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bird and the Wolf RAW novel - Chapter (218)
바다새와 늑대 (217)화(218/347)
#61화
“그냥 자고 있지.”
『싫어. 난 네 항해를 도와줄 의무가 있어!』
“의무까진 아냐.”
내 말에 발카는 다소 심통이 난 아이처럼 씩씩거렸다. 발카가 내 귀를 부리로 콱 물었다. 아프진 않았지만 따끔한 느낌이 들자 나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바다새를 보았다.
“왜 짜증을 내?”
『내가 있는데 뭐 하러 네가 항해술을 배워?』
“뭐……. 지금 그 이유 때문에 화난 거야?”
『화난 게 아냐! 로트, 내가 있잖아. 나는 언제든 널 위해 날씨도 읽고 항로도 알려줄 거야.』
“…….”
물론 넌 그렇겠지……. 하지만 그랬다가 우투그루가 내게 비아냥댔다고 폭풍을 모르는 척하면 어쩌려고? 나는 그 말이 튀어 나가려는 것을 꾹 눌러 참았다. 대신 나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난 너에게만 의존하고 싶지 않아.”
『이건 의존이 아냐, 로트!』
“아니, 맞아.”
나는 발카를 보았다. 자주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불현듯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네가 있다는 이유로 다들 나보다 너를 보잖아. 나는 과거에도 지금에도 내 능력으로 나를 인정받고 싶어. 네가 있고 없고에 따라서 내 평가가 갈린다면 그건 의존이지.”
『하지만……. 나는 그걸 위해 있는걸.』
“아니, 넌 내가 실수할 때 도와주는 보조면 충분해.”
내 말에 발카는 부리를 다물고 나를 응시했다. 조타실 밖으로 보이는 파도가 높았다. 그리 크지 않은 배가 서툰 부모가 흔드는 요람처럼 휘청거렸다.
나와 발카 사이에 잠시간 침묵만 맴돌았다. 발카는 한동안 조용히 있다가 말했다.
『내가 또 폭풍을 알려주지 않을까 봐 그러지.』
나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발카를 돌아보았다. 내 시선에 발카는 화다닥 물러나듯 날아가 키 옆에 앉았다.
『나는 충분히 반성했어!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도 했잖아. 그런데도 넌 날 안 믿어, 그렇지?』
“발카.”
『나는, 나는 널 정말 아끼는데……. 너는 아냐. 내가 필요하긴 해? 넌 내가 좋기는 해?』
발카는 감정에 북받친 듯 웅얼거리듯 말하며 날개 끝을 늘어뜨렸다. 나는 당황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발카를 보았다.
“나도 이해할 수가 없어.”
『뭐?』
“넌 그저 나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다며. 내가 바다에 나가지 못할 수 있다는 말에도 선뜻 나를 선택해 내 바다새가 되었던 건 너야. 그리고 이전의 너는…….”
나는 내게 온 직후의 발카를 떠올렸다. 발카는 지금보다 조용했고, 솔직히 말해 내게 관심이 있긴 한가 싶을 정도였다. 언제부터 발카가 나와 이렇게 붙어있었지?
“……어쨌든 내게 네가 필요 없다는 소리가 아냐.”
『이제 내가 없이도 항해할 수 있으면 날 버릴 거잖아!』
“아냐! 난―”
그때 조타실의 문이 열렸다. 우투그루가 들어오려다 말고 내 목소리에 움찔 떨며 멈춰 섰다. 그는 얼떨떨한 눈으로 나와 발카를 번갈아 보더니 긴가민가한 얼굴을 했다.
“……미안, 대화하는 중이었냐?”
“별 것 아냐.”
나는 얼버무리며 한숨을 쉬고 발카에게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때 발카가 확 날아올라 우투그루의 어깨에 앉았다. 그에 나는 당황해서 발카를 보았다.
우투그루 역시 갑작스럽게 제 어깨에 앉은 바다새를 보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발카가 말했다.
『너랑 떨어져 있을래.』
“뭐?”
『…….』
발카는 마치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부리를 딱 다물어 버렸다. 나는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앓는 소리를 내다가 우투그루를 보았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아.”
