, 거기까지만 합시다.”
후작의 입에서 금방이라도 ‘난 그 바다 괴물들도 보고 싶다네!’ 하는 정신 넋 빠진 이야기가 나올 것을 예감한 그레고리가 그의 말을 뚝 끊었다. 쨍 소리가 나도록 찻잔을 내려놓은 그레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후작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말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다음에 해야 할 것 같군요. 암만 흙냄새가 고소하게 느껴지시더라도 모쪼록 그런 터무니 없는 말은 하지 말아 주십사 간청하는 바입니다, 후작님.”
“아주 곱상하게 사람 욕하는 건 자네가 최고야.”
툴툴대며 차를 훌쩍 들이켜고 일어난 후작은 그레고리와 악수했다. 후작이 한발 물러난 것이었다. 그레고리는 속으로 안심하며 짧게 인사를 나누고 저택을 나갔다.
대문 앞에서 마차에 올라 사라지는 그레고리를 보던 후작은 입맛을 다시며 사용인을 불렀다.
“별수 없지, 에른은 나중을 기약하고 일단 후작이 가져온 것들이나 보자고.”
후작의 말에 사용인들은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저택의 커튼을 모조리 치며 문단속을 시작했다. 반지가 빼곡히 끼워진 손으로 턱을 문지르던 후작은 뚱한 얼굴로 혀를 찼다.
초월자의 눈치를 보느라 원하는 것도 못 한다니, 기구한 운명이군. 푹 파인 홈에 태엽 기구를 끼우고 열심히 손잡이를 돌려대는 사용인들의 뒤로 열리는 바닥 문의 너머로 짐승이 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힘겹게 문을 연 사용인들이 물러나자 후작은 유유자적 계단을 따라 내려가며 흥얼거리듯 읊조렸다.
“뭐, 지금은 남작이 선물한 모르모트를 즐겨보자고.”
스산한 웃음 너머로 동굴 너머에서 울리는 듯한 기괴한 소리들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캉! 쇳소리가 크게 울렸다. 숲을 뛰어가다 다급하게 검을 휘둘러 쇄도하는 가고일의 팔을 막아낸 나는 찌르르 울리는 검신에 아차 한 얼굴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무기로 가고일을 막아봐야 손해였다. 나와 마찬가지로 뛰어가던 도멤이 신경질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가고일은 왜 몸이 돌덩이인 거지?!”
“종족 특성을 따져봤자…….”
키이엘로가 침착하게 말했으나 다들 그것에 귀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대부분의 가고일은 저택을 지키는 수문장이다. 그러니 저택 부근을 벗어나면 괜찮을 것이라 예상했으나, 완벽하게 틀려먹은 상황이었다.
저택에서 떨어져 우리가 왔던 숲으로 도주했음에도 가고일들은 우리를 계속 쫓고 있었다. 아주 섬 끝까지 쫓아올 기세였다. 거, 저택 근처 좀 알짱거렸다고 너무하잖아!
내 명령으로 하늘을 날던 발카가 비아냥거렸다.
『앞으로는 물욕에 져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조용히 해! 나는 버럭 외치고 싶은 것을 참고 서둘러 숲 사이를 내달렸다. 우린 지금 하등 쓸데없는 보석 같은 것 외에는 별달리 그럴듯한 자원이 없다고!
그리고 보석이나 금화는 도시에서나 드높지, 이런 무인도에서는 먹지도 태우지도 못하는 짐덩이밖에 더 되겠는가. 보석이나 주화로는 배를 때워 고칠 수도 없었다! 반짝이는 돌덩이보다는 나무가 더 쓸모있는 상황이란 말이었다.
우투그루가 이를 갈며 뒤의 가고일들을 흘기곤 말했다.
“물로 도망가야 해.”
“지금 우리가 하는 건 나 잡아 봐라냐? 이미 다리 근육 터질 것처럼 뛰고 있잖아, 멍청아!”
내가 버럭 외치자 우투그루도 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방향을 아까 계곡 쪽으로 틀라는 거잖아, 멍청아!”
“너희 둘 다 소리 지르면서 싸우지 마!”
도멤이 황당하다는 듯 외치는 것과 동시에 휘청 고꾸라졌다. 무언가에 걸린 것처럼 푹 고꾸라지는 모습에 나는 황급히 그를 돌아보았다.
“도멤!”
