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15)
바다새와 늑대 (214)화(215/347)
#58화
화살에 가슴의 구슬이 깨진 가고일이 쿵, 육중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넘어졌다. 키이엘로가 짧게 감탄했다.
“다재다능해.”
“내가 좀.”
그러나 으스대듯 말한 내가 다시금 도망치기 위해 뛰기 시작하자, 얼렁뚱땅 뒤따라 뛴 우투그루가 다급하게 쏘아붙였다.
“어딜 가? 마저 쏴야지!”
“음, 일단 거리를 좀 더 벌리고!”
사실 무슨 정신으로 쏜 건지 모르겠다는 말은 적어도 우투그루에게 해서는 안 된다. 다행히 가고일은 지능이 그렇게 높은 괴물이 아니었다.
쓰러진 가고일의 시체를 인식하지 못했는지 서로 쿵쿵 부딪친 뒤에야 남은 가고일들이 우리의 뒤를 쫓아왔다. 적어도 둘하스처럼 지능이 높아 위기감이 크게 드는 괴물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수가 많은 것은 위협적이었으나 둘하스가 주던 위압감과 비교하면 훨씬 나았다.
우투그루가 말했다.
“결계 주술인가? 골치 아프네. 누가 이런 거 잘 아는 사람 없어?”
“주술 표식만 찾아서 없애면 되는 거 아냐?”
“그러니까 그 주술 표식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도 모르잖아. 애초에 주술 표식이 밖에 있는 거면 어쩔 거야?”
지금은 대부분 사장되었지만 아직도 섬 곳곳에는 주술의 흔적과 주술을 계승하는 주술사가 있는 법이다. 예전에 내게 저주를 걸었던 누고도 그런 주술사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랄티아가 떠올랐다. 랄티아는 ‘자신의 소서러 재능이 주술사와 연관이 있는지 밝히겠다’라며 한때 그 관련 책을 모조리 섭렵했었다. 역시 여기에 랄티아가 있어야 하는데. 아니, 애초에 랄티아가 나와 함께 있었다면 이런 이상한 섬에 올 일이 없었겠지만.
가라앉으려는 생각을 다잡고 내가 말했다.
“설치형 주술은 안에서도 밖에서도 파훼법이 존재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져. 이건 주술의 절대적인 법칙이야. 발카는 위로 날아오른 탓에 주술 밖에 있는 것 같으니까 운이 좋다면 발카가 눈치채고 표식을 찾아주겠지.”
“그전에 우리가 석상을 꾸민 가죽 담요가 되지 않으면 말이지.”
“넌 꼭 말을 그렇게 해야겠냐?”
나는 황당하다는 어투로 우투그루에게 쏘아붙였다. 이윽고 가고일과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나는 다시금 시위에 화살을 메겼다.
만약 아까의 명중이 운이었다면 죽어라 뛰어다니면서 숲을 살피는 수밖에 없지, 뭐. 마음을 가볍게 먹은 나는 가고일을 겨눴다.
전처럼 몰입되는 감각은 옅었으나 쏘아진 화살은 다행히 적중했다. 나는 남몰래 식은땀을 흘리며 주먹을 쥐었다. 다행이다, 운빨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도멤이 내게 공치사를 했다.
“활을 줍길 잘했지? 사실 얼렁뚱땅 잡힌 거였지만.”
“시끄러워. 로트렐리가 저것들 상대하는 동안 주변이나 살펴봐.”
우투그루의 말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내가 저걸 다 상대하라고? 고작 활 하나 갖고?”
“쭉 명중만 하면 화살이 부족하진 않을 거야.”
것 참 쉽게도 말하네! 하지만 내 심정이 억울한 것과는 별개로 우투그루의 말이 맞았다. 울컥하는 마음을 담아 시위를 당기니 오히려 더 조준이 빨라진 기분이었다.
우투그루 입을 쏜다고 생각하자. 내가 그렇게 가고일을 몇 마리 쏘아 쓰러뜨리자, 석상이 쌓여 앞이 막혔다. 그러자 그것을 부수려는 듯 가고일들이 몇 번 쿵쿵거리다가 잠잠해졌다.
그러자 우투그루, 도멤과 함께 주변을 살피던 키이엘로가 기민하게 고개를 들었다.
“석상을 돌아올 방법을 깨우쳤나 보네. 이쪽엔 특별한 게 없어.”
키이엘로의 말에 우투그루와 도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나 다를까, 키이엘로의 말마따나 가고일 중 하나가 쌓인 돌더미를 둘러 다가왔다.
서둘러 자리를 피하며 내가 말했다.
“온통 수풀이라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겠어.”
“맞아. 장기전이 될 것 같은데……. 가고일이 몇 마리였지? 화살은 여유가 있어? ……로트, 네 손!”