우투그루는 나와 발카를 번갈아 힐끔거리며 떫은 얼굴을 했지만 금방 추스르고 말했다. 섬에 도착하기 전에 목록을 확실히 확인하려고. 그러더니 그는 쪽지를 꺼내 내게 보여줬다.
“이 시간에? 너도 어지간히 일 중독이다.”
“네가 새벽쯤이면 섬이 보일 거라고 했잖아.”
“그래서 그 시간 맞춰서 일어난 거야?”
네가 기계야? 나는 감탄인지 경악인지 모를 눈으로 우투그루를 보며 그의 손에서 쪽지를 받아들었다. 빼곡하게 적힌 물자 목록에 나는 심각한 얼굴을 했다.
“우리가 가진 돈으로 이걸 다 살 수 있을까?”
“갖고 온 보석이 몇 개인데.”
“하긴…….”
그럼 정보도 살 수 있을까? 그러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우투그루가 말했다.
“정보원을 마련하는 비용을 차감해서 짠 목록이야. 우리는 계속 떠돌 듯 항해해야 하니 접선할 만한 여유가 없어. 수배된 입장이니까 정보원을 고용한대도 신용하기도 어렵지.”
“음…….”
“당장은 정보원이 계약을 지킨다고 해도 우리의 정보가 새어나가면 역추적당할 위험이 생기니까.”
“누구에게?”
내 물음에 우투그루는 눈썹만 들썩였다.
“제국이든 아버지에게든, 정보원을 쓸 생각을 하는 누구에게든.”
내게 확인을 받은 우투그루는 쪽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으며 가뿐하게 돌아서려다가 아직도 제 어깨에 앉은 발카를 보고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이 새는 왜 자꾸 내 어깨에 앉는 거야?”
“그러고 싶은가 보지.”
우투그루는 성가시다는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다가 이내 머뭇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발카는 그가 조타실을 나가려고 하는데도 꿋꿋하게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다. 조타실을 거의 나갔던 우투그루가 결국 도로 들어와 말했다.
“이대로 가라고?”
“……발카.”
나는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발카를 불렀다. 그러나 발카는 내게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에 나는 옅게 한숨을 쉬고 우투그루에게 말했다.
“그냥 네 어깨에 있고 싶은가 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네 할 일 해.”
“그렇게 말해도……. 알았어.”
우투그루는 뭔가 할 말이 많은 얼굴을 하면서도 미련 없이 조타실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나는 끓는 숨을 내뱉고 다시 키를 잡았다.
수평선 가까이에 섬이 보이고 있었다.
* * *
『네 쓸모가 사라진 뒤 그 선장이란 인간은 망설임 없이 아들인 너를 베려 했지.』
어쩌면 로트렐리도 그럴지도 몰라. 내 쓸모가 사라지면 난 필요 없는 존재가 될 테니까. 발카는 혼자 중얼거리고는 우투그루를 보았다.
바다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인간은 어깨 위에 꿋꿋하게 앉은 새가 거북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짐을 챙기면서 발카의 존재를 잊었는지 지금은 보석과 괸 주화를 추스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내 말도 못 듣는 놈 어깨 위에서 뭘 하는 거지? 발카는 뚱해진 기분을 느끼며 그가 괸 주화와 펠른 주화를 세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우투그루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발카를 보며 말했다.
“내가 돈이라도 꿍쳐둘까 봐? 그래, 지켜봤다가 네 주인한테 이르든가 해라.”
우투그루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주화들을 세며 괴어 놓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새랑 지금 뭘 하는……. 잘 들리지 않게 웅얼거리는 소리였으나 안타깝게도 그의 어깨에서 듣기엔 무리가 없었다.
발카는 속으로 혀를 차며 그를 흘겼다. 누군 그런 기분 들지 않는 줄 알고? 결국 발카의 목소리를 듣고 반응해줄 사람은 로트렐리뿐이었다.
따지고 보자면 키이엘로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있다. 하지만 발카는 검은바다에서 그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키이엘로에게 관심이 없었다.
발카는 불현듯 그 곁에 붙어있던 늑대에게 묻고 싶었다. 넌 왜 그의 곁을 떠나갔지? 어떻게 그렇게나 쉽게 훌쩍 떠날 수 있었지?