“내가 갈게!”
키이엘로가 짧게 외치고 서둘러 도멤에게로 달려드는 가고일을 막아냈다. 그때 키이엘로의 아래에서 도멤이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활이었다! 머뭇거리며 가고일을 막던 우투그루가 그것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활을 어디서 난 거야?”
“이따가 얘기할게!”
도멤이 몸을 일으키는 것에 가고일을 발로 차낸 키이엘로가 서둘러 도멤의 팔을 잡고 뛰어왔다. 높게 솟은 나무 위에서 발카가 나에게 외쳤다.
『9시 방향에 아까 그 계곡이 있어!』
“이쪽으로!”
발카가 알려준 방향을 가리키자 다들 일제히 뛰었다. 돌덩이라서인지 가고일의 속도가 그렇게까지 빠르지 않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또 가고일은 날개가 달려있어도 날지 못했다. 간단한 이유였다. 돌이라 무거우니까. 그러니 깊은 물로 가면 가고일은 가라앉게 되어있다. 키이엘로가 도멤에게 물었다.
“그 활은 뭐야?”
“아까 넘어진 곳에 있었어! 화살도!”
다시 보니 도멤은 언제 챙겨왔는지 화살도 갖고 있었다. 척 봐도 두세 순은 되어 보였다. 계곡을 향해 뛰며 문득 왜 그런 곳에 활이 있는지 의아했다. 그때 우투그루가 왈칵 성질을 부렸다.
“활에 화살까지 있는데 안 쏘고 뭐 하는 거야?”
“아, 맞네.”
도멤이 그제야 떠올린 듯 훌쩍 앞으로 뛰었다가 뒤를 돌아보며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가고일이 가까이 쫓아오고 있었다. 조준할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때 도멤이 시위를 놓았다. 쐐액 날아간 화살이 가고일 옆의 나무를 퍽 강하게 꿰었다. 우투그루가 복장 터진다는 듯 외쳤다.
“그걸 못 맞추냐?!”
“생각보다 어렵단 말야! 차라리 칼을 던지라고 해!”
도멤이 억울하다는 어투로 그에게 쏘아붙였다. 창이 아니고? 짧게 의문이 스쳤지만, 여유 부리고 있을 틈이 없었다. 다시 가고일을 피해 뛰기 시작한 우리는 턱까지 차오르기 시작한 숨을 허덕이며 주변을 살폈다.
“발카!”
내가 발카를 불렀지만 높이 날아오른 바다새는 대답이 없었다. 키이엘로가 굳은 얼굴로 뛰며 주변을 살폈다.
“계곡이 이렇게 멀었나?”
“꽤 오래 뛴 것 같은데…….”
무언가 더 있었다. 무슨 술수가 있거나 길을 잘못 든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퍼뜩 발카를 향한 걱정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환술 따위로 발카가 보이지 않는 거라면 몰라도 발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숨이 차서 뛰던 가슴이 일순 차갑게 가라앉았다. 찰나에 멈춘 것 같은 감각이었다. 계속 피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뛰던 것을 멈추고 도멤의 손에서 활을 빼앗아 당장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키이엘로가 놀라서 물었다.
“로트, 쏠 수 있어?”
“몰라, 일단 해 봐야지.”
우투그루는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아 활시위를 당기기엔 무리였다. 키이엘로는 조준을 영 못했고, 사실 키이엘로가 시위를 당기면 활이 망가질 터였다. 도멤도 창이 아닌 활은 익숙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남은 건 나라는 거지. 그 생각을 하자마자 우투그루가 말했다.
“이제 쟤가 우리의 마지막 동아줄이야. 썩은 동아줄이면, 뭐, 마음의 준비를 하자고.”
“무슨 놈의 마음의 준비?!”
도멤이 기겁하며 외치는 것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나는 가장 가까이에서 달려오는 가고일을 조준했다. 일순 가고일이 코앞에 와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멤과 우투그루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숲의 바람이 느리게 뺨을 쓸었다.
당겨진 시위가 팽팽한 소리를 냈다. 노릴 곳은 간단했다. 가슴의 정중앙, 둥근 구체! 숨을 짧게 들이마신 나는 시위를 놓았다. 화살 깃이 뺨을 스치는 것을 뒤늦게 느끼는 순간 화살이 가고일의 가슴을 꿰뚫었다.
명중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