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17)
바다새와 늑대 (216)화(217/347)
#60화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가라앉히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 키이엘로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런데 세계의 뱀은 바다의 주인이 건져내서 지금처럼 된 거 아니었어? 그가 죽이려고 했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데.”
“넌 이 와중에 그런 게 궁금해?”
“왜, 신기하잖아.”
어디 가서 못 들을 말이기도 하고. 그 말이 맞긴 했다. 나는 키이엘로에게 쏘아붙이지는 못하고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입만 쭉 내밀고 드러눕듯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키이엘로의 물음에 뱀이 답했다.
『누구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처음 난 것은 신의 시체 안에서였다. 눈을 뜨니 청명한 새벽하늘이 우리를 굽어보고 있었지.』
요점만 말하면 좋겠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새 숟가락을 가져와 스튜를 떠 입에 넣었다.
『메흐는 우리가 신으로부터 났다는 이유로 우리를 없애려 했다. 그때의 그는 진정 분노의 화신이었어. 그만큼 위협적이고 두려운 인간을 본 적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없었다.』
“그런데 용케 살았네?”
『루루미가 우리를 살리라고 메흐에게 말했지.』
“바다의 마녀가?”
뜻밖의 이름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그 신화를 알려준 그녀는 그런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나는 키이엘로와 눈이 마주쳤다. 그 역시 나와 비슷하게 의아하게 여기는 듯 눈짓으로 뱀을 힐끔 가리켰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가 다시 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메흐를 가로막았고, 그로 인해 우리는 메흐의 손에 세계의 법칙이 되었다. 메흐는 복잡한 인간이었어…….』
그때 배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서둘러 계단으로 올라가 바깥을 본 나는 바람이 거칠어지는 것을 보고 선실의 이들에게 말했다.
“날씨가 좀 궂어질 것 같아. 난 조타실에 갈게.”
“이젠 발카의 도움 없이도 그 정도는 다 아는 거야?”
대단하다! 도멤이 감탄하는 것을 뒤로하고 키이엘로도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나도 도와줄게.”
“난 아래 내려가서 물자나 더 정리해 봐야겠어. 각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메모해두게.”
우투그루도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도멤은 행주로 식탁을 닦으며 말했다.
“밥 먹은 뒷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걱정 말고.”
아주 손발이 척척 맞았다. 반면 세계의 뱀은 다소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 이야기는 더 듣지 않는 건가?』
“굳이 들어야 해?”
“난 간다.”
우투그루가 가장 먼저 미련 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키이엘로는 어깨를 으쓱이며 내 쪽으로 다가왔고, 도멤은 뱀을 팔에서 떼어내 의자에 걸쳐둔 뒤 식탁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빨랫감이라도 된 것처럼 의자에 걸쳐진 뱀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아래로 내려가 똬리를 틀었다. 나는 키이엘로와 조타실로 가 바다를 살폈다. 발카가 고개를 높게 쳐들고 냄새를 맡더니 말했다.
『확실히 그래, 밤이 되면 파도가 꽤 높이 치겠어.』
“속도를 조금 낼까?”
“그러는 게 좋겠다. 어차피 섬에 가면 보석을 돈으로 바꿀 수 있을 테니까, 마장석은 넉넉히 마련할 수 있을 거야.”
키이엘로는 내가 키를 잡고 항로를 다잡는 것을 보다가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손을 꿈지럭거렸다. 나는 키 옆의 나침반으로 방위를 잡은 뒤 그를 돌아보았다.
“뭐야?”
“응?”
“도와줄 일도 딱히 없는 거 뻔히 알면서 도와준다고 나오고. 뭔가 할 말 있는 거 아니었어?”
“음…….”
키이엘로는 계면쩍은 얼굴로 어설프게 웃었다. 못 속이겠네. 그 말에 나는 가볍게 코웃음 쳤다. 그럼 요 반년 넘는 기간 동안 도멤과 키이엘로와 얼마나 붙어 다녔는데 그런 걸 모르겠는가?
키이엘로는 발카를 보다가 말했다.
“우투그루는 텐과 내가 말이 통한다는 걸 전부터 알고 있었나 봐.”
“엥?”
전혀 생각 못 한 화두에 나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키이엘로는 수려한 얼굴을 긴 손으로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언제부터 눈치챈 건지 좀 신경 쓰여서 상담하고 싶었어.”
“왜 그런 생각이 든 건데?”
“최근에야 생각이 들었어. 밀항 중에 의심하다가 아까의 대화로 확신했지.”
그 말에 나는 좀 전의 대화를 되짚어 보았다. 딱히 이상한 점은 없던 것 같은데. 내가 골몰하는 것 같자 키이엘로는 얼른 말했다.
“도멤이 아까 뱀과 말이 통하게 되었다고 할 때 무심코 너랑 같이 나를 언급한 거 알아?”