지금 회상하자면 그때가 차라리 안온했다. 잠시나마 인간들의 복잡한 속사정을 피할 수 있던 어둑한 골목 속의 건물에서 발카는 내내 그것을 텐에게 묻고 싶었다.
「나는 곧 키이엘로를 떠날 거야.」
「시끄러워, 내 알 바야?」
로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창밖을 보던 발카는 대뜸 말하는 텐에게 쏘아붙였다. 늑대는 시큰둥한 얼굴로 발카를 보며 말했다.
「넌 대체 언제까지 그 녀석의 극성 부모처럼 굴 셈이야? 슬슬 그만두는 게 좋을걸.」
「닥쳐.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발카는 위협적으로 발톱을 세우며 날갯짓했다. 새를 질색하는 늑대는 아니나 다를까 대번에 으르렁거리며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켜 뒤로 물렸다.
「충고를 해줘도 이 난리야, 성깔 더러운 조류 같으니.」
「누가 네 충고가 필요하대? 제 감당 못 할 오지랖으로 애먼 작자 뺨 올려붙였으면 저도 얻어맞을 각오는 했어야지.」
「어쨌든 난 키이엘로를 떠날 거야.」
「…….」
그쯤 되자 발카는 로트가 자주 그렇듯 ‘그래서 어쩌라고!’하고 윽박지르고 싶은 것과는 별개로 텐을 돌아보았다.
「왜 그걸 나한테 말해? 네가 떠나면 나야 좋지.」
「나는 키이엘로 주변의 인간들을 믿어. 하지만 만약의 일도 있는 법이니까…….」
늑대는 금빛 눈으로 발카를 보며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 네가 이들을 잘 지켜줘.」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
발카는 질색하는 태도로 텐을 보았다. 그렇게 걱정된다면 떠나지 않으면 될 일이다. 그리고 발카는 로트렐리만 중요하지 다른 녀석들이야 어디서 빵을 먹든 진흙 구운 것을 주워 먹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는 노을을 보니 감수성이 풍부해지더냐? 되지도 않는 헛소리 그만하고 그냥 계속 붙어 다녀. 그러면 되잖아?」
「여건이 되었다면 더 끌었겠지.」
텐은 혀를 차며 발카를 한심하게 보더니 말을 이었다.
「인간들이 거대한 늑대를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겠어? 이들은 이제 인간들의 틈에서 치이게 될 거야. 작아질 수 있는 네놈은 몰라도 나는 안 돼.」
「그럼 멀찍이서 따라오든가.」
「난 다른 곳으로 갈 거야.」
그 말에 발카는 고개를 기울였다. 다른 곳?
「나를 부르는 곳. 그곳에 도달해서 흐르는 대로 있으면 언젠가는 키이엘로와도 다시 만나겠지.」
너도 로트 녀석을 만났다면 느낀 적 있을 텐데? 우리 같은 짐승이 느끼는 본능 같은 흐름을 말야. 텐의 말에 발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창밖만 바라보았다.
왜 모르겠는가. 그와 같은 짐승들은 논리가 아닌 본능의 원칙에 따라 살아간다. 그 새벽의 부름, 잠들던 이지마저 일깨우는 거대한 경종.
그것을 따라가면 그 앞은 생경한 존재, 미지의 인간들이 즐비한 전혀 다른 세계일 것이다. 그것은 나를 집어삼킬 것이다.
그 위협을 느끼면서도 기어코 눈을 떠 향한 곳엔 그들이 있다. 작은 존재, 그러나 곧 나의 거대한 몸을 뒤덮을 정도로 강렬한 존재가.
발카는 골목 끝으로 갈색 머리의 청년과 함께 걸어오는 로트렐리를 보며 작게 말했다.
「나는 그것을 거슬렀었어.」
「뭐?」
「수 번, 수십 번 거슬렀었다.」
하지만 결국 그 애만큼은 거스르지 못했다. 바다새는 드넓은 바다를 모두 꿰뚫어 보면서도 고작 작은 인간 하나에 묶여 새장에 들어갔다.
오로지 그 애만을 위해.