키이엘로가 물어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에 내 손을 본 나 역시 깜짝 놀라 헉, 하고 소리를 냈다. 내 손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러나 이내 내 손이 다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나는 도멤을 돌아보았다. 도멤의 손아귀에도 피가 묻어있는 것을 본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내 피는 아냐. 활에 묻어있던 것 같은데.”
“헉, 진짜잖아! 내 손에도 묻었어.”
도멤이 뒤늦게 놀라며 제 손을 바라보았다. 우투그루가 박정하게 혀를 찼다. 수풀을 뒤지는 동안에도 몰랐다니, 멍청이, 어쩌고, 하는 내용이었다.
긴장한 채로 활을 잡아 땀이 난 줄 알았는데 피였다니. 얼떨떨한 기분으로 대충에 옷깃에 문질러 닦는데, 닦이는 것을 보자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나는 뛰던 것을 멈추고 활을 보았다. 그러나 깊게 살피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끈질기게 따라붙은 가고일이 근접해 있었다.
찝찝하긴 했으나 다시 화살을 쏴 가고일을 쓰러뜨린 나는 다시금 꺼림칙하다는 얼굴로 손에 묻은 피를 문질렀다. 눈대중으로 주변을 살피던 키이엘로가 그런 나를 보고 물었다.
“왜 그래, 로트? 피 때문에 그런 거야?”
“이거 뭔가……. 그냥 피가 아닌 것 같은데.”
“오래된 피인가 보지.”
우투그루가 신경질적으로 응수했다. 저 녀석은 결계 주술에 갇히니 성질머리가 더 삐죽거리는 것 같았다. 위기감을 느끼고 몸을 부풀리는 복어가 딱 저 꼴인데.
그런 함의를 담고 우투그루를 흘기자 그가 예민하게 내 시선을 알아채고 눈썹을 휘었다.
“내가 틀린 말 했어? 피가 무슨 종류별로 있다고…….”
그러나 그 말에 나는 퍼뜩 활을 내팽개쳤다. 그에 우투그루가 당황해 나를 보았다. 그러나 그가 그러건 말건 나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내 생각을 부정하기 위한 일이었으나 그럴수록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까, 내 추측이 맞다면 이 피는 어쩌면 생리혈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 비슷한 것이거나. 아무렴 이 자리에 나를 제외하면 생리혈을 본 사람은 없으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하겠지!
나는 속으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역겨워, 망할!
그 뒤로 쫓아온 생각은 또한 이 활이 주술 표식일 수도 있다는 추측이었다. 활과 화살이 같이 있고 가고일이 쫓아오고 있다면 활을 사용할 생각을 하지 부러뜨리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이었다. 섣불리 뽀각 분질러 봤다가 헛발질한 거라면 유일한 무기마저 사라지는 셈인데……. 내가 바닥에 활을 두고 끙끙거리자 도멤이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활 안 써, 로트?”
“잠깐, 고민 중이야.”
“그러니까 뭘?”
키이엘로는 내 태도에서 빠르게 눈치를 챘는지 내게 물었다.
“그게 주술 표식일 거라고 생각해?”
“뭐?”
그 말에 우투그루가 나를 홱 돌아보았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고민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만약 아닐 때의 위험성이 너무 커서 고민하는 중이었어.”
“그런 건 좀, 미리 말을 하고 고민하면 안 되겠냐?”
우투그루가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그때 대뜸 키이엘로가 발로 활을 밟았다. 고작 피 좀 묻은 나뭇가지인 활은 손쉽게 뽀각 끊어졌다.
그와 동시에 우투그루의 이성도 끊어진 것이 분명했다. 우투그루는 거의 저승에서 기어 올라온 야차처럼 얼굴을 구기며 누가 봐도 ‘나 빡쳤소’ 하는 표정으로 키이엘로를 돌아보았다.
뻔히 알고 있을 텐데도 키이엘로는 태연자약하게 활에서 발을 떼고 주변에 변화가 생겼는지 둘러보고 있었다. 나조차도 황당함에 키이엘로를 쳐다보는데, 발카의 목소리가 울렸다.
『세상에, 로트!』
“발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하늘에서 바다새가 서둘러 내게 날아왔다.
『어디 다치진 않았어? 너희가 갑자기 사라지더니 도멤 녀석만 먼지투성이로 나타나고!』
“도멤이라고?”
발카의 말에 나와 키이엘로는 뒤를 돌아보았다. 얼렁뚱땅 우리를 따라 돌아본 우투그루가 주변을 둘러보며 미약하게 걱정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도멤 어디 갔어?”
“…….”
나는 말문을 잃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발카에게 물었다.
“도멤은 지금 어디 있어?”