“하지만 그건 그냥 동물하고 어울리는 녀석이 너랑 나니까……. 아.”
“확실하게 ‘목소리가 들린다’라고 말하면서 언급했으니까. 보통은 좀 이상하게 여기거나 할 텐데 아무런 거리낌 없이 수긍하고 넘어가더라고.”
나는 그러고 보니, 하고 생각하다가 키이엘로를 흘끔 보았다. 키이엘로는 미약한 불쾌감과 찜찜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깍지 낀 제 손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 신경 쓰여? 뭐 그랬었나 보다 하고 넘기면 될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하긴, 너희 둘은 사이가 좀 그러니까 그런가?”
“……역시 그렇지.”
“옛날에 둘 사이에 있던 일 때문에 그래? 그런 거라면 내가 해줄 말은 딱히 없어, 키이엘로. 알지?”
내 말에 키이엘로는 힘없이 웃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게 구구절절한 예전 이야기를 꺼낼 생각도 없던 듯 키이엘로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네 말이 맞아. 그냥 누구한테 털어놓고 싶었나 봐.”
“그래, 뭐, 조금 충격이긴 하네. 우리 중에 제일 미신 같은 거 안 믿을 것처럼 생긴 놈이잖아.”
“그렇지. 사실 여기서 가장 미신과 연관된 사람이 제일 안 믿는 사람인 건 특이하지만.”
그거 내 얘기야? 나는 나를 가리켜 보였다가 키이엘로가 어깨만 으쓱이자 그를 흘기며 혀를 찼다. 키이엘로는 가볍게 웃다가 한숨처럼 내뱉었다.
“텐이 없어서 이런 이야길 할 존재가 없었는걸.”
나는 멈칫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았다. 키이엘로 역시 말한 뒤 아차 싶었는지 어색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가 황급히 말했다.
“방금은, 그냥…….”
“꼭 텐한테만 말해야 하는 일은 아니잖아.”
“…….”
“나나 도멤은 언제나 네 이야길 들어줄 준비가 되어있어.”
내 말에 키이엘로는 잠시 아득한 얼굴을 했다. 그는 이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렇지……. 그러나 그가 수긍했다고 해서 나는 당장 그가 입을 열 일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조타를 고정하고 창가에 앉아 있던 발카에게 팔을 뻗었다. 그러자 발카가 금방 내게 날아와 팔뚝에 앉았다. 나는 키이엘로를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다 끝났어. 아마 새벽에는 섬이 보이기 시작할 것 같은데.”
『맞아! 정말 배우는 게 빠르네, 로트.』
발카가 들뜬 어조로 나를 칭찬했다. 나는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제 네 도움 없이도 할 수 있게 공부해야지.”
그러자 발카는 부리를 딱 다물었다. 나는 발카를 자세히 살필 생각을 하지 않고 키이엘로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자.”
“또 내려가면 뱀이 우리에게 넋두리를 하진 않을까?”
“그 넋두리, 누구 때문에 시작된 건지 생각하면 넌 할 말 없을 텐데.”
“알았어, 조용히 할게.”
웃으며 선실로 내려간 우리는 뱀이 무어라 말을 꺼내기 전에 우리끼리 떠들며 시간을 보냈다. 뒤늦게 물자를 확인하고 뭔가 가득 적힌 메모를 쥐고 올라온 우투그루가 피곤하다며 해먹에 가서 누웠다.
도멤과 나는 그 옆으로 가서 자장가를 불러주겠다고 하다가 한 소절을 꺼내기도 전에 맹렬한 거부에 부딪혀야 했다. 도멤이 투덜거렸다.
“너의 달콤한 수면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마음이 고맙지 않아?”
“꺼져, 좀!”
“아, 알았어, 알았어! 잘 자, 우투그루.”
우투그루는 신경질적인 얼굴로 우리를 노려보다가 마른세수를 하고는 풀썩 누웠다. 소득 없이 돌아온 우리에게 키이엘로가 고개를 설설 저어 보였다.
“놀리는 거야, 못살게 구는 거야?”
“당연히 놀리는 거지! 난 사람을 못살게 굴진 않아.”
“난 둘 다야.”
“로트, 너 정말 나쁜 애다.”
“그걸 이제 알았다니. 사람 보는 눈이 없구나, 도멤.”
키이엘로는 당당한 도멤과 내 말에 웃기만 했다. 어지간히 우투그루가 성질내는 꼴이 우스웠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다가 모두가 잠자리에 든 후였다.
앞서 살폈던 대로 파도가 거칠어질 것 같자, 나는 잠에서 깨 하품을 하며 조타실로 올라갔다. 굳이 깨우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언제 일어난 건지 발카가 잽싸게 날아와 내 어깨에 앉았다.
갑판 위로 올라가자 곧장 소금 바람이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흔들며 지나갔다. 동이 터오려는 하늘이 보라색과 푸른색이 뒤섞인 빛으로 밝아지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