「넌 그걸 거스르려 하지 않는군.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런데 넌 그거로 만족해? 그 얼빠진 놈 곁에 있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그래서 네게 말했잖아. 이들을 지켜달라고.」
「미친놈…….」
발카는 학을 떼며 텐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자신은 로트렐리만 무사하면 되었다.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닐 터인 저 늑대가 뭔 바람이 불어서 저런 개소리를 하는지.
그때 텐이 말했다.
「하긴, 넌 좋든 싫든 이들을 때때로 보호해주게 될걸. 그것을 로트가 바라니까.」
「…….」
그 저녁의 대화를 끝으로 늑대는 며칠 뒤 정말로 키이엘로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 그 재수 없는 늑대의 말대로 발카가 딱히 바라지 않아도 로트가 원했기에 바다새는 때때로 일행을 도와줘야 했다.
하지만 그래서? 그래서 결국 넌 키이엘로의 곁을 떠나 만족했나? 그 과정이 아무렇지 않았나? 어떻게 그렇게 훌쩍 떠날 수 있었을까. 차라리 나도 그게 가능하다면…….
발카는 물결이 선체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때 짐을 다 챙긴 우투그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벽 일찍 일어나 피곤하긴 한 듯 눈가를 문지르던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런 우투그루를 보며 발카는 홀로 중얼거렸다.
『버림받는 건 어떤 기분이야? 혼자 남겨진 뒤에 여기 굳이 남은 이유가 뭐야?』
너도 달리 갈 곳 없이 이곳에 있는 거지? 발카의 목소리가 울린 이후에도 우투그루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야 당연한 말이었다. 그는 발카의 말을 듣지 못하니까.
말 뒤에 오는 공백에서 공허함을 느낀 발카는 우투그루의 어깨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그제야 그가 바다새를 돌아보았다.
발카는 그가 무어라 말을 할까 기다리다가 우투그루가 의아한 표정으로 보고만 있자 그냥 밖으로 날아올랐다. 결국 발카가 갈 곳은 로트렐리의 곁뿐이었다.
부름에 이끌려 묶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과거 그렇게 거스르고자 발버둥 쳤음에도…….
발카는 꼭 그때 같은 새벽하늘을 가로질러 조타실로 들어갔다. 발카가 그녀의 어깨에 내려앉자 조타를 두고 앉아 잠시 졸고 있던 로트렐리가 눈을 떴다.
“이제야 와?”
『…….』
발카는 아무런 말 없이 로트렐리의 머리칼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런 발카의 등을 쓰다듬으며 작게 한숨을 쉰 로트렐리는 섬이 가까워지자 속도를 늦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화가 난 건지 모르겠어. 난 너 안 버려.”
『……알아.』
발카는 기운 없이 대꾸했다. 그러나 이 애는 알까? 그런 것은 아무도 확신하지 못한다. 넌 본능이 아닌 논리와 의지로 살아가는 존재니까. 나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흐름에 따라 너를 만났고 앞으로도 너에게 메여 살아가야 하는데, 그 긴 시간 중에 언젠가 네가 나를 쓸모 없다고 여긴다면?
지금의 약속을 위해 넌 억지로나마 나를 곁에 두겠지. 하지만 그런 건 내가 바라는 게 아냐. 나는 올 리가 없는 나의 승리를 거머쥐고 싶은 것이다. 발카는 로트렐리의 머리에 고개를 기대며 생각했다.
나는 항상 너에게 패배하고 있고, 너는 내게서 항상 승리만을 쟁취하지. 내가 너를 온전히 나의 것으로 남기게 될 날이 올까? 내가 승리하는 때가 오긴 할까?
그때 발카는 질리도록 느껴온 어떤 거대한 흐름을 느꼈다. 그 순간은 머지않아 올 것이다.
이 애가 내가 세상에 남긴 것이 될 날이 올 것이다.
“애들 깨우러 가야겠다.”
로트렐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발카는 말없이 그녀의 어깨에 고쳐앉으며 생각했다. 뭐, 그래. 그 흐름에 한 번 휩쓸렸다면 계속해서 휩쓸리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그러면 자신도 자신만의 답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다음 편에서 계속)