『정박한 배에서 기다릴 테니까 너희를 찾아 달라던데. 정말 결계 주술이었던 거야?』
그 말에 나는 다시금 말을 잃었다. 언제부터? 나는 문득 쫓아오던 가고일들도 멀리서 모두 멈춰있음을 깨달았다. 허망한 낯으로 부러진 활을 보던 나는 피가 묻은 손을 보며 찝찝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중 주술인가? 나야 랄티아에게 주워들은 것이 다였지만, 그런 종류의 주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정도는 알았다. 무슨 방법이었든 간에 언제부터 도멤이 허깨비였는지 감도 안 잡혔다.
그때 키이엘로가 말했다.
“활을 주울 때였나 봐.”
“뭐라고?”
“도멤이 활을 주웠다고 생각했던 때 내가 도멤을 팔을 붙잡았잖아. 어쩐지 도멤이 쑥 꺼지는 느낌이었거든.”
“그걸 왜 이제 말해?”
우리의 말에서 맥락을 파악한 우투그루가 와락 성질을 냈지만 키이엘로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시했다. 쑥 꺼지는 느낌이 나든 말든 코앞에 보이는 사람이 있는데 땅으로 꺼졌다고 생각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더 따지지 않고 나는 손에 묻은 피를 자켓에 박박 문질러 닦아내고 겉옷을 벗어 수풀 아무 데나 던져 버렸다.
꺼림해서 못 견디겠다, 진짜. 애초에 난 피를 사용하는 주술에 좋은 기억이 없었다. 서둘러 숲을 벗어나 해변으로 나온 우리는 발카의 말대로 흙투성이인 도멤과 마주했다. 도멤이 먼저 크게 안도하며 우리에게 뛰어왔다.
“다행이다, 무사했구나. 발카에게 말은 들었어?”
“너 이젠 발카와도 대화가 돼?”
“그럴 리가. 그냥 나는 발카에게 일방적으로 부탁하고 기도하는 거지. 사려 깊은 바다새가 내 말을 들어줬으면…….”
도멤은 생각보다도 더 무계획이었다. 내가 떨떠름하게 그를 보는 동안 우투그루가 순서를 이어받듯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아, 그게, 넘어질 때 갑자기 불쑥 땅 아래로 빠진 거 있지? 그래서 생매장당해서 죽나 생각하던 중에, 이 뱀이 눈을 떴더라고.”
그렇게 말하며 도멤이 주섬주섬 팔을 걷어 보여줬다. 그의 팔에는 하얀 구렁이가 칭칭 감겨 있었다. 요르문간드였다. 검푸른 눈을 가진 흰 뱀이 우리를 보고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우투그루가 경악했다.
“뭐……. 여태 그 뱀을 항상 챙기고 다녔던 거야?”
“동물을 방치하면 안 돼.”
아니, 그러니까 그 뱀은 수천 년은 묵었고 어쩌면 인간보다 지능이 높은 신화 생물일 수도 있지만 말이지. 나는 다시금 속으로 딴지를 걸었다가 도멤을 보았다. 내 시선에 그가 마저 말을 이었다.
“이 뱀이 나가는 길을 알려줬어. 거기가 좀, 개미굴처럼 구불구불했거든. 미궁 같았어. 어쨌든, 나는 그렇게 나오긴 했는데 이 뱀이 섬에 주술이 있다는 거야. 나야 너희가 걱정되니까 발카에게 위에서 살펴달라고 부탁했지.”
“그래, 일단…… 알겠어. 우리는 말하자면 긴데……. 표식을 찾아서 주술을 파훼했어.”
“다행이다, 표식을 금방 찾았나 봐?”
도멤은 눈에 띄게 안도하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허허 웃었다. 그래, 금방 찾았다면 금방 찾은 거지……. 우리는 도멤의 심신을 위해 숲에서의 일을 함구하기로 눈짓을 나눴다.
배로 돌아온 뒤에야 우리는 조금 편하게 쉴 수 있었다. 위험한 섬이라는 판단에 서둘러 출항한 배는 느리게 바다를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방향은 뜻밖의 존재로 정해지게 되었다. 키를 잡은 내 옆에서 키이엘로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람이 버젓이 사는 섬에 세계의 뱀이 잠들어 있다니.”
“그러게나 말이다.”
요르문간드가 눈을 뜬 이유는 가까운 곳에서 과거 떨어져 버렸던 또 다른 세계의 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뱀이 말하는 휘황찬란하고 환상적인 모험은 우리에겐 잡스러운 일이다. 본래라면 그런 ‘잡스러운 일’에 할애할 시간이 없다며 매몰차게 거절했을 터였지만…….
물자를 점검하던 우투그루가 무게만 나가고 쓸모없는 보석과 돈을 이참에 처분하고 항해에 필요한 물품을 보충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유능한 부선장이던 우투그루의 의견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우리가 고민하는 것을 들은 요르문간드가 반색하며 다른 뱀이 있는 곳이 적당한 크기의 섬일 것이라 말한 것이다.
결국 우투그루의 현실적인 목표와 요르문간드의 미치고 팔짝 뛰겠는 목표가 일치하는 바람에 다시 시작된 항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